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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갑동 교수의 대전충청 역사문화 다시보기-지석묘와 청동기 문화

2010-01-25기사 편집 2010-01-24 06: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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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착농경 발달… 집단적 조상무덤 조성 시작

첨부사진1대전 선사공원에 있는 청동기 시대 움집.

인간의 지능이 발달하면서 인류는 청동으로 만든 도구를 만들어 사용하기 시작했다. 우리 나라의 청동기 문화는 대략 기원전 2,000~1,500년부터 시작되었다. 한반도 지역의 청동기 문화는 기원전 1,500년 경에 시작되었다 할 수 있는데 이는 기원전 2,000년 경부터 시작된 요녕(遼寧) 지역 청동기 문화의 유입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사실 우리나라의 청동기 제품은 대개 철기와 동시에 출토되고 있는 경우가 많아 초기 철기 시대와 겹치는 것이 사실이다. 청동기는 석기보다 날카롭고 여러 모양을 만들 수 있는 장점이 있었다. 그러나 만드는 공정이 까다롭고 재료도 많지 않아 주로 무기나 제사용 도구, 지배 계층의 장식품을 만드는데 주로 사용되었다. 비파 모양 동검이나 날이 가늘은 세형 동검, 청동제 도끼, 청동 방울, 그리고 청동 거울 등이 그것이다. 따라서 아직도 일상 도구는 석기로 만든 것이 많이 사용되었다. 돌도끼와 돌화살 등의 마제 석기가 보편적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한편 한국에 있어 청동기 시대는 농경의 일반화라는 특징을 갖고 있다. 그 대표적인 유물이 반달형 돌칼(반월형 석도)이다. 반달 모양의 석기를 만들고 거기에 2개의 구멍을 뚫고 줄을 끼워 손에 쥐고 이삭을 훑거나 자르는데 사용하였다. 단단한 나무나 잘 다듬은 농기구를 이용해 농사를 짓고 맷돌을 이용하여 곡식을 갈아 먹기도 했다.

농경과 관련하여 나타나는 또 다른 중요 유물은 무늬가 없는 민무늬 토기의 등장이었다. 그릇 전면에 무늬가 없는 대신 밑바닥은 빗살 무늬 토기와 달리 평평한 것이 특징이었다. 뾰족한 밑바닥 보다 평평한 밑바닥이 그릇을 놓는데 훨씬 편리하다는 사실을 아는데 몇 천년이 걸린 것이다. 이들 토기는 높은 온도에서 구워 만든 것이기 때문에 빗살 무늬 토기보다 훨씬 단단하여 잘 깨지지 않았다. 또한 주로 곡식을 저장하거나 때로 곡식을 익혀 먹는 도구로 사용되었다.

청동기 시대 인류의 주거지는 주로 강변을 끼고 있는 구릉 지대에서 발견되고 있다. 울창하고 얕은 구릉 정상부를 벌채하여 주거지를 만들고 주변 지역을 개간하여 농경지로 삼았다. 초기에는 주변 지역에 불을 놓아 수풀을 제거하고 농사를 짓는 화전(火田) 농업의 형태를 취하였으나 취락의 규모가 커지면서 집단 노동을 통해 나무를 벌목하고 농사를 지었다.

이들이 살던 집터는 신석기 시대보다 규모가 커졌다. 이는 인구의 증가로 인한 자연스런 현상이었다. 집터의 모양은 원형이나 직사각형이었으나 집터의 바닥은 신석기 시대보다 지상으로 올라오게 되었다. 이는 지붕이 이전보다 튼튼해졌으며 취사와 난방을 겸할 수 있는 화덕이 발달한 때문이었다.

대전 충청 지역에서도 청동기 시대의 유적이 여럿 발견되었다. 대전의 둔산 선사 유적지를 비롯해 용산동 유적, 노은동 유적, 궁동 유적, 신대동 유적, 금산 수당리 유적, 천안 백석동 유적, 부여 송국리 유적 등이 있다. 특히 수당리 유적에서는 민무늬 토기와 함께 주거지 2기가 발견되었고 신대동 유적에서는 9기의 주거지와 석곽묘 1기가 발견되었다. 석곽묘는 말 그대로 돌로 시신을 안치할 수 있도록 직사각형의 모양을 만든 무덤을 말하는데 주거지와 분묘가 함께 발견된 것은 흔치 않은 일이다.

부여 송국리 유적은 마을의 모양과 당시 생활상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유적으로 꼽힌다. 이 유적은 1975년에서 1990년대까지 발굴, 조사되었다. 여기에서는 여러 주거지가 발견되었는데 주거지의 분포 상태로 보아 현재의 자연 마을과 흡사하다. 구릉의 경사면에 취락이 있기도 하지만 그 밑의 저지대에까지 마을이 확대되고 있다. 이는 저지대를 이용한 논농사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실제 여기에서는 불에 탄 쌀이 발견되어 그러한 가능성을 확인해 주고 있다. 또 민무늬 토기는 물론 청동 도끼의 거푸집이 발견되어 요녕 지역의 비파형 동검 문화와의 관련성이 강조되고 있다.

청동기 시대의 큰 특징 중 하나는 지석묘(고인돌)의 출현이다. 이는 지하 또는 지상에 무덤 시설을 만들고 그 위에 거대한 돌을 얹어 놓은 형태를 말한다. 이러한 고인돌은 우리 나라 뿐 아니라 세계 전 지역에 고루 분포되어 있다. 우리 나라의 지석묘는 보통 북방식 지석묘와 남방식 지석묘로 구분되어진다. 북방식 지석묘는 탁자식 지석묘라고도 하는데 시체를 지상에 놓고 앞, 뒤로 얇은 돌판을 세운 다음 그 위에 큰 돌을 얹은 형태이다. 남방식 지석묘는 바둑판식 지석묘라고도 하는데 시신을 지하에 두고 작은 돌을 고인 뒤에 큰 돌을 덮개로 한 형태이다.

종래 이 지석묘는 흔히 족장의 무덤으로 인식되어 왔다. 그러나 영산강 유역에서는 수 십기 수백기가 밀집된 형태로 나타나고 있어 이 같은 견해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었다. 이는 농경의 발달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즉 농경이 발달하면서 좋은 농경지의 확보가 집단의 사활과 밀접한 관련을 갖게 되었다. 농경지에 대한 사유의 개념이 생겨나면서 영역의 확보가 중요해졌다. 영역의 확보는 조상 대대로 우리가 이 지역을 점유하고 있었다는 증거를 보여주어야 했다. 이것이 조상들의 무덤을 조성하는 형태로 나타났다. 이것이 바로 지석묘였다. 그러다가 후기에 가서는 일반 지석묘 중에서도 족장의 무덤은 더욱 커다란 형태로 조성되었다. 결국 집약적인 정착 농경은 토지에 대한 소유 의식을 낳았고 그 표현이 바로 지석묘의 형태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대전, 충남 지역에서도 곳곳에서 지석묘가 발견되고 있다. 예산·아산·천안·당진·태안·서산·홍성·보령·서천 등지에서 그 모습이 보이고 있다. 대전 지역에도 비래동 1호 지석묘와 유성 교촌동에 있는 내동리 지석묘 등이 있다.

아무 의미 없는 것 같은 큰 돌에도 인간의 발전과 그 의식이 들어 있다. 인간은 물론 세상 모든 것은 다 나름의 의미를 가진 소중한 존재란 생각을 하게 된다. 역시 아는 것이 힘인 것 같다.

<대전대학교 인문예술대학 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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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사진2대전 노은동 선사박물관의 청동기 전시관.

첨부사진3대전 교촌동에 있는 내동리 고인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