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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갑동 교수의 대전충청 역사문화 다시보기-①공주 석장리와 구석기

2010-01-11기사 편집 2010-01-10 06: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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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의 태동… 45만년전 인류 발자취 고스란히

첨부사진1복원된 구석기시대 막집.

①공주 석장리와 구석기

인류의 출현은 어떻게 이루어진 것일까. 고릴라나 침팬지, 오랑우탄에서 진화한 것일까. 아니면 원래 이들과는 다른 존재로 누군가에 의해 창조된 것일까. 이에 대해서는 과학이 발달한 현재에도 미스테리로 남아 있다.

인류가 처음 지구상에 출현한 것은 600만년 전 또는 400만년 전으로 알려져 있다. 이 때부터 약 1만년 전까지를 우리는 구석기 시대라고 부른다. 돌의 일부분을 떼어 내 주먹 도끼, 주먹 자르개, 돌날 등을 만들어 썼기 때문에 우리 말로 ‘뗀석기 시대’라고도 한다. 당시 인류는 이미 두 발로 서서 걷게 되었다. 동물과의 차별이 이루어진 것이다. 두 발로 걷게 되면서 인류는 여러 가지 이점을 갖게 되었다. 손을 자유 자재로 움직일 수 있었다. 높이 있는 열매를 딸 수도 있었고 아기를 돌보는 데에도 편리하였다. 손에 막대기나 돌 같은 도구를 가지고 다른 작업을 수행할 수 도 있었다.

이러한 최초의 인류는 아프리카에서 출현한 것으로 보고 있다. 당시 지구는 대체적으로 춥고 건조하였다. 따라서 넓은 초원에서 생활하였다. 이후 지구는 추운 시기인 빙기와 따뜻한 시기인 간빙기가 번갈아 나타났다. 빙기에는 얼음으로 덮여 있는 곳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육지가 지금보다 훨씬 넓었다. 우리나라의 경우 중국이나 일본 등과 같이 붙어 있었다.

아프리카의 인류는 점차 또 다른 삶을 찾아 다른 대륙으로 이동하였다. 이동 도중 그들은 불을 발견하였다. 불은 처음 나뭇가지가 바람에 서로 마찰이 되면서 자연적으로 발생하였다. 이를 본 인류는 처음 두려워하였다. 불이 몸에 접근하면 뜨거웠고 불이 데이면 죽는 경우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인류는 그 두려움을 극복하고 불을 이용하게 되었다. 불의 이용은 인류에게 많은 생활의 변화를 가져다 주었다. 우선 불을 피워 추위를 극복할 수 있었다. 동굴이나 막집에서 나와 있을 때에도 추위가 문제되지 않았다. 불을 이용해 잡은 짐승이나 물고기를 익혀 먹을 수도 있었다. 불에 구운 고기는 육질이 연해 먹기가 훨씬 좋았다. 이처럼 불의 사용은 인간의 의식주 생활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그들은 한반도에까지 와서 살게 되었다. 그 흔적을 우리는 우리 고장 공주의 석장리에서 볼 수 있는 것이다. 이 유적은 1964년에 동삼동 패총을 조사하던 미국 고고학자가 지표 조사를 하던 중 처음 구석기의 존재를 확인함으로써 학계에 알려지게 되었다. 당시 큰 물이 지나가면서 무너진 강가 언덕의 퇴적층에서 찾은 유적이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우리나라에서 구석기의 존재는 미확인 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일제 시대인 1930년대에 함경북도 온성군 동관진에서 동물 뼈와 석기가 발견되었으나 무시되었다. 1962년에도 북한의 함경북도 웅기군 굴포리에서 구석기 시대의 석기를 찾아냈지만 남한에는 전혀 알려지지 않은 상황이었다. 이후 연세대학교의 손보기 교수에 의하여 체계적으로 발굴되어 학계에 보고되었다. 1964년 11월 처음 발굴을 시작한 뒤 1974년까지 해마다 한, 두 달씩 발굴 조사를 하여 학계에 보고된 유적이다. 1990년 봄에는 한국선사문화연구소에 의하여 발굴이 진행되기도 하였다. 이 유적의 발굴로 우리나라 구석기학이 체계적으로 자라잡게 되었다.

구석기인들은 무리를 지어 생활하면서 동물을 사냥하고 물고기를 잡아먹거나 자연의 열매 를 채집하여 먹으면서 생활하였다. 따라서 그들의 주거지는 산이나 언덕의 자연 동굴이거나 강가에 막집을 짓고 살았다. 석장리 유적은 당시 그들의 생활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즉 유적 앞에는 동서방향으로 금강이 흐르고 있으며, 유적의 북쪽으로 높지 않은 산언덕지대가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석장리유적의 퇴적두께는 약 8m로 27개 지층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13개 층에서 석기가 출토되었다. 구석기시대의 지층은 크게 3개의 묶음으로 나눌 수 있다. 전기구석기층에서는 찍개·주먹 대패·긁개 등의 석기가 나왔다. 중기구석기로 넘어오면서 석기를 만드는 솜씨가 그 전 시기보다 발전된 것으로 나타나며, 석기의 종류도 늘어난다. 찍개·주먹대패·자르개·긁개·찌르개·주먹도끼 등이 중기구석기문화층에서 나왔다. 후기구석기문화층에서는 석기제작터·집터·살림터가 드러났다. 기둥을 세우고 움막집을 지었으며 화덕을 만들어 불을 피운 흔적도 발견되었다. 집터에서는 사람 머리털이 여러 점 발굴되기도 하였다. 집터의 크기로 보아 10명 안팎의 사람들이 살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돌을 조금 다듬어 거북·새·개와 같은 짐승상을 나타낸 돌조각품을 만들었으며 고래상을 새긴 흔적이 집터 바닥에서 드러났다. 또 꽃가루분석을 통해 볼 때 후기구석기시대에 이 지역에는 오리나무·단풍나무·명아주 나무 등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일부 학자들은 이 유적에 대해 의문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약 40~50만년 동안 한 지역에서 인류가 계속 살았으며 그것이 또 현재까지 남아 있다고 생각하기는 곤란하다는 것이다. 강물의 범람과 지형의 변화 등이 되풀이 되었을 것을 생각하면 그 흔적이 한 장소에 체계적으로 쌓였다는 것은 더욱 문제가 된다는 것이다. 특히 전기 구석기 유물들은 인공의 흔적을 발견하기 어렵고 자연적으로 깨진 것으로 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구석기 유적의 존재를 확실히 해주었고 구석기 문화에 대한 조사, 발굴, 연구가 이루어지게 한 유적지라는 면에서 큰 의의가 있다 하겠다.

지금은 사적 제334호로 지정되어 있다. 그 위치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석장리기념 박물관이 있다. 이 박물관은 2006년 개관하였는데 구석기 시대의 생활상을 당시의 자연, 인류, 생활, 문화, 발굴 등 5개 분야로 나누어 전시하고 있다. 또 야외에는 선사 공원을 조성하여 유적을 복원해 놓기도 하였다.

이 땅에 살았던 우리들의 선조가 45만 년 전의 인간이었다는 면에서 세월의 유구함을 실감케 한다. 나 역시 45만년의 한 점을 살고 있는 것이다. 오랜 세월의 순간 순간마다 열심히 노력한 덕분에 현재의 인류는 문명의 혜택을 누리면서 편안히 살고 있는 것이다. 세월의 무상함에 겸허한 마음을 되새겨 본다.

대전대 인문예술대 학장 김갑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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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사진2공주 석장리박물관 전경.

첨부사진3석장리서출토된 주먹도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