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DJP 연합’ 대선 승리 이뤄

김대중 전 대통령의 서거로 온 나라가 슬픔에 잠겨 있는 가운데 충청권도 비탄에 잠겼다. 김 전 대통령은 특히 지난 97년 이른바 ‘DJP 연합’으로 충청도의 표심을 가져가며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50여 년 만에 처음으로 여야 간 평화적 정권교체를 이룩했기에, 그의 서거는 더욱 충청인들의 가슴을 울리고 있다.

김 전 대통령과 충청권의 인연은 멀리 60년대 후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3선을 목표로 6차 개헌을 추진했던 당시, 40대였던 김 전 대통령은 이를 격렬하게 반대하며 저지 투쟁에 나선다. 그리고 장외 투쟁의 시작이자, 전국 순회강연의 첫 기착지로 대전을 선택하게 된다.

측근들에 따르면 김 전 대통령은 정치 입문 이후 고향인 호남과 충청 지역은 백제권이란 의식을 갖고 있었으며, 3선 개헌 투쟁을 기점으로 대부분의 전국 순회를 대전에서 시작했다.

이러한 그의 충청도에 대한 관심과 애정은 60년대 후반 행정수도 구상에서도 나타난다.

7대 국회 시절, 그는 평화적 남북통일에 대비해 수도인 서울 이외에 남쪽의 대전을 제2의 행정도시로 만들어 평양과 같은 대도시 규모로 발전시켜 국토균형발전을 이뤄내는 방안을 추진했다. 균형발전 정책의 상징적 출발점이자 전환점이 되는 ‘행정수도 이전’ 계획은 71년 대통령 선거 때 당시 신민당 김대중 후보가 대전으로 행정수도를 옮기겠다고 공약하면서 처음 등장했다. 통일에 대비한 대전 행정도시 계획이 끝내 이뤄지지 못했지만, 박정희 대통령과 노무현 대통령에게까지 충청 행정수도가 연결됐었다.

그와 충청도의 인연은 95년 이뤄진 대전일보와의 인터뷰로도 이어진다. 92년 대선 패배 이후 정계 은퇴를 선언하며 은인자중했던 그가 대전일보와 단독 인터뷰를 통해 정계 복귀를 처음으로 시사한 것. 당시 이 보도는 일파만파 대형 이슈로 부상하며 정국을 흔들었고, 국민들은 그의 행보에 촉각을 세우며 후폭풍을 분석하기도 했다. 이에 앞서 김 전 대통령은 88년 대전일보사(옛 문화동 사옥)를 방문해 지역현안 사업을 논의하기도 했다.

DJ는 국민회의 총재 시절인 96년 예산이 편성되지 않은 대전지하철 용역비 반영을 비롯 대통령에 당선된 뒤에도 대덕연구단지 나노팹센터와 대전 컨벤션센터에 과감하게 예산을 투자하는 등 대전과 각별한 인연을 갖고 있다.

김 전 대통령과 충청권은 97년 ‘DJP 연합’을 통해 대선 승리를 이루며, 뜨거운 공조를 만끽한다.

‘외환위기 사태(IMF)’가 발발했던 97년은 제15대 대통령을 뽑는 해였고, 선거의 최대 이슈는 단연코 “누가 단군 이래 최대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가”였다. 대선 경쟁은 김영삼 정부를 계승한 이회창 한나라당 후보와 네 번째 대권 도전에 나선 김대중 새정치국민회의 후보 간의 접전으로 전개됐다.

그러나 네 번째 출마로 반 DJ 정서가 강했던 정국 상황과 집권 여당의 프리미엄은 김 후보에게 큰 부담으로 작용했고, 마침내 그로 하여금 충청권과의 공조를 제안, 후보 단일화를 성공시킨다.

15대 대선 투표 결과에서 알 수 있듯이 김대중 전 대통령은 충청권에서 이회창 후보를 압도했으며, 전국적으로 40만여 표 차이로 이 후보를 누르고 청와대에 입성했다. 충청권의 공조가 없었으면, 또다시 낙선할 수 있었던 셈이다.

김 전 대통령은 이러한 ‘DJP 연합’에 많은 연구를 투자했다고 한다. 충청과 호남은 멀리 삼국시대 ‘백제시대’엔 동일권 내에 있었고, 가깝게는 동학농민운동의 발원지로서 같은 기질이 내재하고 있다고 판단한 것.

이러한 동질감 때문인지 그와 충청의 인연은 예사롭지 않다. 제15대 대통령으로서, 민주화의 선구자로서, 충청권과의 각별한 인연으로서 500만 충청인들의 가슴에 영원히 남을 것이다.

우세영 기자 sy6262@daejo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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