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순신 고택 부지 1차 경매 유찰…당시 종손도 빚져 위기-성금으로 구해

[아산]이 충무공 관련 재산 경매위기는 1930년대에도 한 번 있었다.

일제 강점기 당시에 있었던 현충사 위토(位土:문중의 제사에 필요한 비용을 충당하기 위하여 마련된 토지) 경매위기는 최근 경제위기 상황에서 벌어진 경매위기와 흡사하다.

당시 13대 종손 이종옥 씨는 살림이 점점 영세해지면서 1300원의 빚을 지게 됐고, 그 이자까지 합해 2100원에 이르게 됐다.

1930년 9월 채권자였던 동일은행은 여러 번 빚 갚을 것을 독촉하고 그 해 5월 말일까지 갚지 않으면 위토 60두락(斗落)을 경매에 처분하겠다고 나선 것.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묘위토는 묘에서 지내는 제사 비용 마련을 위해 경작하는 논밭으로, 지금의 현충사 일대인 음봉면 삼거리에 소재하고 있다.

당시 충무공의 묘위토가 경매 처분에 직면했다는 사실이 언론을 통해 국민들에게 알려지면서 이듬해인 1931년 5월 26일 충무공유적보존회가 결성됐고 성금 모금을 통해 모은 돈으로 6월 13일에는 위토 은행 채무 2292원 22전을 갚았다.

당시 모은 성금은 총 1만 3969원 68전에 이를 정도로 국민들의 관심과 성원은 ‘초유의 뜻 깊은 사건’으로 기록되고 있다.

윤치호(위원장)를 비롯 남궁억, 한용운, 정인보 등 15명의 위원으로 구성된 충무공유적보존회는 채무를 뺀 비용으로 위토를 추가 매입(4100원)하는 한편 현충사를 신축(5873원 15전)했다.

1932년 6월 5일 현충사 낙성식 및 영정봉안식에는 이른 새벽부터 전국에서 3만여 명의 국민들이 모일 정도로 성황을 이뤘다.

일제 강점기 당시 일어난 이 충무공의 위토 경매 위기는 국민을 단결시키고 민족성을 다시 일깨우는 계기가 되었다.

문화재청 현충사 관리소 관계자는 “일제 강점기 당시 이 충무공 위토의 경매위기 사건은 민족 성금이 모아져 현충사가 중건되고 민족이 하나로 뭉치는 계기가 됐다”며 “경매 문제만 놓고 보면 당시 상황과 매우 흡사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77년이 지난 지금, 또다시 현충사 부지 내 충무공 고택 부지 등이 경매 위기에 처하면서 이 충무공 관련 유적지의 수난사가 되풀이되고 있다. <이찬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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