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민섭 화백 인터뷰…˝절제된 비판·온유한 은유 진실 담는다˝

4칸의 좁은 지면에 담긴 촌철살인의 풍자와 비판으로 13년 동안 대전일보 독자들에게 큰 사랑을 받고 있는 시사만화 ‘꼬툴씨’가 지난 22일자로 연재 4000회를 맞았다. 4칸 시사 만화가 4000회를 넘기도록 꾸준히 연재된 것은 신문 역사상 많지 않은 일이다. 대전일보에 4칸 만화 꼬툴씨와 만평을 연재하는 심민섭씨(60·사진)로부터 신문 만화의 철학과 정치적 억압이 적지 않았던 시절 거침없이 그렸던 일로 인한 에피소드 등에 대해 들어봤다.

<대담=류용규 문화체육부장>

-대전일보에 4칸 만화 꼬툴씨와 만평을 연재한지 어느덧 4000회(22일자)를 맞는다. 감회가 새로울 것 같은데.

▲대전일보에는 지난 1995년 1월 하순부터 4칸 만화 꼬툴씨를 연재하기 시작했으니 벌써 14년째다. 당시 대전일보 만평을 그리던 안의섭씨가 세계일보로 가면서 내가 대전일보 만평을 시작하게 됐다. 한국일보, 서울경제신문 등의 신문에도 4칸 만화를 연재했지만 대전일보에 특별한 애정을 갖고 있다. 작업을 하는데 나를 믿고 모든 것을 맡겨줬기 때문이다. 전국지들은 이런저런 주문이 많아 작업에 어려움을 겪기도 했지만 대전일보는 그런 요구가 없어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마음껏 할 수 있었다. 철저한 직업의식을 갖고 연재를 해왔기 때문에 4칸 만화와 만평을 늦게 출고한다든가 하는 실수는 한번도 한 적 없다. 이번 달 말 환갑을 맞는데 연재 4000회 달성이 나에게 가장 큰 선물이 된 것같다.(웃음)

-만평을 연재하면서 갖가지 에피스드가 많았을 것 같다.

▲1989년 1월부터 한국일보에 4칸 만화 ‘심마니’와 만평을 처음 연재하기 시작했다. 독재, 반독재라는 이분법 아래에서는 시사만화 그리기가 오히려 더 쉬웠다. 그러던 중 보혁갈등이 본격화되면서 보수냐, 진보냐 라는 식으로 편이 갈리기 시작했다. (나는) 엄밀히 따지면 보수 쪽에 가깝다. 그 당시 노조를 비판한다는 것은 맞아 죽은 일이었다. 하지만 비판해야 할 점은 과감하게 그려냈다. 그 당시 스트레스는 말도 못해 키가 183㎝인데 몸무게가 57㎏까지 빠지기도 했다.

고충스러운 점도 많았다. 항의 전화는 항상 따라왔다. 나중엔 공포스럽더라. 어느날 DJ(김대중 전 대통령)를 4컷 만화에 그렸다가 한 DJ 추종자가 만나자고 해 나갔다가 주먹으로 얼굴을 맞은 적도 있고. 하지만 내 나름대로 중심을 잡고 할소리는 다 했다고 생각한다.

정계에서는 얼굴 예쁘게 그려달라고 부탁이 줄을 이었다. 점을 빼달라, 대머리로 그리지 말라는 주문이 많이 들어왔지만 만화라는 건 캐릭터를 과장되게 그리는 것은 당연하지 않는가.

-정치를 다루는데 민감한 사안이 많았을 텐데….

▲나름대로 공평하게 대처했다고 생각하지만 독자들은 한 쪽 편만 들어준다고 생각한다. 1989년 노태우 대통령을 물태우 대통령이라고 한 것은 내가 처음 한 것이다. 민주화되는 과정이긴 하지만 대통령을 그렇게 표현한 것은 과감한 시도였다. 1987년 대통령선거 때는 정치만화를 그려 크게 히트를 쳤다. 그러던 중 한국일보에 있을 때 김영삼 정부가 출범하면서 시사만화에 대통령 얼굴을 다루지 말라고 해 과감하게 사표를 던졌다.

노무현 대통령이 상고 나온 것과 관련해 만화를 그린 적 있었는데 어느 독자에게 고졸출신을 비하했다고 거센 항의전화를 받았다. 나는 독자에게 “나도 고등학교만 나온 사람이다”며 “설마 고졸출신을 비하해 내 자신을 깎았겠느냐”고 설득했다. 항의전화는 너무 많이 받아서 이제 내가 큰소리 칠 때도 많다. 집권층은 항상 시사만화의 주제가 된다. 노무현 정부 때 재미있는 일들이 많아서 명삽화가 많이 나왔을 것이다.

-원래 정치 만평을 하는 만화가가 꿈이 었나.

▲정치하는 것이 원래 꿈이었다. 어릴 적 아버지 친구들인 정치인들의 모습을 보면서 동경했다. 아버지가 국회의원을 한번 지내셨고 그 후 계속 낙선하면서 집안이 파산했다. 정치인이 되고 싶었던 마음에 그들이 입으로 정치를 할 때 나는 손으로 정치를 하게 된 것 같다. (웃음)

가정 형편이 어려워 대학 진학 못하다가 그림 그리는 재주를 갖고 있어 만화를 그리게 됐다. 1968년 한국 최초로 대통령 초상 카드섹션을 시작한 것이 바로 나다. 19살 때 일주일 동안 연구해서 카드섹션에 박정희 대통령 얼굴을 그렸다. 생활이 어려워 5년간 택시 운전을 하게 되면서 세상에 대해 너무나 많은 것을 공부했다. 비정하기만 한 세상, 약자들의 소외감…. 택시운전을 하면서 세상을 보는 눈을 달리하게 됐다. 그 시절 경험이 지금의 가장 큰 자산이다.

-1980, 90년대 ‘심난파’라는 필명으로 만평과 4단 만화를 그리면서 큰 인기를 끌었는데.

▲만화를 그리면서 내가 이 세계에서 뭔가 색다른 것을 해야 살아날 수 있다고 느꼈다. 1984년부터 89년까지 주간한국에 장편시사만화격인 ‘가라시대’를 연재하면서 목숨 걸고 배짱 있게 그렸다. 툭하면 신문기자를 연행하던 5공화국 시절에 용감하게 만화를 그렸다고 생각한다. 그 때는 대한민국 최고의 만화라는 소리를 많이 들었다. 지방에 놀러가서 ’가라시대를 그리는 심난파’라고 하면 여기저기 술도 사주고 했고.(웃음) 당국이 트집잡지 못하게 학생들이 시위하는 것을 직접적으로 표현하지 않고 두리둥실 돌아가면서 기술적으로 묘사를 잘 한 것 같다. 그때 썼던 시사풍자만화를 모아 칼럼집을 펴낸 것을 전위예술가 무세중씨가 연출해 연극을 만들었고, 또 이문세씨가 ‘광화문 연가’라는 노래를 만들어 부르기도 했다.

-예전에 비해 신문만화의 힘이 점차 약해지고 있다.

▲신문만화가 없어지는 이유 중 하나가 변화하는 비판 일변도에 있다고 생각한다. 좀 더 절제된 비판이 필요하고 인신공격성 비판은 지양해야 한다. 하지만 요새 젊은 작가들은 무절제한 비판을 해 만화의 품격을 지키지 못하고 있다. 신문만화가 사라지고 있는 이유 중 하나인 것 같다.

-30년 넘게 그려 온 삽화의 철학, 가치관은 무엇인가?

▲예순이 되면서 4000회를 맞게 됐지만 앞으로 70살까지 그리고 싶다. 그 정도 되면 만화를 혜안(慧眼)을 갖고 그리게 되지 않을까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저널리스트냐 그림쟁이냐라고 많이 묻는다. 나는 방법만 다른 저널리스트라고 말하고 싶다. 사회총체적인 현상에 정답이 있을까? 지금까지 정답이 뭔지 모른다. 보수의 말을 듣다 보면 보수가 정답인 것 같고 진보의 말을 듣다 보면 또 맞는 말이고…. 모두 정답일 수도, 아닐 수도 있다.

나의 삽화 철학은 과잉 비판보다는 절제된 비판을, 온유한 은유법과 풍자법을 들면서 만화를 그려야 한 다는 것이다. 개인적인 고집을 부리며 한쪽 편에 서서 무조건적인 비판은 지양해야 할 부분이다. 세태를 날카롭게 꼬집는 것은 당연하지만 어떻게 표현하느냐의 차이다. 칼로 무자비하게 쑤시는 것이 아니라 빙 둘러 은근히 꼬집는 것이 아름다우면서도 더 진실을 담고 있다.

-만평과 만화를 보는 독자들에게 개인적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일종의 핑계도 될 수 있는데 만화는 네 칸으로 작가의 모든 생각을 담을 수 없다. 그저 ‘만화는 어디까지 만화다’라고 생각하면서 즐겁게 봐달라. 시사만화는 정말 어려운 일이다. 4칸을 그리는 것을 우습게 보지만 최소 10년이상은 수련을 해야 한다. 헝그리 정신, 장인정신이 없으면 하기 힘든 직업이다. 또 특수 직종으로 풍부한 지식을 갖는 것과 별개의 영역으로 그 것을 뛰어 넘어야 한다. 평생 만화를 그려왔지만 지금도 4칸을 채우려면 정말 힘이 든다. 항상 혼자서 스스로 판단하고 대응한다는 것, 고독한 직업이다. 항상 여기에 얽매여 있어야 하기 때문에 어딜 가도 일의 연장선상이다. 지금 시골에 살면서 TV나 라디오를 끊고 싶지만 직업 때문에 그럴 수도 없다. 농사를 지으면서 만화생각을 하고 끊임없이 고민을 거듭한다. <정리 김효숙·사진 장길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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