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유민들 가슴아픈 사연 들리는듯

논산은 백제와 신라의 치열한 접전이 펼쳐졌던 황산벌 전투로 유명하다.

황산벌 전투에서 신라에게 마지막까지 저항했던 백제의 마지막 장수, 계백장군의 묘가 있고, 그로부터 270년 뒤 후백제의 부활을 꿈꿨으나 끝내 이루지 못하고 고려로 투신한 견훤의 묘도 자리잡고 있는 등 백제 유민들의 가슴 아픈 사연이 녹아있는 곳이다.

여기에 고려의 왕건이 세운 원찰인 개태사 등 손에 꼽힐 만한 천년 고찰은 논산의 자랑거리다.

양촌면 중산리 작봉산 아래에 소담히 자리잡고 있는 쌍계사는 고즈넉한 절로 유명하지만 절 내에 위치한 보물 제 408호로 지정된 대웅전은 위용이 넘친다.

정면 5칸, 측면 3칸의 대웅전은 조선 후기의 건물답게 다포계의 공포가 화려하다. 정면 문에 달린 꽃창살은 독특한 매력을 풍긴다. 다섯 칸에 모두 열 짝이 달린 문에는 모란, 연꽃, 국화 무늬들이 섬세하게 조각, 채색돼 있어 건물이 한층 더 화려해 보인다.

논산읍 관촉리에 자리잡은 관촉사는 ‘은진미륵’이라는 유명한 부처가 있다. 연꽃가지를 들고 있고 머리 위에는 화불의 흔적이 있는 것으로 해 교리상으로는 관음보살이나 미륵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이 미륵은 왕권과 밀접란 관련을 갖고 있는 관제미륵 중 하나이기도 하다. 부처 왼쪽의 사적비에는 고려 4대 왕인 광종 19년 왕명을 받은 혜명대사가 조성하기 시작, 37년만인 7대 임금 목종 9년에 완성했다고 쓰여 있다. 그 당시 머리의 화불(化佛)이 내는 황금빛이 너무도 밝아 송나라 지안대사가 빛을 따라 찾아와 예배하면서 절 이름을 관촉사라 지었다고 전해진다. 보물 제 218호로 지정된 부처는 위엄이 서린 동시에 너그러운 미소도 머금고 있어 보는 이로 하여금 저절로 고개가 숙여지게 만든다.

그 모양새가 힘이 좋아보이는 석등은 미륵보상 앞쪽에 위치해 있다. 보물 제 232호로 지정된 석등은 우리나라에서 화엄사 각황전 앞 석등 다음으로 크다고 한다.

논산에서 공주쪽으로 23번 국도를 타고 가다 보면 조선 숙종 때 학자인 윤증의 고택이 눈에 들어온다. 조선시대 향촌 사대부가의 위엄이 서려있는 고택은 중요 민속자료 제 190호로 지정돼 있다.

논산군 연산면 천호리에 있는 개태사는 여느 절과 달리 비교적 평탄한 평지에 자리잡고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이 후백제의 신검의 항복을 받아내 후삼국을 통일한 역사적인 일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절이기도 하다.

창건 당시 거찰이었으나 조선 세조 이후에는 완전히 폐허가 됐다. 절 문으로 들어서면 대웅전이 보이는데 여기에 건장한 느낌이 드는 석조삼존불 입상이 모셔져 있다. 페사가 되어 있는 동안 허리가 부러진 채 넘어지고 목이 떨어진 채 엎어져 있었다고 한다. 보물 제219호로 지정된 석조삼존불입상은 개태사 창건 당시인 936년에 조성된 것으로 왠지 갑옷과 투구를 갖춰 입은 무사와 같다는 느낌을 받게 한다. 그렇게 만든 까닭은 왕건이 고려가 창건하면서 권위와 힘을 과시하려는 의도였을 지도 모르겠다. <김효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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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태사
개태사
관촉사
관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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