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시아버지. 누구보다 조국을 사랑하고도 뒤늦게 조국의 인정을 받았습니다."

대전의 독립운동가 신채호 선생의 며느리 이덕남(76) 여사. 단재의 둘째 아들인 남편과 사별한 뒤 2004년 위암 말기 판정을 받아 중국으로 떠났다가 16년 만에 한국에 돌아왔다.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해 다시 한국 땅을 밟은 이 여사. 경기도 하남에 새터를 잡은 그는 27일 단재 선생의 생가가 있는 대전을 찾았다.

평생을 시아버지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온 몸과 마음을 바친 이 여사는 재판으로 고통받는 데 이골이 났다. 수십 년을 뛰어다니며 정부에 수차례 탄원을 한 끝에 2009년에야 비로소 무호적 상태로 숨진 단재의 대한민국 국적을 회복시켰다.

그는 "당시 단재를 비롯한 독립운동가들은 일제가 도입한 호적에 이름을 올리기를 거부했는데, 광복 후에 원적이 없으니 호적이 없는 무적자 신세로 남았다. 시아버지는 목숨을 바쳐 독립운동을 하고도 무국적자로 조국에서 홀대 당해왔다"며 "몇몇 공무원들은 `신채호 선생 국적 없다고 가족이 불편한 게 뭡니까`하고 따지기도 하더라"고 말했다.

이 여사는 지난 4월 한국에 돌아오자마자 1910년 단재 선생이 망명하기 직전까지 국내에서 마지막으로 살았던 서울 삼청동 집터를 되찾기 위해 또 다시 동분서주 하고 있다.

또"친일파와 매국노는 땅을 다 찾아주는데 우리나라가 나쁘다"며 "삼청동 공무원들과 하도 싸우니 이상한 사람으로 유명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시아버지가 서거한 이듬해 일본인이 소유했다가 몇 차례 주인이 바뀌고, 현재는 종교재단이 주차장으로 쓰고 있다"며 "땅 문서를 잃어버렸다고 집 주소를 실은 광고를 1910년 대한매일 신보 광고 등 증거도 있다"고 덧붙였다.

이 여사는 이날 허태정 대전시장과 박용갑 중구청장을 만나 짧은 면담을 나눴다. 허 시장은 몸소 대전을 찾은 이 여사에 "신채호 선생을 대전의 상징적인 얼굴로 만들어보겠다"고 말했다. 또 극단 새벽이 신채호와 의열단의 생애를 그린 연극 `곡하고 노래하리라`를 관람했다.

단재 신채호 선생은 1880년 충청도 회덕현, 지금의 대전 어남동에서 태어나 유년시절을 보낸 독립운동가로, 대전과 인연이 깊다. 일제강점기 중국 베이징에서 민족항쟁의 중심에서 활동한 이회영, 김창숙 선생과 함께 `베이징 3걸`로 불렸다. 1936년 중국 뤼순 감옥에서 순국한 이후 무국적자로 남아 있다 73년만인 2009년 대한민국 국적을 회복했다. 이때 단재와 함께 독립운동가 62명이 국적을 되찾았다.조수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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