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 4월 27일자 2면 대전일보  [사진=대전일보DB]
1960년 4월 27일자 2면 대전일보 [사진=대전일보DB]
올해는 4·19 혁명이 일어난 지 59년이 되는 해다.

4월 혁명은 자유당 독재정권을 국민의 항거로 무너뜨리고 자유와 민주를 되찾은 역사적인 사건이다. 그 투쟁의 시발점은 대전에서 일어난 3·8민주의거 등 당시 대전고등학교 학생들의 의거가 도화선이 됐다. 당시 대통령 선거를 앞둔 자유당은 각종 선거비리를 저지르고, 수업을 중단하고 교내 방송을 통해 이승만 대통령의 미화된 사상과 어록, 담화문을 듣게 하는 등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다. 1000여명의 대전고 학생들은 자유당 독재타도를 외치며 거리로 뛰쳐나왔고, 경찰들은 그들을 무참히 짓밟았다. 고등학생 신분으로 독재정권에 항거한 이 시위는 4·19 시민혁명의 단초가 됐다.

대전일보는 민주화와 한국 정치발전에 획기적인 전기를 제공한 4월 혁명, 그 역사의 중심에서 함께 했다.

1960년 3-5월 대전일보 지면에는 4·19혁명 당시 생생한 모습이 파노라마처럼 남아있다. 3·15 부정선거와 충청권 대전고와 대전상고, 청주상고 집회 등 민주화 열망이 가득한 현장에서 당시 시위상황을 정확하고 비중있게 보도하며 언론의 역할을 다했다.

특히 3·15 부정선거 규탄시위가 계속되자 적극적으로 기사를 싣고 사설을 통해 정부의 잘못을 비판했다. 1960년 4월 1일자 `가슴을 두드리며 묻노니, 하늘이 무섭지 않느냐?`는 사설에서는 자유당 정권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준엄한 심판이 내려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19일자에는 충북 청주상고 학생 1000명의 집회 기사를, 20일에는 1면 톱에 서울대 건국대 등의 시위 보도와 `갖가지 부정 어찌 한숨만 쉴소냐!`라는 격문(檄文)을 실으며 급변하는 정국과 시위상황을 충실하게 전달했다.

하지만 21일자 1면은 누더기처럼 인쇄됐다. 톱 기사의 제목과 글씨는 단 한자도 알아 볼 수 없고, 왼쪽 상단 사진은 어떤 내용이 담겼는지 가늠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지워졌다. 계엄령이 내려지고, 경찰과 군이 취재와 편집에 온갖 압력을 가하며 기사를 삭제한 탓이다.

4·19가 지나고 25일 대학교수들의 잇따른 시국선언과 시위가 이어지자 26일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 성명을 함으로써 마침내 학생들의 혁명의거는 성공을 거뒀다. 대전일보는 이러한 흐름에 적극 부응했다. 25일자 1면에 부정선거 원흉 몰아내자는 야당 의원 발언을 싣고, 2면에는 `청사에 남을 4·19 그날의 모습`이라는 화보를 실었다. 총격에 쓰러진 학생을 운반하는 모습 등 검열로 묶였던 사진을 뒤늦게 보도한 것이다. 27일자 1조간 1면에는 `국민이 원하면 대통령 사임, 이 대통령 시국 수습에 중대 성명`이라는 기사를 실었다. 부정 선거 규탄으로 시작된 시위가 이승만 정권을 붕괴시키고, 4·19 혁명 완성으로 마무리 된 것이다.

역사적인 4·19 의거 이후 가장 먼저 이성을 강조한 것도 대전일보였다. `냉정한 이성을 되살려 제자리로 돌아가자(28일자)`, `학생 본분으로 돌아가자` 등의 기사를 통해 `냉철한 이성으로 전도를 직시하라`고 주문한 것이다.

1960년 격동의 시기, 대전일보 지면에는 혁명의 불씨가 재가 되지 않고 들불처럼 번져 나갔던 우리 현대사의 상처와 영광의 과정이 진하게 배어있다.

원세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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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 4월 27일자 1면 대전일보  [사진=대전일보DB]
1960년 4월 27일자 1면 대전일보 [사진=대전일보DB]
민권을 부르짖으며 충남도청 쪽으로 행진하는 학생 데모행진 광경  [사진=대전일보DB]
민권을 부르짖으며 충남도청 쪽으로 행진하는 학생 데모행진 광경 [사진=대전일보DB]

원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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