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7월 동의보감이 유네스코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의학 서적이 우리보다 몇 배 많은 중국도 이에 자극을 받아서 몇 년 후에 자국 의서를 유네스코 세계기록 문화유산에 등재시켰다. 동의보감은 임진왜란(1592-1598) 2년 후인 1594년에 시작됐다. 조선 역대 왕 중 선조는 부정적인 이미지가 강하지만 전쟁 중에 백성을 위해 의학 서적을 만들라고 명령 한 것은 훌륭한 업적이다. 동서고금의 역사를 보면 전쟁 중에는 여러 분야에서 발전이 평상시의 몇 배가 된다. 지금의 과학도 1-2차 세계대전 때문에 이루어 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조선시대만 해도 왕의 명령으로 인한 국가사업이 아닌 이상 이같이 대규모의 책이 나온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동의보감은 한자로 된 영인본 기준으로 총 25권, 3200여쪽, 160만여 자다. 한글로 풀어 쓰면 더욱 분량이 늘어난다. 지금이야 책 한권으로 별거 아니지만 목판으로 발행 당시에는 엄청난 작업이었다. 학교 도서관에서 동의보감을 읽고 있으면 탁본을 일고 해석해달라는 다른 과 학생들이 있는데 의학용 한문과 다른 분야의 한문의 차이가 난다. 양방도 마찬가지로 영어로 된 의서를 술술 읽는다고 영어에 능통한 것은 아니다. 동의보감의 가치는 양생과 예방의학이다. 지금은 당연한 개념이지만 그때 당시에는 전혀 다른 패러다임이었다.

조선시대의 사상은 유불선인데 당연히 건국이념인 유교가 주류를 이루지만 불교도 들어가 있고 처음에 시작할 때 도교에 능통한 2명의 어의가 참여했다. 도교는 병이 나기 전에 병을 예방하는 양생법이 발달했다. 물론 수은을 많이 사용하는 부작용도 많았다. 동의보감은 의학백과 사전이다. 그때까지 역대 의서를 모아서 편집을 다시 한 일종의 백과사전이다. 허준은 의술이 뛰어난 어의이므로 모든 의서와 전국의 민간요법을 모두 모아서 백과사진을 모은 것이 사실이다.

그러므로 동의보감에 나온 모든 내용이 사실은 아니다. 투명인간이 되는 방법이나 정액을 아침 이슬에 섞으면 피가 된다는 지금 보면 황당한 이야기도 많다. 서양에서도 정신병에 두개골에 구멍을 뚫어서 치료하고 불치병은 마녀의 저주를 받은 거라고 하는 것을 보면 그 당시의 수준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다. 동의보감으로 조선시대 사회상을 연구 하는 학자도(의사 아님) 있다. 곤장을 맞고 먹는 한약과 약초가 있으며 역적으로 몰려서 하루아침에 고관대직에서 종으로 내려가는 환자에게 먹이는 한약도 있다.

교도소에 가두는 곳이 아니라 신체형으로 형별을 가했으며 여러 사화가 많이 일어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전쟁으로 피해가 많은 백성들을 위하여 약제 명을 한문명 아래에 한글로 적어 놓은 것도 특징이다. 예를 들면 길경(도라지) 애엽(쑥) 갈근(칡) 등등이다. 동의보감은 중국과 일본에 수출 되었으며 사신들이 중국에 가면 중국 관리들이 구해달라고 부탁하는 유일한 책이었다고 한다. 실학자들이 중국에 가서 책방에 가면 한국의 서적은 유일하게 동의보감뿐이었다는 기록도 있다. 역사에 가정은 없지만 선조가 죽고 관례상 수석어의인 허준이 귀항을 가는데 유배지에서 완성한다.

광해군 초기에 책을 발행하는데 만약 선조가 늦게 죽거나 인조반정이 일찍 일어났으면 동의보감의 발행은 어떻게 되었을까. 이후에 조선은 명을 숭배하고 청을 배척하는데 동의보감 이후에 청대 이후의 중국한의학이 안 들어 온 이유다. 중국 명청대의 유명한 의사는 임진왜란때 압록강에 군인으로 참가했다가 중국으로 돌아가서 책을 출판했다. 의학은 그 시대상을 반영 할 수밖에 없으므로 현대 한의학에서는 이 시대에 맞게 한의학을 지금의 모든 과학 도구들을 이용하여 발전 시켜야 할 것이다. 4차 산업이 현대 한의학을 발전시켜 환자 즉 국민을 위할 것임을 확신한다. 구원회 구원회한의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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