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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신춘문예] '종점 만화방' 단편소설 당선작 및 당선소감

2019-01-01기사 편집 2019-01-01 15:3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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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희 作

첨부사진1김은희

벽돌이 보이지 않는다. 쓰레기봉투 뒤에도, 말라죽은 화초가 막대처럼 꽂혀 있는 화분 뒤에도 벽돌은 없다. 입구 옆에 놓아두었던 벽돌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벽돌 없으면 입간판은 제구실을 하지 못한다. 또박또박 정성 들여 쓴 글자의 'ㅁ'자 모서리 부분의 페인트가 벗겨져 'ㅇ'자처럼 보이는 입간판은 벽돌을 괴어놓지 않으면 옆으로 고꾸라지고 만다. 나무판에는 '만화' 라고만 검은 페인트로 자그맣게 써져 있을 뿐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곳을 '종점'이라 부른다. 이노인의 말에 의하면 '종점'이라는 이름은 만화방으로 업종을 변경하기기 전의 이름이라고 한다. 처음에는 색시집, 다음엔 여관, 대포집. 하지만 여러 업종으로 바뀌면서도 한결같이 종점이란 이름으로 이어져왔기 때문에 사람들은 '만화' 라고 써 놓아도 알아서 '종점'이라고 부르는 것이라 했다.

최노인이 매일 정성스럽게 마른 걸레로 먼지를 닦던 입간판의 지지대가 부서지던 날, 최노인은 머리가 깨졌다. 술 처먹었으면 집에 가 자빠져 잘 일이지, 가만있는 남의 간판은 왜 걷어차고 지랄이야. 비틀거리던 젊은 남자의 발이 말린 틈도 없이 입간판에 내리꽂혔다. 순간 최노인 눈에서 불이 번쩍였다. 최노인은 남자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남자의 멱살을 잡았다고는 하지만 최노인이 남자에게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형국이었다. 남자는 얼굴을 들이밀고 욕을 퍼붓는 최노인을 콘크리트 바닥에 메다꽂았다. 최노인의 머리가 수박처럼 깨졌다. 수박처럼 깨어진 머리에서 붉은 피가 흘러나오던 것을 생각하면 소름이 끼쳤다.

나는 몸서리치며 별채처럼 대문 옆 마당에 떨어져 있는 창고를 힐끗 쳐다본다. 입간판을 고쳐볼 요량으로 공구를 찾아보았지만 찾을 수 없었다. 찾아보지 않은 곳이라고는 창고밖에 없었는데 그곳은 자물쇠로 굳게 닫혀 있었다. 사용을 하지 않은지 오래된 듯한 창고의 자물쇠통은 붉은 녹이 내려앉아 있었으며 열쇠는 어디에도 없었다. 녹슨 삽이나 형편없이 망가진 자전거 따위밖에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널빤지를 덧댄 창문을 보고 있으면 창고 안이 궁금해지곤 했다. 창문에 눈을 바짝 가져다대고 창고 안을 들여다볼라치면 여지없이 까랑까랑한 목소리가 날아와 뒤통수를 때렸다. 저기 안에 있는 물건들은 주인이 다 따로 있어. 주인이 오면 밀린 외상값 받고 돌려 줄 거야. 그러니 건드릴 생각하지 마. 최노인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울리는 것 같아 고개를 돌린다. 골목모퉁이에서 누군가 기웃거리는 것이 보인다. 나그네 여관 이노인이다. 두부가 반모 담겨 있는 양은그릇을 내 앞에 내민다.

"그래, 만화방은 어떻데, 퇴원은 영영 못한데? 그렇겠지, 머리통이 그리 쉬 붙을 리 있어, 날도 덥고, 늙은 놈의 살가죽이 그리 쉽게 붙을 리가 없지, 암 그렇고말고, 그 까짓 것 좀 부서지면 어떻다고 제정신도 아닌 놈의 멱살을 잡아, 죽으려고 환장을 한 거지, 암 죽으려고 환장하고말고."

나그네 여관 이노인은 자신이 한 말에 연신 고개를 끄떡인다. 그리고는 자신의 콧잔등에 걸려 있는 안경이 투시경이라도 되는 것처럼 나의 몸을 아래서부터 천천히 훑는다. 입간판을 담에 기대놓고 양은그릇을 받아 얼른 뒤돌아선다. 이노인의 시선이 나의 엉덩이를 쓰다듬는다. 그릇과 함께 부라보콘을 건네자 만화방 구석자리의 솔다방 소파에 앉아 녹아내리기 시작한 부라보콘을 천천히 혀끝으로 핥으며 신문을 펴 든다.

"날쌔고 용감한 폴이 여기 있다. 대마왕 손아귀에 니나를 구해내자."

언제나 그렇듯 힘차게 노래를 부르며 들어오는 사람은 비디오가게 폴이다. 만화책을 만지작거리는 녀석을 향해 소리친다.

"폴 만화방 청소부터 해."

녀석이 힐끗 나를 쳐다보더니 입을 삐쭉이 내밀며 빗자루를 집어 든다. 열다섯 살인 폴의 정신연령은 일곱 살에서 고장 난 시계처럼 멈춰 있다. 녀석의 정신이 왜 일곱 살에서 멈춰 버린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일곱 살 이후 녀석의 정신연령이 조금도 성장하지 않았으며 초등학교를 입학하고서야 그 사실을 주위 사람들이 알았다는 것이다. 폴은 비디오가게를 운영하는 여덟 살 위인 누나와 칠순이 넘은 할머니와 함께 살고 있다. 폴의 어머니는 녀석을 낳다 죽었고 아버진 무슨 병인지 모르지만 합병증으로 오년 전에 죽었다. 폴의 말에 의하면 성기에 난 종기를 짜낸 것이 화근이 되었다고 한다. 한쪽 눈을 실명하더니 종국엔 발가벗고 온 동네를 뛰어다니다 얼어 죽었다. 녀석은 아버지의 죽음에 대해 말하면서도 연신 싱글거렸다. 아빠 자지가 얼마나 컸는지 알아, 히히. 그때 나는 부라보콘 뾰족한 부분을 빨아먹고 있는 녀석을 보며 잘만하면 힘들이지 않고 녀석을 나의 손발처럼 써먹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 했다.

날개를 단 듯 소리도 없이 쏘다니는 녀석의 발을 묶어 놓을 수 있는 곳은 이곳 밖에 없다. 녀석은 '이상한 나라의 폴'이란 만화책만 잡으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상기된 얼굴로 만화책을 보는 녀석의 얼굴은 사뭇 진지하기까지 하다. 그때, 녀석의 집중력은 대단하다. 그때만큼은 열다섯 살 소년 같다. 자신을 부르는 소리도 듣지 못할 만큼 녀석은 만화책에 빠져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럴 때면 하는 수 없이 녀석에게 다가가 급습하듯 만화책을 빼앗아 드는 수밖에 없다. 녀석은 잠시 버둥거리지만 이내 포기해 버리고 만다. 심하게 반항 한다면 며칠간 만화책 근처에는 얼씬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정신연령이 일곱 살에 멈춘 녀석도 알고 있는 것이다. 매섭게 노려보는 내 앞에서 녀석은 다시 일곱 살의 소심한 아이가 되어 버린다. 폴이란 이름도 진짜 이름이 아니다. 팔십 년대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일본만화 '이상한 나라의 폴'을 좋아하여 붙여진 것으로 사람들은 녀석을 이름대신 폴이라 불렸다.

녀석이 바닥의 먼지를 쓸어내는 것을 보며 수도꼭지에 고무호수를 낀다. 엄지로 고무호수 끝을 살짝 막자 물줄기가 방사형으로 뿜어져 나온다. 땅바닥으로 곤두박질친 물줄기는 파편처럼 검은 점을 남긴다. 넝쿨장미에 물을 준다. 잠시 붉은 입술을 베어 문 듯 한 장미가 담을 타고 오르는 상상을 해본다. 그러자 미세한 떨림이 온몸을 훑고 지나간다. 평화롭다. 그것도 잠시, 누군가 틈이 벌어진 나무문을 요란스럽게 밀고 들어선다. 미간을 좁히며 대문 쪽을 쳐다본다. 공사장 김씨다. 오늘도 허탕을 친 모양이다. 벌써 일주일째 그는 일없이 놀고 있다. 아마도 다리를 저는 것과 관련 있을 것이다. 보름전인가 하늘에 구멍이 뚫린 것처럼 비가 쏟아지던 날, 공사장 김씨는 다리를 절뚝거리며 들어섰다. 왼쪽 다리에 커다랗게 반창고를 붙인 공사장 김씨는 반창고 밑으로 새어나오는 피고름을 휴지로 쓱쓱 닦으며 소파에 반쯤 누워 무협지를 읽었다.

공사장 김씨는 고무호수를 잡고 있는 나를 힐끗 쳐다보더니 누런 이를 드러낸 채 빙긋 웃으며 만화방으로 향한다. 흰 러닝셔츠에 초록색 추리닝을 무릎까지 말아 올린 그의 뒷모습에서 담배 냄새가 섞인 땀 저린 내가 날아온다. 순간 뱃속이 매슥거린다. 나는 침을 몇 번 수챗구멍에 뱉고 수돗물로 입안을 헹군다.

"판타지 소설 신간은 영영 안 갖다 놓을 생각인가?"

나는 대구도 없이 대야에 물을 받아들고 밖으로 나간다. 공사장 김씨는 분명 책꽂이 앞에 서서 낡은 무협지를 뒤적거리고 있을 것이다. 그는 자신이 보는 무협지를 판타지 소설이라 부른다. 하지만 분명히 말해둘 것은 그가 읽는 것은 판타지 소설이 아니라 삼류 저질 무협지라는 것이다. 그는 이 모든 무협지를 섭렵했다. 그는 책꽂이에 꽂힌 무협지를 뒤적거리다가 별 수 없이 책꽂이에 꽂힌 것 중 맨 앞에 것을 뽑아들 것이다. 히죽거리며 책장을 넘기는 그의 모습이 떠오른다. 대야에 물을 골목에 뿌리려다 멈춘다. 입간판이 대문 앞에 반듯하게 놓여 있다. 벽돌이 괴어진 채.



"물론 여자이건 남자이건 상관은 없지. 그런데 아가씨는 너무 젊지 않나?"

다섯 번째 전화를 거는 것이지만 노인은 똑같은 말을 반복했다. 한사코 젊은 사람은 쓸 생각이 없다며 다른 곳을 알아보라는 노인은 대화 첫머리에 자지러지는 기침을 한바탕 뱉어놓았다. 병색이 짙게 느껴졌다. 전화선을 타고 넘어오는 밭은기침 소리는 창자가 딸려 넘어올 것처럼 격렬하고 악착스러웠다. 짐작컨대 노인의 삶이 그렇지 않았을까 싶었다. 밭은기침처럼 악착같고 고단한 세월이 증식보다는 이젠 빠른 속도로 소멸하는 세포에까지 아로새겨져 있을 것이다.

"젊은 것이 싫다는 게 이해 가지 않는군요? 절 채용하지 않는다면 전 서울역에서 구걸을 하다 얼어 죽는 수밖에 없어요. 그곳이 저에게는 마지막 희망입니다.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답니다."

서울의 후미진 동네 만화방의 일자리를 구하면서 채용이라는 단어를 쓰는 것이 우습기는 했지만 나의 절박한 심정을 전하기에는 충분하였으리라 생각되었다. 다시 집으로 돌아갈 수는 없는 일이며 돌아간다 해도 쉽사리 대문은 열리지 않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에 나는 거의 필사적으로 매달렸다. 또 숨어 지내기 딱 좋은 곳이라 생각되었다.

카드회사의 닦달이 시작된 것은 카드대금이 연체된 지 일주일이 지나고서부터였다. 그 무렵 내가 다니던 출판사가 문을 닫았고 나는 졸지에 백수가 되어 버렸다. 사장은 마지막 회식 자리에서 '문학이여! 영원 하라', 라고 외치며 잔을 높이 들고 눈물을 흘렸다. 그는 연거푸 소주를 세잔 들이키더니 그 빌어먹을 인터넷 서점과 대형 서점 때문에 출판업계의 절반은 문을 닫을 것이라며 한탄했다. 하지만 나는 당장 카드대금을 막을 수 없다는 것에 절망했다. 보테가 베네타 클리어런스 숄더백을 구입할 수 없다는 것이 나를 슬프게 했다. 월급과 퇴직금 대신 한 시대를 풍미했던 작가들의 전집 묶음을 받았고, 엄청난 무게의 그것들은 나에게는 처치 곤란한 골칫덩어리였다. 나는 별 고심 없이 책을 선심 쓰듯 친구들에게 나눠주었다. 일자리를 다시 알아보려 했지만 그것마저도 여의치 않았다. 카드회사 직원은 밤낮으로 전화를 해댔다. 언제까지 대금을 통장에 넣을 수 있냐고 묻는 직원의 목소리는 고압적이었다. 나는 짜증 섞인 목소리의 직원 목소리에 손만 만지작거리며 어물거렸다. 그렇게 네 달이 지나고 나니 카드회사 직원의 닦달이 좀 귀찮고 짜증이 날 뿐 전화벨 소리에 그다지 가슴이 뛰지 않았다. 어느 순간부턴가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능력 밖의 문제라고 생각되기 시작됐고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차라리 마음이 편해졌다. 더 이상 초조하거나 무섭지 않았다. 도리어 큰 소리를 치게 되었다. 처음부터 나 같은 사람한테 카드를 쥐어준 당신들의 잘못이지, 마음대로 해, 나는 갚을 능력 없으니. 이렇게 나오자 카드회사에서 도리어 저자세를 취하고 나왔다. 이자를 깎아 줄 테니 쪼개서 갚도록 하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고압적이던 카드회사가 돌연 저자세를 취하고 나오자 깎인 금액을 내는 것마저도 아깝게 느껴졌다. 그래서 카드회사에서 오는 전화는 발신번호를 확인하고 받지 않았다. 그런데 문제는 다른 곳에서 터져 버렸다. 저희 회사는 절대 고객님의 카드 사용에 관한 문제를 타인에게 발설하지 않습니다, 사실 비밀을 보장하는 차원에서 이것은 고객님에게만 알려야 하는 것이지만 고객님의 장래를 위해 어머님도 알아야하지 않을까 싶어서요. 카드회사 직원이 카드대금에 관한 것을 어머니께 말해버린 것이다. 추리닝 바람에 만화책을 한 아름 안고 거실로 들어서는 내게 어머니는 카드 이용대금 명세서를 집어 던졌다. 그 갓 돈 이천을 못 갚아준단 말이야. 사람이 한번 내리막길에서 뛰기 시작하면 쉽사리 멈출 수가 없듯이 이미 내달리기 시작한 나의 입은 브레이크가 걸리지 않았다. 그 갓 돈 이천? 돈 이천이 어느 집 애 이름이야, 이천 원도 아니고 이천만 원을. 이천 원이면 해달라고도 안 해, 시집보낸다고 생각하면 될 것 아니야. 돌았구나, 아주 돌았어, 빌어도 시원치 않을 판에 뭐? 어머니가 나의 뺨을 후려쳤다. 그리고는 막을 새도 없이 등이고, 머리고, 어깨고 마구 손이 날아들었다. 구석까지 몰린 나는 동그랗게 몸을 말고 악을 썼다. 절대로 엄마한테 눈곱만큼도 보태 달라고 하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마. 내가 몸을 팔아서라도 빚 갚을 테니 걱정하지 말란 말이야. 어머니의 손찌검이 일순 멈췄다. 나는 팔 사이에서 고개를 살짝 빼들었다. 어머닌 입술을 말아 물고 미간을 좁힌 채 거실에 주저앉아 있었다. 나는 그 길로 짐을 싸서 집을 나왔다.

"그렇다면 한 번 와 봐."

그곳으로 가는 길은 험난했다. 구찌 숄더백이 긁히지 않도록 조심해야 했으며 에트로 델리 숄이 올이 나가지 않도록 신경 써야 했다. 몇 권 들고 나오지 않은 책은 돌덩이처럼 무거워 나는 잠시 책을 버리고 갈까 생각 해 보았다.

도착하였을 때 허리가 반쯤 꺾인 노인이 대문 앞에 서 있었다. 얼굴과 손등에 검버섯이 꽃처럼 핀 노인은 아래, 위로 찬찬히 훑더니 빗자루를 손에 쥐어줬다. 나는 그 날부터 만화방에서 살고 있다. 냉장고에 아이스크림과 드링크제를 채우고 햇볕이 마른 마당을 더듬거리는 오후에는 고무호수로 물을 뿌려 달아오른 땅을 식힌다. 매일 청소를 하고 문을 활짝 열어놓아도 먼지와 냄새는 사라지지 않는다. 후텁지근한 공기가 나른한 눈꺼풀에 내려앉는다. 고개를 흔들며 미닫이문에 몸을 기댄다. 대문 밖으로 나가 볼까하다 그만둔다. 폴이 돌아오지 않는다. 벌써 한 시간 전에 만화책을 손수레에 싣고 돌아왔어야 하는 녀석이 돌아오지 않고 있다. 오십육 번지에서 싸움이 벌어졌는지도 모른다. 만약 싸움이 벌어졌다면 녀석은 그것을 구경하고 있을 것이다. 머리끄덩이를 잡고 뒹구는 그녀들을 보며 손뼉을 치며 즐거워하고 있다면 싸움이 끝나기 전까지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만화책은 반도 수거하지 못하고 돌아오겠지. 오십육 번지에서 살고 있는 아가씨들과 배달업에 종사하는 다방의 아가씨들은 전화로 주문을 받고 배달과 동시에 수거를 해 와야 한다. 그 귀찮은 일을 나를 대신해서 녀석이 하고 있다. 나는 작은 손수레를 끌고 오십육 번지나 다방을 기웃거리는 일은 힘들 뿐만 아니라 체질에 맞지 않는 일로 하고 싶지 않았다. 그 일로 고민하고 있을 때 폴이 눈에 띄었고 녀석에게 점심과 만화책을 제공하는 것으로 귀찮은 문제를 간단히 해결했다. 녀석에게 선심을 쓰듯 제공하는 점심은 컵라면과 김치가 다였으며 만화책이라 해봤자 녀석은 아무도 찾지 않는 '이상한 나라의 폴' 밖에 읽지 않으니 손해 볼 것은 없었다.

"지중해의 영감. 지중해의 영감은 뭐가 좀 다른가. 영감들은 다 똑같지 뭘 그래. 남에 나라 영감이라고 뭐 다르겠어."

공사장 김씨가 책상 위에 놓인 책을 만지작거리고 있다. 나는 얼른 공사장 김씨의 손을 쳐낸다. 그가 웃음을 흘리며 박카스 병을 흔들어 보인다. 나는 목 밑까지 올라온 욕을 되삼킨다. 공사장 김씨가 장미다방이라고 인쇄된 소파에 앉으며 기어코 한마디를 더 내뱉는다.

"그 뭐야. 낑깡의 욕망은 다 읽었나 보네. 그래 거기엔 뭐라고 쓰여 있어? 훔친 낑깡이 더 맛나다, 뭐 그렇게 쓰여 있나? 사람들이란 다 그런 거지 뭐. 다를 것이 있나."

공사장 김씨는 검지에 침을 묻혀 책장을 넘기다 힐끗 나를 쳐다본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노골적으로 누런 이를 드러내 보이며 빙그레 웃는다. 나는 고개를 돌리며 팔을 쓸어내린다. 낑깡의 욕망이라니, 에로비디오 테이프 제목도 아니고. 외설적으로 들리는 낑깡의 욕망은 자크 라캉의 욕망이론을 말하는 것이다. 내가 책을 읽으며 지루한 얼굴로 책장을 넘기는 것을, 간간이 하품을 하는 것을 그가 보았을 것이다. 그 책은 일곱 페이지밖에 읽지 않았다. 사실 하품만 나오는 지루한 책들은 딱 질색이다.

책상 위에 조잡한 꽃무늬의 포장지로 포장한 물건이 놓여 있다. 가장자리가 까맣게 일어난 스카치테이프가 군데군데 붙어 있는 포장지에는 이름이 없다. 포장을 뜯어내자 한눈에 보기에도 짝퉁임을 알 수 있는 버버리 남방이 들어있다. 시장의 허름한 가게에서 구입했을 듯 한 남방이 까슬까슬하다. 앞뒤 이음새가 맞지 않는 체크무늬는 조악하다. 나는 입고 있는 베이지색 버버리 남방을 내려다본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앞뒤 판의 체크무늬가 맞물려 있는 남방의 촉감이 부드럽다. 칼라 안쪽으로 살짝 박혀 있는 버버리 로고를 매만지며 힐끗 공사장 김씨를 쳐다본다. 그가 이를 드러내 놓은 채 웃고 있다. 나는 포장이 뜯긴 짝퉁 버버리 남방을 그의 옆자리에 던져 놓고 돌아선다. 탁자를 걷어차는 소리가 들린다. 나그네 여관 이노인이 솔다방 소파에서 일어난다. 옆구리에 신문을 끼고 무협지에 시선을 고정한 채 앉아 있는 공사장 김씨를 쏘아보며 지나친다. 그리고는 냉장고에서 식혜를 꺼내 내 앞에 밀어놓으며 낮게 속삭인다.

"김씨는 원래 생겨먹기를 그렇게 생겨먹었으니 신경 쓰지 마. 미스 김! 날도 더운데 쭉 마셔."

나그네 여관 이노인의 파르르 떨리는 손을 보며 피식 웃음이 새어나오는 것을 되삼킨다. 이노인은 나를 솔다방 미스 김쯤으로 착각하는 모양이다. 이노인은 주로 솔다방 소파에 죽치고 앉아 신문을 본다. 그렇게 한 시간쯤 앉아 있다 돌아갈 때면 으레 음료수 하나를 내 앞에 밀어놓는다.

"영감 내 것은 없나. 나도 목마른데."

김씨가 손가락 끝에 침을 바르며 이죽거린다. 이노인은 왼쪽으로 쏠리는 걸음걸이로 재빨리 문턱을 넘다 멈춰 선다. 손수레를 끌고 대문으로 들어서는 폴의 시선이 발끝에 머물러 있다. 이노인이 신문뭉치로 녀석의 머리를 살짝 친다. 순간 녀석의 눈이 사납게 치켜 올라간다. 이노인이 움찔 뒤로 물러선다. 녀석이 그런 모습을 보이는 것은 처음이다. 멈칫했던 이노인이 눈을 부라리며 다가서자 녀석은 예전의 소심한 폴로 돌아간다. 손끝을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숙인 녀석이 잔뜩 움츠러든다. 이노인이 사라졌는데도 녀석은 꼼짝하지 않는다. 나는 녀석의 팔을 잡아끈다.

"왜 이렇게 늦었어?"

대구가 없다. 녀석이 끌고 들어온 손수레에는 만화책이 두 권 밖에 담겨 있지 않다. 나는 녀석의 옆얼굴을 힐끗 쳐다본다. 녀석의 시선이 마른땅에 꼼짝없이 잡혀 있다. 녀석의 얼굴을 유심히 살핀다. 그리고 보니 녀석의 입주위에 푸르스름한 수염이 돋아 있다.



폴이 만화책을 챙긴다. 나는 종이쪽지를 들고 책제목을 더듬거리는 녀석을 보고 있다. 만화책을 챙기는 일은 내 일이다. 그런데 녀석이 만화책을 챙기는 나를 힐끗거리더니 주머니에서 꼬깃한 종이 한 장을 꺼내 더듬거리기 시작했다. 요 며칠 통 보이지 않던 녀석이 상기된 얼굴로 싱글거리며 나타났을 때 화가 나기보다는 궁금했다. 녀석을 싱글거리게 하는 것이 무엇일까. 호기심과 궁금증이 입술에서 스멀거렸다. 만화책을 찾기가 힘든 모양이다. 상기된 얼굴에 땀방울이 맺힌다. 나는 천천히 녀석에게 다가선다. 녀석은 내가 다가서는 것도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만화책을 찾는 것에 정신이 팔려 있다. 녀석이 '이상한 나라의 폴' 말고 마음을 빼앗길 만한 것이 무엇일까, 궁금해 종이를 낚아챈다. 폴이 버둥거린다. '로코코 아가씨를 지켜주세요.' 녀석이 버둥거리는 것을 멈추고 발끝만 바라보며 쭈뼛거린다. 나는 녀석의 모습을 잠시 바라보다 만화책을 찾아 손수레에 담아준다. 나는 한낮의 땡볕 속으로 사라지는 녀석의 뒤꼭지를 바라본다.

"왜 이렇게 더운 거야. 우라질 놈의 날씨."

화장실에서 나오는 공사장 김씨가 하늘을 향해 욕을 뱉어놓고 세수를 한다. 나는 아까부터 느껴온 요의를 그냥 참기로 한다. 김씨가 들어갔다 나온 화장실은 거친 숨소리와 추접한 정념이 넘실거린다. 그가 금방 나온 화장실엔 정액이 콧물처럼 벽을 타고 흘러내린다. 처음 그것을 보았을 때 누가 더럽게 가래를 벽에다 뱉어놓은 것인 줄 알았다. 가래가 아니라는 것은 며칠 후에나 알게 되었지만. 그 우윳빛 액체의 정체를 알았을 때 심한 구토를 느꼈다. 화장실에서 바게트처럼 딱딱해진 자신의 그것을 움켜쥐고 있는 김씨의 모습이 떠오르자 진저리가 처졌다.

"낑강말이야. 그러니까, 낑강만 하면 너무 작지. 그거 어디 손이고 입이고 허전해서 되겠어. 입에 물어도 입속이 비는 구석이 너무 많잖아. 안 그런가, 아가씨?"

그의 음흉한 눈빛이 내 가슴께에서 맴돈다. 나는 펼쳐놓았던 책을 소리 나게 덮고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마당으로 나간다. 마당에 난 금은 느리게 움직이는 이노인의 손등 위로 솟은 핏줄만큼이나 신경질적으로 뻗어 있다. 이노인은 벌써 한 시간째 솔다방 소파에 앉아 신문을 보고 있다. 이노인의 콧잔등에 걸린 반투명 안경은 이노인의 시선을 감쪽같이 감춘다.

"도망갔어. 미미가."

땀으로 범벅된 폴이 수레 가득 만화책을 싣고 급히 대문으로 들어선다. 두 배쯤 커진 눈을 하고 숨을 헐떡이는 녀석을 바라본다. 미미? 오십육 번지 미미.

"도망갔어. 그래서 화났어. 형들이 아주 많이."

"가시나가 간덩이가 부었네. 분명 도와준 사람이 있을 거야. 섭섭한 걸. 그래도 그 가시나가 제일 삼삼했었는데."

김씨가 아쉽다는 듯 입맛을 다시며 안으로 들어간다. 탈출이라, 내가 이곳에 온지가 벌써 반년이 되어간다. 하지만 오십육 번지의 사람들이 이곳을 떠났다는 소리를 들어본 적이 없다. 나는 이곳의 사람들은 벗어날 꿈조차 꾸지 못하거나 벗어날 생각이 없는 사람들일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탈출이라니. 미미는 이곳을 벗어나 어디로 갔을까. 갑자기 눈앞이 아득해진다. 폴은 어두컴컴한 만화방에 앉아 떨고 있다. 나는 겁에 질려 떨고 있는 폴을 쏘아본다.



바람 탓일까. 하늘이 유달리 깨끗하다. 여름도 막바지인 듯 햇살 끝이 무디다. 차가운 물에 발을 담그고 앉아 살며시 눈을 감자 이곳이 파라다이스라는 착각이 든다. 야자수 나무가 시원스레 뻗어 있는 작은 섬을 생각하다 문득 눈을 뜬다. 파라다이스라니. 나는 신경질적으로 대야의 물을 마당에 쏟아 붓고 대야 가득 물을 담아 대문 밖으로 나간다. 담 밑에 비둘기 한 마리가 머리를 박고 있다. 가까이 다가가도 꼼짝도 하지 않던 비둘기가 부리로 벌건 토사물 속에서 팅팅 불은 국수를 건져 올린다. 매슥거리는 것을 참으며 토사물 위에 물을 끼얹는다. 놀란 비둘기가 부리에서 국수 가락을 놓친다. 재빨리 다가가 국수 가락을 발로 짓이긴다. 녀석은 잠시 허망한 날갯짓을 하다 지붕 위로 날아가 앉는다. 폴이 있었다면 이런 일은 내가 하지 않아도 된다. 아마 녀석은 비둘기가 토사물을 헤집으며 배불리 먹도록 내버려 두었겠지. 그리고 나서야 느리게 몸을 일으켜 토사물을 치웠을 것이다. 나는 잠시 사방으로 튀어버린 벌건 토사물을 바라보다 빗자루를 들고 나온다. 오장육부가 썩어 내리는 것 같은 냄새를 참으며 토사물을 치우다보니 며칠 동안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 녀석이 괘씸하다는 생각이 든다. 녀석이 한눈을 파는 것은 나에게 있어 좋은 징조가 아니다. 녀석에게 던진 미끼가 이제 효력을 다했다는 것이며 더 이상 잡아둘 수 없다는 것을 뜻하는 것으로 수고롭고 폼 나지 않는 일을 내가 해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손수레를 끌며 만화책을 배달하고 수거하는 나의 모습을 생각하니 녀석이 더욱 괘씸해 손끝이 떨린다. 빌어먹을 녀석. 아무렇게나 욕을 뱉어놓으며 토사물을 쓸어 담는다. 공사장 김씨가 문 옆으로 비껴 선다. 표정 없는 얼굴로 잠시 나를 쳐다보던 그가 허벅지를 긁으며 만화방으로 들어가 버린다. 그는 내내 무협지에만 머리를 박은 채 학자처럼 딱딱한 얼굴로 책장을 넘기며 나의 신경을 긁는다. 점심때가 한참 지나서야 컵라면 하나를 꺼내 물을 붓는다. 뚜껑을 덮고 밖으로 시선을 돌린다. 나는 한창 뜨겁게 달아올랐을 마당을 내다보며 늘어지게 하품을 하다 자세를 바로 잡고 그를 힐끗 쳐다본다. 여전히 소파에 비스듬히 앉아 무협지를 탐독하고 있다. 가끔씩 러닝셔츠 속에 손을 넣고 가슴과 등을 긁어 후우, 하고 입으로 손을 떨어내는 그를 보며 나는 미간을 좁힌다. 그의 그런 행동을 볼 때마다 악취가 풍기는 것 같아 속이 불편하다. 나는 방향제를 확인한다. 레몬향의 방향제가 코 속을 톡 쏜다. 미닫이문을 활짝 열어놓고 구석구석 방향제를 달아놓아도 쾨쾨한 냄새는 사라지지 않는다. 사라지기는커녕 냄새는 방향제와 섞여 더 이상하고 묘한 냄새를 만들어내며 세력권을 넓혀가고 있다.

"여기 폴 있지. 이 개자식 어디 있어?"

누군가 거칠게 문을 박차며 들어선다. 나는 고개를 돌릴 엄두도 내지 못한다. 나는 가까스로 고개를 돌린다. 찢어진 청바지에 '오! 필승 코리아' 라고 써진 붉은 셔츠를 입은 사내가 위협적으로 눈을 부라리며 뺨을 어루만지고 있다. 붉게 부풀어 오른 사내의 왼쪽 뺨에는 손자국이 선명하다. 내가 사시나무 떨 듯 바들바들 떨며 걸음을 옮기자 공사장 김씨가 앞을 가로 막으며 능청을 떤다.

"여자 혼자 영업하는데 그렇게 무섭게 대문을 발로 걷어차고 들어오면 어떻게 해. 보면 몰라. 폴이 여기 어디 있어."

"새끼 어디에 숨은 거야. 아, 씨발 잡히기만 해봐. 아주 아작을 내버릴 테니까. 미미 그 쌍년도 잡히면 여자구실 못하게 만들어 버릴 테니까."

나는 폴이 여기에 없다는 말만 반복했다. 붉은 셔츠가 바들바들 떨고 있는 나를 보며 히쭉 웃더니 황급히 밖으로 사라진다. 나는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만다. 난데없이 어머니의 얼굴이 눈앞에서 어른거린다.





여름이 끝나가고 있다.

그날 폴은 문구점 앞에서 동네 아이들과 딱지치기를 하다 붉은 셔츠에게 잡혔다고 한다. 저항 한번 못해보고 끌려간 녀석은 복날 개 패듯 패기 시작한 그들에게 거의 죽을 만큼 맞고 풀려났다. 나는 아무것도 몰라요, 라는 말을 고장 난 테이프처럼 반복하던 녀석은 바지에 오줌을 쌌고 이 소식을 들은 할머니와 누나가 달려와 애원 반 욕설 반을 섞어 울부짖은 끝에 결국 그런 일을 저지를 만큼 머리가 되는 것도, 간이 부은 것도 아니라는 판단이 내려졌고 망신창이가 된 녀석은 공사장 김씨의 등에 업혀 집으로 옮겨졌다. 나는 그날 만화방 문을 일찍 닫고 이불을 뒤집어쓴 채 방구석에 앉아 꼼짝도 하지 않았다.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아랫배를 움켜쥐고 감히 화장실에 갈 엄두도 내지 못한 채 밖에서 나는 작은 소리에도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 일이 있은 지 일주일 뒤 폴이 찾아 왔다. 만화책을 한 아름 안고 나타난 폴의 얼굴과 팔엔 붉은 색소를 뿌려 놓은 듯 한 피멍 자국이 남아 있었다. 왠지 모르게 영원히 없어지지 않고 흉으로 남을 것 같았다.

책꽂이에 녀석이 안고 온 만화책을 꽂다보니 마지막 권이 빠져 있었다. 이곳에선 사람은 도망가도 물건이 없어지는 경우는 흔한 일이 아니다. 특히나 만화책을 들고 가는 경우는 본적이 없다. 보통 이곳에서 도망치는 사람들은 맨몸으로 빠져나갔다가 두, 세달 안에 다시 돌아오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런데 미미는 다른 것도 아닌 만화책을 안고 사라진 것이다.

녀석은 여전히 오전 열한시면 만화방에 나온다. 녀석은 여전히 손수레로 만화책을 배달하고 수거해 온다. 나는 그런 녀석에게 컵라면뿐만 아니라 월 오 만원을 주기로 했으며 가끔씩 농땡이를 치는 것을 눈 감아 준다. 하지만 예전처럼 '이상한 나라의 폴'에 매달려 열중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심드렁하고 무료한 얼굴로 햇살이 부서져 내리는 것을 바라보다 크레파스를 꺼내 시멘트바닥에 빼곡히 '미미'를 써 넣는 녀석의 등이 한 뼘쯤 넓어져 있다.

마지막 발악을 하듯 여름은 선선한 바람 끝에 폭염을 쏟아 붓고 있다. 요 며칠 이십오 도를 상회하던 수은주가 갑자기 삼십이 도를 훌쩍 넘어 버렸다. 나는 일어나 앉는다. 시계는 새벽 네 시를 가리키고 있다. 만성두통에 시달리는 사람처럼 머리를 누르며 호수를 끌어다 부엌 수도꼭지에 연결하고 옷을 벗기 시작한다. 짧은 반바지를 벗고 민소매 셔츠를 벗다 닫지 않은 창문이 생각나 뒤돌아선다. 그때 창문 사이에서 예리한 칼날처럼 섬뜩하게 반짝하는 것과 눈이 마주친다. 나는 바지를 다리에 꿰다 팽개친다. 재빨리 밖으로 뛰어 나간다. 누군가 다급하게 마당을 가로지르는 것이 보인다. 허둥거리는 발이 대문을 박차고 뛰기 시작한다. 나는 그 뒤를 쫓아 맹렬히 달린다. 미로 같이 엉킨 골목에서 놈을 놓친다면 영영 놈의 얼굴은 확인할 수 없을 것이다. 나는 발바닥이 아픈 것도 참으며 사력을 다해 달린다. 그런데 놈의 달리기 솜씨가 생각보다 형편없다. 왼쪽으로 살짝살짝 중심이 기우는 게 영 시원치 않다. 골목 중간도 가지 않아 놈은 나에게 허리띠를 잡히고 만다. 손끝에 느껴지는 체중이 마대자루처럼 가볍다. 이상한 일이다. 순간 섬광처럼 얼굴 하나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사라진다. 손끝에서 스르르 힘이 빠져나간다. 허리띠를 놓친다. 나그네 여관 이노인이다. 바닥에 고꾸라진 이노인의 주름지고 마른 손을 보자 구역질이 넘어온다. 벌레가 식도를 타고 넘어가는 것 같아 담 밑에 쪼그리고 앉아 손가락을 입 속에 넣고 뱃속의 것을 끄집어내기 시작한다. 막 소화가 되다만 햄 덩어리를 쏟아낼 때 등 뒤에서 돌가루를 밟는 듯 유리가 바스러지는 소리가 들린다.

"영감 어디 한 군데 부러지기 전에 얼른 가쇼."

고개를 돌린 곳에 공사장 김씨가 서 있다. 그의 목소리가 낮고 위협적이다. 허둥거리며 사라지는 이노인을 잠시 쳐다보다 다시 담 밑에 고개를 처박는다. 그가 다가선다. 머뭇거리던 손이 토닥토닥 나의 등을 두드린다. 그의 손이 부드럽고 따뜻하다. 창자까지 끌려나올 것 같은 토악질은 위액까지 다 끄집어 내서고야 멈춘다. 푸르디푸른 가로등 빛이 푸른 멍처럼 발등에 고인다. 천천히 일어선다. 어질, 무릎이 풀썩 꺾인다. 그가 허리를 감싸 안는다. 골목이 산길처럼 구불구불 하다. 서서히 모든 사물이 눈앞에서 밀려난다. 아득하다.

잠에서 깬다. 땅땅땅, 누군가 함부로 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바로 옆에서 나는 것처럼 머릿속을 텅텅 울린다. 고막을 찢는 것 같은 소리가 광포하게 머릿속을 휘젓다. 나는 잠시 누렇게 변색된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다 일어나 앉는다. 책상 위에는 주전자와 컵이 얌전히 놓여 있다. 나는 방문 앞을 무릎걸음으로 다가간다. 방문 고리를 잡고 심호흡을 한 번 한다. 문을 연다. 공사장 김씨가 입간판을 새로 만들고 있다. 러닝셔츠 바람에 연신 땀을 닦아내며 망치질을 하는 그의 모습이 각막을 파고든다. 소리 나지 않게 방문을 닫고 가지런히 놓인 컵에 물을 따라 마신다. 목울대가 따끔거린다. 컵을 내려놓는데 방안 한구석에 퇴물처럼 놓인 가방과 신발이 눈에 걸린다. 무릎을 끌어안고 그것들과 대치하듯 반대편 구석에 앉는다. 망치질 소리가 방 안 가득 흘러넘친다. 일어선다. 머플러와 옷가지, 시계와 선글라스 등을 꺼내들고 밖으로 나간다. 창고 앞에 선다. 햇살이 창끝을 세우고 정수리에 내리꽂힌다. 창고 문을 당긴다. 벌겋게 녹이 슨 자물쇠통은 잘 열리지 않는다. 나는 체중을 실어 매달린다. 처음의 기세와는 달리 너무 쉽게 입을 벌려 버리는 자물쇠통을 보며 기분이 묘해진다. 합판으로 된 나무문은 휘청거리더니 힘없이 벌컥 열린다. 전등 스위치를 누른다. 왈칵 쏟아진 빛이 어둠을 순식간에 밀어낸다. 먼지가 천천히 허공으로 떠오른다.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 창고 안으로 들어선다. 낡은 장식장과 모서리가 떨어져 나간 앉은뱅이책상이 한쪽 구석에 놓여 있다. 그 옆으로 바늘이 없는 괘종시계와 호랑이가 입을 딱 벌리고 있는 색 바랜 그림이 끼워져 있는 액자가 세워져 있다. 고개를 돌린다. 먼지가 뽀얗게 내려앉은 비닐이 산처럼 솟아 있다. 비닐을 들춘다. 하얀 종이가 붙어 있는 물건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물건은 노끈으로 단단하게 묶여져 있다. 물건 중 하나를 집어 든다. 낡은 운동화와 추리닝에 종이가 붙어 있다.

'1988년 8월 25일, 권투장 박군'

이것뿐만이 아니다. 색 바랜 여행용 가방에도, 군용 침구처럼 돌돌 말린 이불에도, 상표가 다 지워진 화장품에도 종이가 붙어 있다.

'1968년 3월 4일. 곱창집 오춘자', '1973년 12월 23일. 역촌다방 미스 김', '1978년 1월 21일. 막노동 유씨'…….

물건들이 빚 장부처럼 차곡차곡 쌓여 있다. 전류가 흐르는 것처럼 손끝이 찌릿하다. 사르르 통증이 훑고 간 가슴이 먹먹하다. 가방과 신발을 끌어안고 창고 구석에 쪼그리고 앉는다. 나는 메모지를 만지작거릴 뿐 아무것도 쓰지 못한다.

나는. 나는...



#당선소감

몸살이 나고 말았다. 오랫동안 겹겹이 쌓여 있던 긴장이 풀렸기 때문이다. 울지 않았는데 통곡한 것처럼 몸이 부서질 것 같았다. 특히 손가락 마디가 아팠다. 손을 주무르며 말했다. 고생했다. 고생했다. 내 손가락.

신문사에서 당부했다. 당선 소식을 다른 사람에게 알리지 말라고. 친구와 후배에게 전화를 했다. 당선되었다, 라고 말하자 울기 시작했다. 언니, 아, 언니, 은희야, 하며 말을 잇지 못하고 흐느꼈다. 손가락 마디가 다시 아팠다. 하고 싶은 말이 있었는데 입 안에서 부서져 버렸다. 괜찮아, 괜찮아, 라고 그들을 다독였다. 그들은 내 아픈 손가락이다. 나는 그들과 함께 소설을 썼다.

긴 시간을 묵묵히 내 곁을 지켜준 친구들과 가족이 없었다면 소설을 다시 쓸 생각을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들은 그만 둘까, 생각할 때마다 나를 지지해주고 격려해 주었다. 내 소설을 읽어주는 유일한 독자가 되어주었고, 소설을 쓰고 있는지 확인하는 편집자가 되어주었고, 공모전을 챙겨 알려주었다. 매번 문 앞에서 닫힌 문을 열지 못하고 떨어지는 나에게 다 왔다고, 곧 열린 것이라고 말했다.

감사하고, 고마운 사람들이 많다. 방향을 알려주고 길이 되어준 박범신 선생님, 이제하 선생님께 감사드린다. 내 오랜 버팀목 어머니와 가족에게 죄송하고, 감사한다. 병융, 진화, 선경, 재혁, 민주, 정민이 고맙다. 소설에 대한 나의 외사랑을 끝나게 해준 심사위원 선생님께 감사드린다. 어머니 깊이 사랑합니다.



재밌는 글을 쓰고 싶다. 반짝이는 글을 쓰고 싶다. 슬프고, 외로운 사람들에게 찾아가고 싶다. 세상의 가장자리에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말하고, 쓰고 싶다. 소설을 쓰는 것이 나에게 행복이 되듯 소설을 읽는 사람들이 조금, 아주 조금이라도 행복할 수 있는 글을 쓰고 싶다. 지금, 이 기분. 말로 표현할 수 있는 이 느낌을 잊지 않고 가슴에 담아두겠다. 그리고 꾸준히 쓰겠다. 내 아픈 손가락을 되새기며...



#프로필

김은희

1973년12월23일

강원도 춘천 출생

경기도 파주시 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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