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 독립운동 유적지를 가다 ⑩논산 강경 옥녀봉
이처럼 평화로운 옥녀봉에 일제의 대한민국 말살 정책이 날로 악랄해지고 있던 1919년 3월 10일 오전 10시. 이날은 강경 포구엔 사람이 많이 모이는 강경장날이었다. 이때 봉오재 애기봉(현 옥녀봉) 일본제국지의 신사 앞에서 대한독립만세소리가 진동했다.
강경 독립만세 운동은 천안 아우내 장터 대한독립만세 운동 보다 10여 일 앞선 대한독립만세 운동으로 역사에 길이 남아 후손들에게 조국의 소중함을 일깨우기에 모자람이 없다.
옥녀봉에는 지금도 당시 나무와 삼일독립운동 기념비, 일본 신사 사진 등 일제의 잔혹함이 그대로 간직한 채 관광객들에게 교훈을 주고 있다.
1919년 3월 10일 이날의 대한독립만세 운동은 부여군 세도면 청포교회 창영학교 엄창섭 교사에 의해 서다.
당시 `창영학교`는 구 한국정부의 인가를 얻은 학교로 담임교사의 봉급은 군산 구암에 주재한 남장로회 선교부가 반을 부담하고 있었다.
엄창섭 교사는 본래 전북사람으로 군산 구암선교부와도 자주 연락하는 처지였는데 그의 고향인 전북 익산군 옹포면 대봉암에 사는 군산영명학교 학생인 강금옥씨로부터 연락을 받고 청포교회, 창영학교를 중심으로 해 고상준, 추병갑, 김종갑, 추성배, 서삼종씨 등의 주동으로 3.1운동의 거사를 계획하게 된다.
금강건너 강경지방의 강세형, 윤동만, 정기섭, 한규복씨 등의 협력을 받아 극비리에 1919년 3월 10일 오전 10시 강경장날을 기해 궐기대회를 열기로 합의하기에 이른다.
당시 부여군 세도면은 금강나루를 건너 강경시장의 생활권에 속해 있었고 강경보다는 인구가 크게 적어 사람이 많은 강경을 만세운동 장소로 정했다.
하지만 대한독립만세 운동은 준비부터 간단치가 않았다.
엄창섭 교사 등 주동자들은 3월 10일 의거에 앞서 부여 세도 망개 부락 백공술씨의 집에 모여 서슬이 시퍼렇던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해 극비리에 태극기를 만들었다.
남자들은 깃대를 다듬고 태극을 그리며 태극기를 만들고 여자들은 풀을 쑤어 치마 속에 감추고 대밭 속으로 나르며 깃발을 붙이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았다.
거사 당일 아침, 밤새 비밀리에 만든 태극기를 지게 위 고추자루 속에 숨겨 서삼종씨(군산, 이복만 장로 외숙)에게 왜경의 눈을 피해 운반케 하여 강경 장날 오전 10시에 봉오재 애기봉에서 엄창섭 선생이 먼저 대한독립선언서를 낭독했다.
그와 동시에 동포 (500여명으로 추산)들이 당시 일본 사람들이 많이 사는 홍교동을 누비며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목청이 터져라 외쳤다.
수많은 동포들이 함께 독립만세를 외치다가 잔인한 왜경에게 구타. 체포, 수감, 구류, 고문을 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그중 주동자들도 왜경에 체포돼 엄창섭(28)은 징역 2년, 고창준(20)·추병갑 징역 1년, 강세형, 윤동만, 정기섭은 징역 8개월, 김종갑(24), 추성배(19)는 징역 6개월, 서삼종(24),한규섭은 징역 3개월에 처해졌다.
후에 강세형, 윤동만, 정기섭, 서삼종, 한규섭 등은 석방되고 나머지 사람들은 공주형무소에서 복역하는 고통을 겪었다.
독립 후 엄창섭 선생은 1980년 8월15일 최규하 대통령으로부터 독립운동 헌신 표창을 받았고 1990년 12월 노태우 대통령으로부터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는 등 강경 만세운동 주동 선생들은 건국훈장 등 표창을 받았다.
한일웅 현 창포교회 목사는 "한 예화로 당시 청포교회 김진규 장로가 만세를 부르던 중에 체포돼 갔는데 왜경이 `왜 독립을 위해 만세를 불렀느냐`고 묻자 `한국이 독립된 줄 알고 만세를 불렀다`고 답해 석방됐다는 뒷얘기도 있다"고 후일담을 전했다.
한 목사는 또 "강경 3.10 운동을 태동시킨 창영학교는 청포교회 정영태, 오기선 두 사람이 설립, 1919년까지 9년 동안 인재를 양성 하다가 엄창섭 교사가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다가 투옥되면서 학교는 폐쇄됐다"고 설명했다.
김무길 강경역사문화연구원 연구부장은 "1919년 3월 10일 첫 만세 운동이 있은 뒤에도 일제의 억압에 굴하지 않고 6차례 더 만세 운동이 펼쳐져 모두 7차례 만세운동이 있었다"며 "당시 만세를 부르던 사진이 남아있지 않아 안타갑다"고 아쉬워 했다.
김 부장은 또 "만세운동을 펼쳤던 옥녀봉에는 일본인들이 숭배하는 신사가 있었는데 독립만세를 신사 앞에서 외쳤던 것은 당시로서는 보통 큰 사건이 아니라"고 설명했다.이영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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