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 독립운동 유적지를 가다 ⑦ 홍성 금마·장곡 3.1운동 만세시위지

홍주의사총. 사진=김정원 기자
홍주의사총. 사진=김정원 기자
충남 홍성은 항일독립운동이 활발했던 역사적인 고장이다. 청산리 대첩의 백야 김좌진, 님의 침묵의 만해 한용운 등 항일운동을 펼친 애국자를 배출했으며, 을사늑약 체결에 반발해 일어난 의병운동 규모도 상당했다. 항일 의병활동 중 홍주성 전투에서 순국한 수백 명의 유해를 모신 홍주의사총이 위치해 있다. 홍성의 옛 이름은 홍주이다. 고려시대부터 사용한 홍주 지명은 1914년 일제강점기 지역의 정신을 말살하기 위해 강제로 홍성으로 변경됐다. 또 일본인들은 홍주성이 의병의 거점이 되는 것을 막기 위해 서문과 북문을 철폐하고 성곽 곳곳을 철거했다고 한다. 동문인 조양문마저 철폐하려 했으나 지역민들의 강력한 반대로 보존하게 됐다. 1919년 금마·장곡면에서는 주민들의 적극적인 참여 아래 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됐다.

◇일제 침략에 맞선 홍주의병= 홍주는 일제 침략에 맞서 싸운 의병의 고장이었다. 현재 홍성에는 항일 의병활동 중 홍주읍성(홍주성) 전투에서 희생된 병오 홍주의병의 유해를 모신 홍주의사총이 위치해 있다. 1905년 일본 강압에 의해 을사늑약(을사조약)이 체결된다.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기 위해 강제로 체결된 을사늑약에 반발해 을사의병이 일어나는데 규모로 볼 때 홍성은 전국적으로 가장 큰 규모였다고 한다. 홍주지역에서는 1906년 3월 이조참판을 지낸 민종식을 비롯 채광묵, 박인기, 이만식 등과 농민, 유생 등이 홍주읍성에서 일본군과 싸웠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같은 해 5월 홍산(현 부여군 내산면)에서 모인 병오 홍주의병은 서천, 남포, 결성 등을 공략하고 홍주읍성을 탈환하지만 일본의 대규모 공격에 수많은 희생자를 내면서 무너졌다.

홍주읍성 전투에서 숨진 의병은 수백명에 달한다. 이때 순국한 의병들의 유해가 지금 홍주의사총에 묻힌 것이다. 홍주읍성을 지키다 희생된 의병의 시신을 수습한 건 1949년이다. 이 무덤은 많은 이들이 죽었다는 의미에서 구백의총이라 부르다 1992년 홍주의사총으로 이름이 변경됐고, 2001년 국가지정문화재로 지정받았다. 홍주의사총 인근에는 의병들의 영혼을 모신 창의사, 홍주의병기념탑 등이 있다. 한편 일본인들에 의해 홍주읍성의 서문과 북문은 파괴돼 없어지고 동문인 조양문은 부분 보수로 복원된 상태다. 1906년 홍주읍성 전투 당시 흔적이 지금도 조양문 곳곳에 남아 있다.

◇금마·장곡 3·1운동 만세 시위지= 1919년 홍성군 금마면과 장곡면에서 독립만세 시위가 전개됐다. 이 시위로 많은 이들이 형벌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1919년 4월 1일 민영갑 등 주도로 금마면 가산리의 임시 연극 공연장에서 만세 시위가 일어났다. 민영갑은 이재만과 협의해 연극을 보기 위해 이원교 집에 설치된 임시 연극 공연장에 모인 군중들과 독립만세를 부르기로 결의하고 최중삼, 김재홍, 조재학, 조한원 등 동지를 모았다. 4월 1일 오후 8시 연극 공연 중 조한원이 독립만세를 선창하자 관중들이 이에 호응해 만세를 외쳤고, 공연장 인근에서 독립만세 소리를 들은 주재소 경찰들이 즉시 출동해 시위를 탄압하고 주도 인사들을 체포했다. 이날 체포되지 않은 인사들은 4월 2일 홍성장터에서 다시 독립만세를 외쳤다. 이 만세 시위로 6명이 징역 6월에서 1년의 옥고를 겪었다.

또 장곡면에서는 1919년 4월 4일과 7일, 8일 3차에 걸쳐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4월 4일에는 윤형중과 윤익중, 윤낙중 형제들의 주도로 장곡면 매봉산에서 횃불 시위가 있었고, 4월 7일과 8일에는 장곡면사무소를 중심으로 만세 시위가 전개됐는데 7일에는 김동하의 주도로 김동완, 김용숙, 김용제, 이화춘, 김차제, 한상철 등이 화계리 주민들과 마을 앞 산에서 독립 만세를 외치고 장곡면사무소로 이동해 계속 시위를 벌였다. 같은 날 오후 8시에는 광성리·가송리 주민 300여 명이 면사무소 뒷산에 올라 독립 만세를 부른 후 면사무소로 이동해 면사무소를 파괴했다. 또 8일 지역 인사들과 학생 60여 명은 밤 11시 도산리에 모여 면사무소를 공격하고 독립 만세를 불렀다.

◇독립운동 대표 인물 배출= 홍성에는 독립운동에 앞장선 만해 한용운 선생과 백야 김좌진 장군의 생가가 있어 이들의 삶과 업적을 엿볼 수 있다. 만해 한용운 선생은 승려이자 독립운동가, 저항시인이다.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 1인으로 이름을 올린 독립운동가이다. 1879년 홍성 결성면에서 출생한 한용운 선생은 1910년 일본이 주장하는 한인불교동맹을 반대 철폐하고 33세에 만주로 망명해 이회영, 박은식, 김동삼 등 지사들을 만나 독립운동을 협의했다. 1919년 3·1운동을 이끈 민족대표 33명의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서 공약 3장을 작성했다. 이후 체포돼 3년 형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수감생활을 하면서 변호사를 대지 말 것, 사식을 취하지 말 것, 보석을 요구하지 말 것 등 3가지 원칙을 지킨 것으로 전해진다. 특히 1926년 시집 `님의 침묵`을 발간, 저항문학에 앞장섰다. 한용운 선생 생가는 충청남도기념물 제75호로 지정됐다. 초가집 형태인 생가 인근에는 만해사, 만해문학체험관, 민족시비공원 등이 있다.

김좌진 장군은 독립운동에 일생을 바친 대표 독립운동가이다. 1889년 홍성 갈산면에서 태어나 15세 때 당시 집안의 노비를 해방시키고 18세가 되던 해인 1907년 호명학교를 세운다. 1915년 광복단에 가담해 격렬한 항일투쟁을 전개하다 1918년 만주로 건너가 3·1운동의 기폭제가 되는 무오독립선언서 민족지도자 39명 중 한사람으로 서명했다. 1920년 10월 청산리 전투(청산리 대첩)에서 일본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여 승리를 이끌었다. 김좌진 장군의 북로군정서와 홍범도 장군이 이끄는 대한독립군 등 독립군 연합부대가 합동작전을 벌여 청산리 일대에서 일본군과 싸워 이긴 전투이다. 독립군 사상 최대 전과로 꼽힌다. 김좌진 장군 생가지는 충청남도기념물 제76호로 지정됐으며, 인근에는 기념관, 사당, 공원 등이 있다.김정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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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주의사총. 사진=김정원 기자
홍주의사총. 사진=김정원 기자
김좌진 장군 생가지. 사진=김정원 기자
김좌진 장군 생가지. 사진=김정원 기자
김좌진 장군 생가지. 사진=김정원 기자
김좌진 장군 생가지. 사진=김정원 기자
홍주의사총 전경. 사진=홍성군 제공
홍주의사총 전경. 사진=홍성군 제공
홍주성 야경. 사진=홍성군 제공
홍주성 야경. 사진=홍성군 제공
홍주성 전경. 사진=홍성군 제공
홍주성 전경. 사진=홍성군 제공
조양문. 사진=홍성군 제공
조양문. 사진=홍성군 제공
조양문. 사진=홍성군 제공
조양문. 사진=홍성군 제공
만해 한용운 생가. 사진=홍성군 제공
만해 한용운 생가. 사진=홍성군 제공

김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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