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서산

오서산에서 바라본 광천.
오서산에서 바라본 광천.
연애의 최대 묘미는 `밀당`(밀고 당기기)이다. 사랑인 듯, 사랑 아닌, 사랑 같은 느낌을 줘야 연애에 성공할 수 있다. 이런 면에서 서해안 최고봉 오서산은 하수 등산객에겐 `연애의 고수`였다. 오르고 또 오르며 중도 하산하고 싶은 맘이 굴뚝 같지만, 어쩔 수 없이 정상에 오르게 했다. 무언가 나올 것 같은, 뭔가를 얻을 것 같은 기대가 끊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초 산행의 목적지로 오서산을 택한 것은 밀당의 묘미를 느끼기 위함은 아니었다. 오서산에서만 볼 수 있는 2개의 바다, 그 장엄함 가운데 서고 싶은 바람이 컸다. 억새의 물결 속에서 `정중동`의 서해를 보며 세상 시름을 씻어내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시기가 좋지 않았다. 잔뜩 흐린 날씨로 2개의 바다를 본다는 것은 애초부터 말이 안됐다. 하지만 어찌하랴. 산 앞에 섰으니 오를 수 밖에….

오서산 산행은 시작부터 힘겨웠다. 엄마, 부인과 함께 말을 잘 들어야 하는 3대 여성에 속하는 `네비양`(네비게이션)의 문제로 입구 찾기부터 쉽지 않았다. 보통 대전에서 출발해 1시간 반이면 도착한다고 하는데 2시간 반이 넘게 걸렸다. 네비의 잘못된 안내만 믿다 보령, 홍성, 예산 등 오서산 인근에 있는 지자체를 한 차례 순회했다.

우여곡절 끝에 도착은 했다. 예상보다 늦게 도착한 시간, 밥을 먹고 오를까 고민도 했지만 무언가 장관을 보게될 것 같은 기대가 더 컸다. 일단 산에 오르기로 했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했건만 어리석게도 `경후식`을 택한 것이다.

오서산은 생각 외로 한산했다. `인생 뭐 있슈`, `웃으며 사는거지` 등의 글귀가 적힌 장승을 지나 도착한 주차장은 말 그대로 텅 비어 있었다. 상당주차장에 여유롭게 차를 세우고, 산에 오를 채비를 했다. 주차장을 벗어나 숲 사이 임도에 들어섰다. 솔직히 이때까지만 해도 충분히 오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목마름을 막아줄 물도 충분했고, 허기짐이 왔을 때 챙겨줄 초콜릿도 주머니에 가득했다. 하지만 오서산에 대한 기대는 발걸음을 옮기면 옮길수록 절망(?)으로 이어졌다. 오서산 산행의 `지옥코스`를 앞둔 정암사까지 오르는 것 만도 초보 등산객에겐 고된 인내의 시간이었다. 주차장부터 정암사까지는 차가 충분히 다닐 수 있을 정도로 길도 넓고 정리도 잘 돼 있었지만 문제는 경사였다. 처음엔 눈에 들어왔던 자연도 한 10분 가량 발걸음을 옮기며 시야에서 점차 사라졌다. 포장된 길과 비포장된 임도를 오가며 연신 거친 숨을 몰아쉬는 것만으로 충분히 벅찼기 때문이다.

죽을 둥 살 둥하고 산에 오르다 보니 한 사찰이 눈에 들어왔다. 오서산 산행의 중간 쉼터 격인 정암사가 그곳이다. 정암사는 고즈넉한 분위기의 작은 산사였지만 불교의 그것을 느끼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사리탑, 극락전 등 오랜 역사를 지닌 사찰에 있는 모든 것이 자리잡고 있었다. 또 경내 옹달샘 위쪽 돌 위에 올려져 있는 작은 불상들은 이곳을 찾는 즐거움을 배가 시키기에 충분했다.

정암사에서 마음을 다시 잡고 산에 오르기 시작했다. 오서산과의 밀당은 이 때부터 시작됐다. 임도를 걸을 때는 힘들었지만, 보통의 산행과 큰 차이가 있다 말하긴 힘들었다. 하지만 정암사를 거쳐 정상까지 가는 길에는 엄청난 어려움과 무언가를 만날 수 있는 기대가 교차하는, 말 그대로 밀고 당기는 시간이었다. 정암사에서 오서산 정상으로 향하는 길은 두 갈래로 나뉘어져 있었다. 자연 그대로를 느낄 수 있는 옛 길과 1600여 개의 계단으로 정비가 된 등산로가 그것이다.

첫 산행이고 자연을 만나는 것이 목적이었던 만큼 옛 길 (자연 등산로)를 택했다. 고난은 정암사 경내를 벗어나면서 시작됐다. 한 10분 아니 5분이나 올랐으려나. 망부석 마냥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힘들었다. 그냥 바닥에 철푸덕 앉았다. 이 때 눈에 신기한 모습이 들어왔다. 바위위로 쌓아 올린 돌들이 여느 돌무덤과는 다른 모습을 보였던 것. 나름의 경이로움이 느껴지는 이곳에서의 휴식을 뒤로하고 산으로 가는 발길을 재촉했다. 누군가 반으로 산을 쪼개 놓은 듯한, 거의 직각처럼 느껴지는 가파른 경사의 이 곳을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던 것이다.

마음은 등산로를 벗어나 빨리 정상으로 가고 싶었지만 몸은 따라주지 않았다. 생각보다 험한 길을 지나다 보니 걷다 기다를 반복할 수 밖에 없었다. 힘에 부쳤지만 등산을 포기하지 못했다. 산을 오르며 위를 바라보면 밝은 빛이 비춰졌고, 조금만 더 가면 정상에 도착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연애할 때 조금만 더 노력하면 상대의 마음을 얻을 수 있을 것 같지만 생각처럼 쉽지 않았던 것과 같은 경우였다. 걷다 쉬다 기다 쉬다를 반복하다 보니 어느 덧 물병은 바닥을 드러냈다. 주머니에 넣어뒀던 초콜릿이 떨어진 것은 이미 오래였다. 도중에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을 수십 번 아니 수백 번 했나 싶었을 때 능선에 도착했다.

능선은 좋았다. 시원한 바람도 좋았고 경사도 완만했다. 오랜 밀당 끝에 사랑 하는 사람을 얻은 듯한 느낌이 들 정도였다. 전과 비교할 때 상당히 완만한 경사인 능선을 거닐다 보니 산에 오르며 못 봤던 꽃과 나무가 눈에 들어왔다. 수줍은 듯 얼굴을 내민 야생화와 수십, 수백 년을 거치며 단단하게 수피를 다진 나무들의 모습에서 자연 그 자체를 느낄 수 있었다. 능선 산행이 준 또 다른 즐거움은 조망이다. 흐린 날씨임에도 홍성 광천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오히려 정상보다 훨씬 더 뚜렷한 모습이었다.

능선을 따라 발걸음을 재촉하니 오서산의 이름을 높인 억새와 조우할 수 있었다. 완연한 가을이 아닌 관계로 `완숙미`(?) 넘치는 모습은 아니었지만, 가을 손님 맞을 채비는 이미 마친 듯 보였다. 흐린 날씨로 인해 빚어진 몽환적 분위기와 연하의 이성 같은 느낌의 억새, 그리고 능선에서 조망한 광천지역의 전경은 오서산 전성기와는 약간 색다른 즐거움을 선사하는 듯 했다.

계단과 산길을 번갈아 오르고 또 오르다 보니 어느 덧 전망대에 도착했다. 데크로 만들어진 오서산 전망대는 과거 오서정이 있던 자리로 지난 2010년 서해안을 강타한 태풍 곤파스로 인해 과거와 다른 모습이었다. 전망대를 지나 정상까지 가는 길의 느낌을 말 그대로 최고였다. 흐린 날씨 덕인 지 산 정상은 구름인지 안개인지 모를 수증기로 덮혀 있었다. 한치 앞도 보기 어려운 그 구름 (또는 안개) 속을 걷다 보니 이곳이 무릉도원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시원한 바람과 수증기의 차가운 느낌이 땀을 식혀줬음은 물론, 도시에선 느낄 수 없는 맑은 공기가 폐부 깊히 들어왔다.

안개 덕에 오서산 전체 억새가 주는 즐거움과 산 정상에서 서해 바다를 보는 호사를 누리진 못했지만 이번 오서산 산행은 많은 것을 얻을 수 있는 기회였다. 힘들어도 포기 하지 않으면 언젠간 정상에 오를 수 있다는 가르침과, 구름 (또는 안개) 속에서만 느낄 수 있는 말로 표현 못할 분위기 등등. 특히 산과 밀당 하 듯 정상까지 간 그 느낌은 쉽사리 잊혀 지지 않을 것 같다. 글·사진=성희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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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파른 산길과 계단이 이어지는 오서산 등산로.
가파른 산길과 계단이 이어지는 오서산 등산로.
유쾌한 문구로 눈길을 잡는 오서산  입구 장승.
유쾌한 문구로 눈길을 잡는 오서산 입구 장승.

성희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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