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룡 향적산

국사봉 정상 천지창운비
국사봉 정상 천지창운비
산은 딱 사람의 능력만큼 몸을 내준다. 체력이 약한 사람이 무리하게 오르려 하면 아픔을, 반대의 경우에는 적잖은 아쉬움을 선사한다. 항상 그 모습 그대로 그 자릴 지키고 있지만, 각각에게 서로 다른 느낌을 주는 이유다. 그곳은 바다와는 다른 넉넉함을 선사한다. 삶의 무게에 짓눌린 몸을 이끌고 오르내리면 더 지칠 것 같지만, 산행 후에는 상쾌함만 남는다. 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산만의 여유로움 덕이다.

찌는 듯한 더위가 심신을 괴롭히던 주말, 문득 산과 조우하고 싶어졌다. 나름의 더위 탈출이자, 힐링의 기회가 될 것이란 생각에서다. 산행을 결심했으니 다음은 어디로 갈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생겼다. 문득 평소 산행과 다른 재미를 주는 곳을 찾고 싶었다. 나름의 `이색`(異色)이 살아있는 곳을 말이다. 고민 고민 끝에 찾아간 곳은 충남 계룡시에 위치한 향적산. 향적산은 계룡시 엄사면 향한리에 위치한 575m의 산이다. 계룡산 천왕봉에서 한 가닥 산줄기가 남쪽에서 연산까지 거의 일직선으로 뻗었는데 이 줄기의 중간에 자리 잡고 있다.

결정했으니 행동으로 옮겼다. 대전에서의 일정을 뒤로하고 차에 시동을 걸었다. 대전시청 인근에서 출발해 현충원을 지나니 눈 앞에 녹색 풍경이 펼쳐졌다. 이후 박정자 삼거리를 거쳐, 동학사 초입 로터리를 지난 밀목재 고개를 지날 땐 살짝 마음이 들떴다. 자연과 호흡하는 정돈 아니지만, 자연과 만난 것이다. 향적산을 즐기는 재미는 엄사중학교 입구에서 시작됐다. 도로 옆에 심어진 배롱나무 (일명 백일홍) 들이 수줍은 듯 붉디 붉은 꽃망울을 터뜨리고 있었다. 또 길 옆 한 귀퉁이에 자리잡고 있는 상사화(잎이 있을 땐 꽃이 없고 꽃이 필 땐 잎이 없어 서로를 그린다는 뜻으로 상사화라 불림) 군락지 역시, `핑크 빛 미소`로 산행을 반기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눈이 즐거운 순간이었다.

향적산 산행은 시작부터 특별했다. 산행의 출발선에 있는 무상사 덕이다. 얼핏 보면 고즈넉한 여느 산사와 다를 것 없는 절이지만, 그 속을 들여다 보면 색다름이 있었다. 외국인 스님들이 거주, 쉽게 만나기 어려웠던 벽안의 수도승과 조우할 수 있다는 것. 현재 무상사에는 미국, 폴란드, 러시아, 체코 등에서 수행을 위해 한국을 찾은 외국인 스님 10여 분이 수행 중이었다. 이 절은 미국 하버드 대학 출신으로 유명한 현각 스님이 수도한 곳으로도 유명하다.

무상사를 찾아 가장 먼저 한 일은 대봉도문조실스님 만난 것이다. 미국 출신으로 현재 이 절의 대소사를 책임지고 있는 대봉 큰 스님은 무상사의 유례와 이 곳이 갖고 있는 의미 등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줬다. 한국의 선(禪, 불교의 한 조류)을 외국에 포교했던 숭산 큰 스님이 이 사찰을 세웠던 얘기. 또 당시 숭산 큰 스님이 "이곳은 국가에 크게 쓰일 스승이 날 곳"이라며 황무지를 개간해 터를 닦은 일. 미국에서 건너와 숭산 큰스님과 함께 지냈던 대봉 큰스님의 지난 시간 등을 말이다.

대봉큰스님을 통해 이 곳에 대해 알아가며 주변에 권하고 싶은 것이 생겼다. 바로 일요영어참선법회다. 이 법회는 무상사만의 특성을 최대한 살린 것으로, 영어로 진행되는 것이 특징이다. 영어가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된 현대인에게 종교, 종파를 떠나 색다른 자극을 줄 기회가 될 수 있다는 얘기다. 이와 함께 불교에서 말하는 결제(結制)기간 이곳에서 진행하는 템플스테이(Temple stay)역시 다른 곳과 다른 즐거움을 선사할 것으로 생각됐다. 천혜의 환경 속에서 외국인 스님들과 함께 생활하며 마음의 여유를 찾는 것 자체가 의미 있기 때문이다.

무상사가 갖는 특별함 역시 놓칠 수 없는 대목이었다. 사실 무상사는 보통의 사찰과는 조금 다른 곳이었다. 불교에서 말하는 사부대중 (교단을 구성하는 비구, 비구니, 우바새, 우바이 전체)이 함께 수행하며 저마다의 지혜를 찾아가고 있다. "서로 다른 대중과 하나가 돼 수행하며 일상에서 받은 상처를 치유하는 함께 곳"이라는 대봉큰스님의 설명을 이해할 수 있는 이유다.

특별함을 선사했던 무상사를 뒤로 하고 숲길로 발걸음을 옮겼다. 유명 산과는 조금 다른, 돌과 낙엽 등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간직한 모습이었다. 더위 탓인가, 조금 걷다 보니 연신 땀이 흘러 내렸다. 산행을 시작한 지 채 10분도 지나지 않아 상의가 다 젖을 정도였다. 순간 여기서 포기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포기할 수 없었다. `핵존심`을 가진 남자이기 때문. 덥고 힘들었지만 정상을 향해 쉬지않고 발걸음을 옮겼다.

산의 중턱 정도 올랐을까. 거친 숨을 몰아쉬며 걸음을 옮기니 국조선원이 나왔다. 이곳에서 시원한 약수를 한 사발 들이켰다. 그간의 피곤함과 숨가쁨이 한 순간에 씻기는 느낌이었다. 이후 조금 더 발걸음을 옮기자 앉아 쉴 수 있는 벤치가 나왔고, 그 옆 숲 사이로 작은 저수지가 눈에 들어왔다. 잠시 쉬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여기서 멈추면 영원히 정상에 가지 못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발길을 재촉했다. 가다 보니 이번엔 한 초옥이 눈에 들어왔다. 조선 말 역학의 대가인 김항 선생이 후학들을 가르쳤던 향적산방이다. 이 곳에서도 약수를 한 사발 들이키고 또 다시 산에 올랐다. 시원한 약수를 들이키고 신록이 우거진 산을 오르다 보니 어느 덧 피곤함보다는 상쾌함이 느껴졌다. 특히 산행 중간에 만난 다람쥐는 특유의 귀여움으로 산행의 피로를 잊는데 도움을 줬다.

이정표를 따라 쉼 없이 산을 오르다 보니 여러 사람이 자리를 펴고 놀 만큼의 크기인 풀밭이 나왔다. 바로 향적산 정상인 국사봉 밑 헬기장이다. 과거 한 차례 찾았던 이곳에 도착하니 "이제 얼추 성공했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곳에서 300m만 오르면 예전에 도전했다 포기했던 향적산 정상이 있기 때문이다. 발길을 재촉해 오른 향적산 국사봉은 말 그대로 장관이었다. 귓가의 땀을 식혀주는 시원한 바람은 덤, 말 그대로 눈이 호강하는 시간이었다. 계룡산 천황봉과 계룡시 전역, 그리고 탁 트인 논산의 논밭이 눈에 들어온 것은 물론, 정상에 올랐다는 뿌듯함이 온몸을 엄습했다.

오름이 있으면 내림이 있는 것이 삶과 등산의 원칙. 눈 안에 좋은 풍광을 담는 호사를 누린 뒤, 서둘러 하산에 나섰다. 오르락 내리락 했던 그 길을 따라 내리락 오르락 하며, 도착한 곳은 역시 무상사. 보통의 산행이었으면 다른 코스를 택해 내려왔겠지만, 향적산에서 내려오며 이곳을 택한 것은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바로 향적산 산행의 또 다른 즐거움인 무상사 옆 계곡이 주는 시원함을 느끼기 위해서다. 무상사 앞 샛길을 따라 조금만 내려가면 만날 수 있는 계곡은 발을 담그기 전부터 적잖은 시원함을 선사했다. 자연이 만들어낸 바람이 이마에 흐르는 땀을 식혀줬던 것. 신발을 벗고 물에 살짝 발을 담그니 작은 떨림과 함께 시원함이 밀려왔다. `아 이곳이 무릉도원이구나.`

시작부터 하산까지 소소한 즐거움을 전해준 향적산 산행. 사시사철 가족과 함께 등산도 즐기고 계곡에 발을 담구는 호사를 누리고 싶다면 향적산을 찾길 권한다. 산이 주는 넉넉함과 외국인 스님에게 얻는 편안함까지. 다른 곳에선 느낄 수 없는 매력이 가득하다. 글·사진=성희제 기자

<저작권자ⓒ대전일보사.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무상사
무상사
향적산 숲길
향적산 숲길

성희제
저작권자 © 대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