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청양

 장곡사는 절에 놓여진 사소한 것 하나하나가 감동을 주기도 한다. 사진은 작은 돌부처 목에 염주가 걸려있는 모습.
장곡사는 절에 놓여진 사소한 것 하나하나가 감동을 주기도 한다. 사진은 작은 돌부처 목에 염주가 걸려있는 모습.
◇여름은 당돌하다. 끝없이 비를 흩뿌리다가도 다시 맑게 갠다. 개기만 하면 다행이다. 내리쬐는 뙤약볕은 숨을 막는다. 단단한 열기와 싸우느라 온 몸의 진은 빠진다. 어느덧 비오듯 흐르는 땀이 익숙하다. 하지만 싸울 수록 가슴은 뜨거워진다. 이럴 땐 저 멀리 떠나야 한다. 불타는 도심을 벗어나야 한다. 타오르는 가슴을 식히고 전열을 가다듬어야 한다. 일상은 잠시 놓아도 좋다. 여름이라는 변덕스러운 그 이름만으로도 `내려놓음`이 용서되기 때문이다. 폐부를 꿰뚫는 습한 기운이 충만하지만, 나무로 가리워진 산기슭을 걷는 재미는 숨막히는 더위도 잊게 만든다. 충남 청양, 이름만으로도 맵고 알싸한 기운이 도는 고장의 오래된 암자는 타는 가슴을 달래기에 안성맞춤이다. 피서 전쟁이 한창인 시기의 바다는 발걸음을 부른다. 몰려든 사람들은 저마다의 열기를 내뿜는다. 바다는 시원하지만 열기는 뜨겁다. 될 수 있으면 피하고 싶었다. 바쁜 일상을 잊고 머리를 잠시 식히고 싶었다. 때문에 산으로 가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차가운 물보다는 시원한 바람을 맞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충남 청양군 대치면, 칠갑산에 위치한 `장곡사`를 찾기로 마음 먹었다.

◇노랫말처럼 작은 물병 하나, 먼지 낀 카메라를 가방 안에 넣었다. 자동차에 시동을 건 후 천천히 가속 페달을 밟았다. 에어콘은 켜지 않는다. 창문을 열고 온전히 바람만을 느끼며 달려야 한다. 콧노래를 부르며 1시간 20여 분 정도 달리다 보니 어느 새 칠갑산이다. 설레는 마음을 안고 구불구불한 산길을 따라 장곡사 초입인 장곡 주차장에 들어섰다.

여느 절이 다 그렇듯 장곡사도 칠갑산 중턱에 위치하고 있다. 등산로의 초입인 주차장임에도 불구하고 시원한 산바람이 능선을 타고 불어온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귀를 기울여 산마루에서 울어주던 산새의 소리를 들어보려 하지만 잘 들리지 않는다. 베적삼을 흠뻑 적시던 설움 많은 아낙네도 보이지 않는다. 대신 관광객들이 곳곳에서 눈에 띈다. 형형 색색의 옷을 갖춰 입었지만, 모두 표정만은 `밝음` 하나다.

잠시 서있었는데도 땀이 다시 나기 시작했다. 주차장에 있는 정자에 앉았다. 조용히 바람을 느끼고 있는데 낯익은 나무 기둥들이 눈에 들어온다. 절 초입에 마련된 `장승공원`에 세워진 장승들이다. 공원의 규모는 크지 않지만 좁은 공간에 장승이 알차게 세워져 있다. 장승들은 오만가지 표정을 짓고 있다. 손으로 깎아 모양은 투박하지만 익살맞은 표정 덕분에 생기가 돈다. 사진을 찍다보니 나도 모르게 장승의 표정을 따라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됐다. 깜짝 놀라 주변을 둘러보니 아무도 없다는 생각에 가슴을 쓸어내린다.

공원 중앙으로 들어서면 우뚝 솟은 거대한 천하대장군·지하여장군 장승을 발견할 수 있다. 두 장승은 공원의 상징이다. 색깔도 다른 것에 비해 짙고 키도 훨씬 크다. 둘 사이에는 돌로 쌓아 만든 서낭당이 아담하게 자리잡고 있다. 이들을 중심으로 고개를 돌려보면 다양한 모양의 장승이 공원을 가득 채우고 있다. 눈이 즐겁다. 천천히 걸으며 둘러보니 각 장승 앞 바닥에 만든 이의 이름이 조그맣게 표시돼 있었다. 청양에 있는 마을 곳곳에서 장승을 깎는 모양이다. 안내 표지판을 보니 대치면 한티마을과 이화리, 대치리, 동소리 등의 여러 마을들이 대보름을 전후해 장승제를 지냈다고 한다. 공원의 장승들은 그들이 만들던 것을 재현한 것이다. 잊힌 줄 알았던 전통을 여전히 이어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생각에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공원 안쪽에는 작은 관광안내소가 있다. 안내소 옆에는 거대한 통나무들이 껍질이 벗겨진 채로 곱게 누워있다. 장승이 되기 전의 모습이다. 작업중인지 얼굴 윤곽을 미리 깎아놨다. 가슴팍엔 `남북통일대장군`이라는 글귀가 쓰여있다. 벌써부터 표정이 기대된다. 나무 주변에는 톱밥이 흩날리지만 거슬리지는 않다. 장승을 만드는 현장이었던 것 같은데, 공정을 직접 볼 수 없어서 다소 아쉬웠다. 발길을 돌려 장곡사로 향했다.

칠갑산 등산로를 따라 천천히 올라갔다. 코스 이름을 보니 `솔바람길 제 2구간`이라고 한다. 코스를 따라 걷다 보면 칠갑산 전체를 돌 수 있는 모양이다. 하산하는 등산객과 일반 관광객들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다들 꽤나 많은 땀을 흘리고 있다.

휴가를 맞아 칠갑산을 찾았다는 경기도 군포의 김영호(52) 씨는 등산스틱을 잠시 내려놓고 마른 목을 축이고 있었다. 그는 "날씨가 정말 엄청나네요. 칠갑산 정상을 찍고 왔더니만 힘이 부쳐서 잠시 쉬고 있습니다. 산바람이 시원해서 정말 좋군요"라며 "보통 휴가시즌 때 바다나 계곡에서 피서를 보내려고 많이들 생각하시는데, 이렇게 좋은 산을 찾아 숲길을 걷는 것도 예상 외의 묘미가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다시 장곡사로 향한다. 가파르지 않은 경사 덕분에 걷는 맛이 좋다. 산길에 드리워진 그림자 덕분에 온도도 딱이다. 나무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이 코 끝을 스친다. 얼마 전까지 내린 비 때문인지 습한 기운이 다소나마 남아있지만 나무와 풀 냄새가 참 좋다. 멀리서 들려오는 매미 소리는 한 여름 가운데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기분이 매우 좋아졌다.

장곡주차장에서 1.2㎞를 올라가면 장곡사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다. 오래된 기운이 물씬 풍긴다. 자세한 내력은 밝혀지지 않았지만 850년에 지어진 사찰이니 나이가 대충 1200살 가까이 됐다. 오랜 시간 보수와 중건을 거듭했다고 하지만, 1000년이 넘는 긴 시간동안 한 자리에서 버티고 있었다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다.

장곡사는 일반 사찰처럼 탁 트인 넓은 부지에 지어진 것이 아니라 산의 고저차를 이용해 `층층`으로 지어져 있다. 규모는 생각보다 작다. 일반 사찰의 절반 정도 될 것같다. 특이한 것은 대웅전이 2곳으로 나뉘어 있다는 점이다. 상대웅전과 하대웅전 2곳 모두 안에 부처님을 모셔놨다. 어디서 공양을 드려야 할지 난감할 것 같다.

사찰은 작지만 곳곳에 생각지 못한 아름다움이 숨어있다. 건물 지붕마다 달려있는 물고기 모양의 풍경은 귀여울 뿐 아니라 좋은 소리도 낸다. 바람이 살짝 불 때마다 거슬리지 않는 예쁜 종소리가 들려 귀가 즐겁다. 상대웅전 옆 약수터에 놓인 작은 돌부처도 장곡사의 숨겨진 아름다움이다. 어디 그뿐이랴. 절 주변에 핀 작은 꽃 역시 마음을 행복하게 해준다. 크지 않은 소품 하나에도 기분이 좋아지는 신기한 곳이다.

장곡사의 백미는 뭐니 뭐니해도 상대웅전에 올라 바라볼 수 있는 풍경이다. 사찰 전체를 조망할 수도 있고 산 너머까지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멀리서 불어오는 바람을 맞는 것은 덤이다. 시원한 바람 탓인지 절로 자리에 앉게 된다. 가만히 앉아 새소리와 풍경소리를 들으니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 그야말로 이상적인 힐링이다. 여름은 당돌하다. 날씨는 나날이 뜨거워진다. 더위와의 사투는 한동안 계속될 전망이다. 일상에서의 스트레스는 계속해서 쌓여만 갈테다. 그렇다면 떠나야 한다. 기왕이면 몸과 마음을 함께 식힐 수 있는 곳으로. 바람이 불어오는 바로 그곳으로. 글·사진=전희진 기자

<저작권자ⓒ대전일보사.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장곡사는 국내에서 유일하게 대웅전이 2곳으로 나뉜 절이다. 상대웅전과 하대웅전 2곳 모두 안에 부처님을 모셔놨다.
장곡사는 국내에서 유일하게 대웅전이 2곳으로 나뉜 절이다. 상대웅전과 하대웅전 2곳 모두 안에 부처님을 모셔놨다.
 장곡주차장 뒷편의 '장승공원'은 주변 마을에서 만든 장승들을 세워놓은 곳이다. 공원은 작지만 다양한 표정과 모양의 장승들이 알차게 세워져 있다.
장곡주차장 뒷편의 '장승공원'은 주변 마을에서 만든 장승들을 세워놓은 곳이다. 공원은 작지만 다양한 표정과 모양의 장승들이 알차게 세워져 있다.

전희진
저작권자 © 대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