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학자가 말하는 을미년

역사학자는 항상 과거를 팔아서 현재를 이야기한다. 작년은 제1차 세계대전 100주년이자 동학농민혁명운동 120주년이라고 해서 그걸 이야기하느라 서양사학자와 한국사학자들이 바빴다.100년 전, 120년 전 사건이 지금의 사회와 엄청나게 다를텐데도 그걸 기억하라고 대중들에게 계몽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현재의 한국사회에 대해 뭔가 경고하고 격려하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2015년은 을미년이다.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2015년 1월 19일이 음력 1월 1일이니 이때부터 을미년이다. `을미년`이라고 할 때 우리에게 가장 많이 기억되는 역사적 사건은 을미사변과 을미개혁일 것이다. 둘 다 1895년에 일어난 사건이다. 요즘에는 이 두 사건이 `명성황후 시해사건`과 1894년에 시작된 `갑오개혁`의 연장으로 기억되지만 일본과의 악연 때문에 사람들은 명성황후 시해사건을 기억하는 경우가 더 많다. 우리 인간의 인식 구조는 희한하게도 어느 하나를 강력하게 기억할수록 그와 연관되어 있는 다른 하나는 망각하게 된다. 명성황후 시해사건을 기억할수록 그 반대편에 있는 사건인 을미개혁은 우리 인식 대상에서 희미하게 멀어져간다.

통상 을미개혁은 명성황후 시해사건 이후 다시 권력을 장악한 김홍집·어윤중·김윤식·유길준 등 친일적 내각이 주도하여 진행한 개혁으로 단발령, 태양력 사용이 대표적 사건이다. 그러나 을미개혁을 `을미년에 일어난 개혁`으로 확대해서 보면, 이 한 해 동안 조선왕조 5백년 동안 유지해왔던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거의 전 분야에서 경천동지할 변화가 일어났다.

정치면에서는 외부·내부·탁지부·군부·법부·학부·농상공부 등의 근대적 중앙정치체제가 만들어지고, 복잡한 행정구역 명칭이 모두 `군`으로 단일화되었다. 과거제도가 폐지됨으로써 관료 충원은 신설되는 근대적 교육기관을 졸업한 자들 또는 돈많은 자들 중에서 추천에 의해 이루어지게 되었다. 중국의 간섭과 압제로부터 벗어나 완전한 독립국이 되었음을 대내외에 천명하고 중국 연호 대신 개국기년을 쓰는 변화를 시도하였다. 사법권도 법부로 일원화되고 인신에 대한 구속과 처벌은 오로지 법부 산하의 재판소에서만 하는 변화도 나타났다.

경제면에서는 1년 전 공포한 조세 금납화 법령에 의해 쌀이나 면포·삼베 등으로 내던 조세를 화폐로 내기 시작했고, 그에 따라 신식 은화와 동화, 일본 은화와 지폐 등이 대도시 상거래에서 사용되기 시작했다. 세입·세출 등을 매년 정하고 그에 따라 조세의 신설과 세율을 정하는 근대적 예산제도도 이때 실시되었다.

사회면에서는 신분 차별적인 법제도들이 폐지되어 양반·상놈 구별이 없어졌다. 노비제 폐지 법령은 1년 전 공포되었으나 이를 뒷받침하는 법령들은 을미년부터 나오기 시작했다. 조선 왕조 500년간 금지되었던 불교 승려들의 서울 출입도 허용되었다. 양반 등 일부 신분층에게만 허용되었던 유교 경전 중심 교육에서 탈피하여 모든 국민에게 신식 학문을 가르쳐 독립국의 실질을 다지겠다는 근대적 학교들이 설립되기 시작했다. 근대적 사법을 담당할 법관을 양성하는 법관양성소, 교사를 양성하는 한성사범학교, 외교 활동에 필요한 인재를 키우는 각종 외국어학교들이 설립되었다.

아관파천에 의해 갑오·을미년에 이루어진 각종 개혁 조치들 중 일부분은 폐지되었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한 개혁 조치들은 폐지되지 않고 살아남았다. 그 성과는 1896년 이후 시작된 독립협회운동과 러일전쟁 이후의 민권·국권 운동으로 연결되었다.

이처럼 친일파 내각에 의해 진행된 급속한 개혁 조치가 아관파천과 같은 정권의 급격한 변동에도 불구하고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시대와 사회가 요구하는 흐름이었기 때문이다. 이들 개혁 조치가 서유럽의 제도를 모방한 일본의 제도를 도입한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 사회와 인민들은 이들 개혁의 필요성을 공감하고 있었던 것이다.

작년부터 공무원 연금 개혁, 부동산3법 등 각종 규제 완화, 한국사 교과서 국정화, 통합진보당 해산 등 정부에 의한 각종 `개혁`들이 진행되고 있다. 이들 `개혁`이 얼마나 살아남을 것인가는 우리 사회의 대다수가 원하는 방향이 무엇인가에 의해 결정될 것이다.

도면회 대전대 역사문화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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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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