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혁명 120주년-충청의 현장을 가다 3. 옥천지역 탐방

 옥천군 청산면 한곡리 문바위골에 마련된 동학기념공원 전경. 이곳에서 최시형은 포교활동을 비롯해 동학농민혁명 재기포령을 내렸다.  사진=최신웅 기자
옥천군 청산면 한곡리 문바위골에 마련된 동학기념공원 전경. 이곳에서 최시형은 포교활동을 비롯해 동학농민혁명 재기포령을 내렸다. 사진=최신웅 기자
120년 전의 동학농민혁명 과정에서 빼놓을 수 없는 역사적 현장 중 한 곳이 '옥천'이다. 옥천군 청산면 한곡리의 문바위골은 제2대 동학 교주 해월 최시형 선생이 머무르며 혁명을 지휘한 총사령부 역할을 했다. 동학의 기세를 만천하에 알리고 동학농민혁명의 기폭제 역할을 했던 1893년 보은 취회를 결정한 곳이라는 점에서도 상당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여러 기록에 따르면 옥천 지방에서의 동학은 창도 시기부터 유입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1893년 보은 장내리 집회 때 청산 문바위골은 동학교도의 출입이 빈번해 '작은 장안(長安:서울을 수도 또는 번화한 도시라는 뜻으로 이르는 말)'이라고 불릴 만큼 동학교도들의 출입이 빈번했다.

△작은 장안(長安) '청산 문바위골'

동학 창도 시기에 수운 최제우가 옥천 이웃 고을인 금산·진산·지례·김산 등지에 직접 포교활동을 펼쳤고 창도기에 상주 왕실촌에 피신했던 동학교도가 상주 팔음산을 넘어 보은·청산으로 넘나드는 통로였기 때문에 옥천과 청산은 일찍부터 동학교도의 왕래가 빈번했다고 채명길 명지전문대 교수는 말한다.

특히 옥천은 황간 조재벽 대접주의 관할 지역이었는데, 조재벽은 동학농민혁명 초기인 1894년 4월에는 황간·영동·옥천 지역의 동학농민군을 이끌고 금산으로 진출해 금산 장진산 싸움을 이끌만큼 투쟁적인 인물이었다.

1894년 3월 동학농민혁명을 알리는 무장기포가 일어나자 충청도에서도 산발적으로 동학교도의 활발한 움직임이 있던 것을 기록에 의해 추측할 수 있다. 저자 미상의 동학농민전쟁에 관한 자료 '동비토록'의 1894년 4월 9일자 내용을 보면 '문바위골 작은뱀골 골짜기에도 동학교도가 모여 소요를 벌였다'고 적혀 있다.

하지만 무엇보다 문바위골이 동학농민혁명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청일전쟁을 통해 본격적으로 야욕을 드러낸 일본의 침략의도를 막아내고 만민평등의 세상을 이루기 위해 동학농민군이 다시 한 번 전국적으로 봉기하는 2차 기포를 결정한 곳이라는 것이다. 1894년 9월 18일, 문바위골에 머물던 최시형은 동학 지도자들을 모아놓고 무력 봉기를 선언했다. 선언 이후 즉각적으로 전국의 동학농민군이 장내리와 청산 문바위로 모여들었다. '충청·경상·경기·강원 지역에서 온 동학농민군들은 전라도 동학농민군과 논산에서 합류하러 갈 때까지 문바위골에서 군사 훈련을 했다고 전해진다.

△1만 동학농민군의 함성이 울려 퍼진 '증약대전(增若大戰)'

제2차 동학농민혁명이 한창이던 1894년 10월 29일, 옥천군 군북면 증약리 일대인 마달령·환산·식장산의 산간 협곡에서 북접 동학군 1만 여명이 옥천을 출발해 회덕(대전)방면으로 북진중 이었다. 이를 목격한 일본군 후비보병 연대 19대대 3중대 지대와 조선군 교도중대는 동학농민군을 포위 공격해 동학군 110명을 살상하게 된다. 이후 일본군은 증약지역에서 머무르며 동학농민군 소탕작전을 펼치게 된다. 그 당시 일본 교도중대장이 기록한 '동학란'에 따르면 "동학군 약 6만 여명이 옥천에 모여 있고 일본병 2개 소대급이 선발대로 그저께 증약역에 진치고 주둔하고 있다"고 기록돼 있다. 동학농민군은 증약 전투에서 많은 살상자를 냈지만 증약에서 접전을 치른 동학농민군은 북상해 문의를 거쳐 청주방면으로 행군해 일본군 지대를 격파하는 성과를 올리게 된다.

증약 전투가 동학농민혁명에서 지니고 있는 의미는 공주 우금치에서 합류하려 했던 일본군과 관군의 계획에 타격을 입혔다는 데 있다. 당시 북접 동학농민군이 최시형 교주가 청산 소사동에서 재기포 명령을 내린 이후 공주 우금치전투 공방전에 앞서 일본 중로군 3중대가 우금치 전투를 위해 관군과 합세하는 것을 막아냈던 것이다. 또 충청 동남부지역의 동학군 주요근거지의 공격을 지연하고 지역에 잔류한 동학농민군을 보존하게 하는 주요한 역할을 한 접전으로 그 역사적인 의의가 크다고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증약 전투에 참전한 동학농민군이 1만여 명이며 옥천읍내에 5만-6만 명의 북접 동학군이 대거 집결했다는 사실은 동학농민혁명 과정에서 주목할 만한 대규모 전투라고 할 수 있다. 증약 전투 이후 청산 석성리에서 3만 명의 동학농민군과 일본군 3중대 및 관군이 대접전을 치르기도 했다. 청산현 석성리는 포전리(거포리)와 접경지로 1894년 3월 김연국 대접주 집에서 최시형 등 동학수뇌부가 최제우 교주의 조난예식을 치르고 보은집회를 결정한 의미가 깊은 곳이다.

당시 교도대 대관이었던 이겸재가 "11월 5일 청산 석성리에서 동학농민군 수만명과 접전해 40명을 포살하고, 8일에는 옥천 양산장에서 수천 명과 접전해 50명을 포살했다"고 한 기록으로 볼 때 당시 싸움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최신웅 기자

도움말=충북학연구소·옥천향토전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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