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일보·천주교 대전교구 공동기획 충청의 순례길을 걷다 3 내포 천주교 순례길 下

해미읍성 안의 동헌. 현감이 업무를 보던 곳이다.
해미읍성 안의 동헌. 현감이 업무를 보던 곳이다.
`내포 천주교 순례길`은 총 길이가 50km이고 그 중간 정도에 신리 성지가 있다. 신리 성지를 빠져 나와 오랜 시간 걸으면 한티고개에 도착한다. 한티고개는 그리 높지 않다. 덕산에서 시작해 약 900m를 올라가면 된다. 이곳은 예산, 홍성, 아산 등 내포 지역 신자들이 해미읍성으로 압송당할 때 넘던 고개다. 신자들은 한티고개를 넘으면서 시시각각 다가오는 죽음을 느껴야만 했다.

해미현은 `해뫼`라고도 불렸다. 본래 해미는 `정해현`과 `여미현` 두 고을이 병합할 때 중간 글자를 따서 붙인 이름이다. 신자들은 탄생과 시작의 의미가 강한 `솔뫼`와 비슷하게, 마지막의 의미가 강한 해미를 `해뫼`라고 불렀다.

해미현은 내포지역에서 유일하게 진영(조선 시대 군사적으로 중요한 지점에 둔 군영)이 있던 군사적 요충지였다. 진영에는 1400-1500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는 무관이 현감을 겸했다. 당시 해미 관아는 충청도를 넘어 경기도 평택까지 이르는 광활한 지역을 관할했다. 때문에 신자들이 체포되면 모두 해미읍성으로 끌려왔다. 박해 때문에 해미읍성의 큰 감옥 두 곳은 신자들로 항상 북적거렸다고 전해진다. 내포 여기저기서 끌려와 한티고개를 넘은 신자들이다. 해미읍성에서 갖은 고초를 겪은 후 향하는 곳이 해미순교 성지다.

해미읍성 정문은 15일까지 공사가 한창이기 때문에 동문으로 돌아 들어가야 한다. 성벽을 둘러싼 돌벽은 견고하다. 신자들이 감히 빠져나오기 어려운 높이다. 읍성 안은 넓고 가장 안쪽에는 동헌이 있다. 동헌은 해미현의 수장인 현감이 업무를 보던 곳이다. 박해시절 천주교 신자들의 목숨을 쥐고있던 결정권자였다. 그리고 신자들은 수없이 죽어나갔다.

서슬퍼런 곳이었던 해미읍성은 지금은 온 가족이 찾는 공원이 됐다. 평일 오후였음에도 가족단위 관람객이 삼삼오오 돌아다니고 있었다.

해미읍성 서문부터 성지까지 이어지는 길은 고문 당하고 성지로 죽음을 맞이하러 가는 순교자들이 걸었던 길이다. 성지쪽으로 향하다 보면 특이한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십자가의 길을 해미 시내 안에 재현해 놓은 것이다. 해미성지의 백성수 신부는 "시내에 십자가의 길을 만들어 놓은 것은 우리나라에서는 해미면이 최초"라고 말했다.

해미순교성지는 일제 강점기였던 1935년 4월 프랑스인인 서산성당 범 베드로 주임신부가 발굴했다. 범 신부는 순교자들의 유해와 유품 등을 30리 밖 상홍리 공소에 임시 안장했다. 1950년대에는 해미성지 신자들이 식량을 절약해 1800여 평을 확보하고 공소 강당을 세웠다. 1975년에 지금의 순교탑이 세워지며 성지로서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렸다. 하지만 1982년 정부는 문화재 관리 정책 명목으로 공소 강당을 철거했다. 신자들에게 성지 터 일부를 보상하고 순교 기념비만 세웠다. 해미성지는 1986년 해미 성당이 건립되며 오늘에 이른다.

해미진영은 뛰어나다고 할 만한 전공을 기록하지 못했다. 1790년대부터 1880년대 까지 100여년 동안 천주교 신자들을 대량으로 처형한 기록만 남겼을 뿐이다. 당시는 사학을 징벌한다는 정책 때문에 1801년 신유박해, 1839년 기해박해, 1846년 병오박해, 1866년 병인박해 등 천주교 역사에서 대박해의 시기로 기록된 사건들이 많았다. 하지만 조정이 천주교 탄압을 공식화 했을 때가 아니라도 해미 진영은 지속적으로 내포 지방의 천주교 신자들을 잡아 죽였다. 수없이 많은 신자들을 고문하고 다양한 방법으로 처형했다. 심지어 신자들을 생매장하기까지 했다. 그곳이 지금의 순교성지가 있는 여숫골이다. 여숫골은 `예수 마리아`를 부르는 신자들을 `여수머리`라 알아듣던 주민들이 붙인 이름이다.

교황 방문 때 복자가 되는 인언민 마르티노 등 3명이 해미 출신이다. 인언민 마르티노는 1797년에 단행된 정사박해 때문에 1800년 1월에 숨진 해미의 첫 순교자다. 이들과 달리 순교자 대부분은 알려지지 않은 서민이었다. 관아는 사회적 신분이 낮은 서민들을 죽이기만 했을 뿐 그들의 기록조차 남기지 않았다. 당시 순교한 사람들 중 이름과 출신지가 불확실한 신자가 많은 이유는 홍주와 공주 등 상급 고을로 이송되지 않은 사람들 때문이다. 상급 고을의 기록에는 순교자들의 이송 사실과 이름 등이 남겨져 있다. 이송된 순교자들은 해미 현감의 독자적인 처형이 사후에 문책거리가 될 만한 신분의 사람들이었다.

현재는 신원이 밝혀진 132명 외에 모두 무명 순교자로 처리된 상황이다. 성지 주변에는 아직까지도 찾지 못한 수많은 무명 순교자들이 잠들어있다. 백성수 신부는 "이 주변을 발굴하면 얼마든지 순교자들의 유해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라며 "인언민 마르티노 등 3인의 시복으로 무명 순교자들이 조금이나마 위로받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전희진 기자

<저작권자ⓒ대전일보사.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해미성지 성모상.
해미성지 성모상.
해미순교성지는 아직도 발견되지 못한 수많은 신
자들이 잠들어있는 곳이다. 사진은 해미순교성지
입구에서 바라본 전경. 전희진 기자
해미순교성지는 아직도 발견되지 못한 수많은 신 자들이 잠들어있는 곳이다. 사진은 해미순교성지 입구에서 바라본 전경. 전희진 기자

전희진
저작권자 © 대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