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권 천주교 성지 순례길

"쿼바디스 도미네(Domine, quo vadis)?"

라틴어로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라는 뜻의 이 구절은 성경 사도행전 외경에 나온다. 천주교 신자들에 대한 로마의 박해가 시작돼 신자들이 죽음을 당하는 상황에서 초대 교황인 베드로 역시 순교를 하려고 하지만 신자들이 만류한다. 그래서 도망을 가던 베드로는 십자가를 지고 걸어오는 예수를 만나게 된다. 베드로가 예수에게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라고 묻자 예수는 `네가 내 양들을 버리고 가니 내가 다시 한 번 십자가에 못박히러 간다`라고 말한다. 그 말을 듣고 베드로는 로마로 가 순교를 하게 된다.

종교에 있어 순교는 최고의 영광이라고 할 수 있다. 250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는 한국 천주교는 다름 아닌 순교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당시 조선 조정은 천주교 신자들을 체제를 위협하는 사학의 무리라 매도하며 가혹하게 탄압했다. 특히 충청도 지역에는 초대 천주교 사제인 김대건 신부를 비롯해 최양업 신부 등 정신적 지도자들이 많이 배출된 곳이며 신자들이 지리적 여건을 이용해 곳곳에 교우촌을 형성했기 때문에 가장 많은 순교의 피를 뿌린 지역이기도 하다. 때문에 순교 성지도 많고 이 성지들을 잇는 순례길도 여럿 조성돼 있다. 그중에서 김대건 신부의 성지를 잇는 `버그내 순례길`과 충북의 `베론 성지 순례길`을 소개한다.

◇버그내 순례길=당진에 위치한 버그내 순례길은 김대건 신부의 생가지인 솔뫼성지와 충남교구의 탄생배경이 되는 합덕성당, 조선 5대 교구장인 다블뤼 주교관이 위치한 신리성지를 잇는 13.3㎞의 길을 말한다. 아산만 일대의 `내포` 지방은 바닷물이 육지 깊숙이 들어와 많은 포구를 이루고 있다. 배들이 순조롭게 드나들며 새로운 문물을 전해주기에 적당한 입지였다. 그래서 서학 혹은 천주교 문화와 신앙을 일찍부터 접하고 있었다. 우리나라에 천주교가 도입되기 시작한 초기부터 전파가 시작된 곳이 내포 땅이다. 그 연유로 1791년 신해박해 이후 1868년 무진박해 때까지 수많은 순교자가 생겼다.

`버그내`란 합덕읍내를 거쳐 삽교천으로 흘러드는 물길 이름이면서, 조선말 천주교 신자들이 비밀리에 만나던 장소인 합덕장터의 옛 지명이다. 버그내 순례길의 출발지인 솔뫼성지에는 소나무 우거진 동산 옆에 김대건이 10살 무렵까지 살았던 생가 터가 있다. 김대건의 해미에서 순교한 증조부 김진후, 대구에서 순교한 작은할아버지 김종한, 서울 새남터에서 순교한 아버지 김제준, 그리고 역시 새남터에서 순교한 김대건 신부까지 4대에 걸친 순교자가 살았던 집이다. 1906년 순교 60돌을 맞아 주민들의 증언을 통해 생가 터를 확인한 뒤, 1946년 순교 100돌을 기념해 생가를 복원하고 성지로 조성했다.

신자들이 남의 눈을 피해 만나 안부를 묻고 정보를 나누며 신심을 다지던, 합덕읍내 버그내 장터에선 지금도 닷새마다 합덕장(1, 6일장)이 열린다. 읍내에서 남쪽으로 합덕삼거리 지나면, 합덕의 지명이 유래한 합덕방죽 옆 언덕에 합덕성당이 나온다. 붉은 벽돌을 지은 고딕 양식의 아름다운 건물이다. 예산에 있던 양촌성당이 옮겨온 뒤 한옥으로 지었던 것을 페랭(백문필) 신부가 1929년 새로 지은 것이다. 전면에 세워진 2개의 종탑이, 최근 지은 것처럼 깨끗하고 탄탄한 건물 외관을 돋보이게 한다.

◇배론 성지 순례길=심산 유곡(深山幽谷). 계곡이 깊어 배 밑 바닥 같다고 하여 `배론`이라 불린다. 충북 제천군 봉양면 구학2리, 백운산(해발 1087미터)과 구학산(해발 985미터)연봉 사이로 십여리를 들어간 곳에는 계곡만큼이나 깊은 신앙의 터가 펼쳐진다.

배론의 옹기 토굴에서는 명주 자락에 1만 3311자로 울분과 신심을 기록한 `황사영 백서`가 쓰여졌고, 바로 옆의 쓰러져 가는 초가에서는 이 땅 최초의 서구식 대학인 신학당이 섰으며, 김대건 신부에 이어 한국인으로는 두 번째 신부였던 최양업 신부가 이곳 배론에 묻혀 있는 것이다. 그 옛날 교우들은 박해를 피해 산으로 계곡으로 깊이 숨어 들어야 했다. 그들 중 일부가 모여들어 교우촌을 이룬 곳이 바로 배론이다. 졸지에 재산과 집을 잃고 가족과 생이별을 한 교우들이 깊은 산 속에서 가장 손쉽게 할 수 있는 것이 옹기 굽는 일이었다.

배론의 두 번째 신앙 유산은 백서 사건 후 55년 뒤, 1856년 설립된 최초의 신학교다. 깊은 산골 장주기의 집에 세워진 신학당에는 학생 열 명에 두 신부가 있었다. 그로부터 10년 후 1866년 병인박해로 인해 배론에서도 집주인이었던 장주기와 두 선교사 신부가 잡혀가 형장의 이슬이 됐다. 그리고 목자 잃은 양 떼처럼 신학당 역시 폐쇄 되고 만다.

배론이 안고 있는 또 하나의 귀중한 유산은 최양업 신부의 묘소다. 한국 최초의 신부인 김대건 신부보다 4년 늦게 사제품을 받고 12년간 조국에서 사목 활동을 하던 최 신부는 피로와 무리한 활동에 지쳐 쓰러져 이곳 배론의 신학당 뒷산에 묻힌 것이다. 혹자는 김대건 신부를 `피의 순교자`라 부르고 최양업 신부를 `땀의 순교자`라고 일컬을 만큼 최 신부의 업적에 대한 높은 평가가 새롭게 이루어지고 있다. 또 한 가지 기억할 만한 것으로 원주에서 제천 쪽으로 가는 길에 있는 용소막 성당은 배론 순례길에 반드시 들러야 하는 장소다. 최신웅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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