⑫ 운하의 역사

 충남 태안군 태안읍 인평리와 서산시 팔봉면 어송리 사이에 위치한 굴포운하 터.
충남 태안군 태안읍 인평리와 서산시 팔봉면 어송리 사이에 위치한 굴포운하 터.
충남도청이 80년간 대전시대를 마감하고, 홍성·예산의 내포신도시로 둥지를 옮기면서 내포의 정체성을 궁금해 하는 사람들이 많다. 눈 여겨 볼 점은 내포는 그 자체로 정체성이다. 내포의 한자는 안 내(內), 물가 포(浦)를 쓰는데 내륙 깊이 들어온 물이라는 뜻을 갖는다. 내포를 그대로 붙여 쓰면 다른 의미도 있다. 바로 안개다. 물이 내륙 깊이 들어왔으니 유난히 안개가 많은 것도 이유가 있다.

내포지역은 조선시대 세금을 운송하는 뱃길, 즉 조운로가 일찌감치 발달했다. 경상, 전라, 충청의 삼남의 세금은 반드시 내포를 거쳐갔다. 이 중 충청도 관할 구역은 '당진 원산도(현 보령시)-해미 안흥정상구미포(현 태안군 근흥면 정죽리 옛 안흥항)-태안 서근포(태안군 소근진성)-보령 난지도(당진군 난지도)'였다.

이 가운데 태안반도의 돌출부는 늘 안전사고가 잇따르는 지역이었다. 물살이 거칠고 암초까지 많아 조운선이 파선하는 경우가 많았다. 서산시 대산읍 독곶리 황금산에서 보령시 오천면 원산도까지의 뱃길은 육지와 섬 사이나 섬과 섬 사이를 지나야 했다.

특히 가장 험난한 바닷길은 태안군 근흥면 신진도와 마도를 거쳐 관수각과 가의도에 이르는 해역인 안흥량이었다. 이곳에서 난파됐거나 침몰된 선박수는 무려 200척, 인명 피해가 1200여 명, 미곡 손실이 1만 5800석이나 된다. 비공식적으로는 훨씬 많다. 고려와 조선 등 위정자들의 관심도 높아졌다. 세금을 거둬야 하는 조운로에 자연이 몽니를 부리니 대책 마련에 부심했던 것도 당연했다. 그러다 눈에 들어온 게 좌우로 바다가 보이는 좁은 육지다. 이곳을 뚫으면 조운선이 안전하게 수도 한양으로 올라올 수 있었다. 그래서 탄생한 게 내포 지역의 운하다.

◇땅만 530여 년을 판 '굴포 운하'=험난한 안흥량을 피하기 위한 굴포 운하 건설은 1134년부터 시작됐다. 1134년 안흥정 아래 소대현의 경계지점에 개천을 파 뱃길을 내자는 의견에 내시 정습명을 보내 근처 마을 사람 수천 명을 동원해 공사가 시작됐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4㎞를 팠지만 끝내 마무리하지 못했다. 그 뒤 약 150년이 지나 굴포운하 공사가 다시 시작됐다. 공양왕 3년 왕강이 태안과 서주(서산)의 경계에 있는 탄포에서 공사를 재개했다. 당시 4㎞정도 공사가 진행됐지만 지하 암반과 밀물, 썰물에 밀려온 흙과 모래 때문에 결국 또 한번의 실패로 이어졌다.

굴착 사업은 조선조에도 이어졌다. 태조는 1395년과 1397년 최유경과 남은을 파견해 살폈다. 두터운 암반층은 또다시 공사를 접게 했다. 태종 12년(1412년) 새로운 운하 건설 방법이 고안되면서 운하사업은 다시 추진됐다. 태종의 총애를 받던 하륜(河崙)이 고려 때의 난공사 구역을 '갑문식(閘門式)'형태로 처리하면 된다며 운하 건설을 강력히 주장했다. 갑문식은 지형의 높낮이에 따라 제방을 쌓고 물을 가두었다가 제방마다 작은 배를 두어 둑 안에서 화물을 옮겨 싣는 방법으로 기존의 배로 화물을 운반하는 관수식(灌水式)과는 다른 방법이었다. 당시 하륜은 "갑문식 형태로 운하공사를 마무리하면 안흥량에서 조운선이 전복되는 근심을 면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태종 13년(1413년) 2개월도 안되는 기간에 인근 마을사람 5000명을 동원해 운하가 준공되기는 했지만 운하로서의 기능을 발휘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저수지의 규모가 작아 배를 몇 척밖에 대지 못했고, 북쪽은 저수지 안에 암석이 가로놓여 있어 큰 배가 지나다니지 못했다. 완공 기록에는 "쓸데없이 백성들의 힘만 낭비했을 뿐 조운에 도움이 되지 못하였다"고 쓰여있을 정도였다.

◇개미목 운하와 안면도 운하=조선 중종조 굴포 운하 공사가 재개됐다. 당시 삼도체찰사인 고형산은 굴포 인근 그림 2장을 임금에게 올린다. 이는 이전과는 다른 '개미목'으로 운하 공사 지점이 옮겨지게 된 계기가 됐다. 하지만 3000여 명이 동원돼 4개월에 걸쳐 공사가 진행됐지만 결국 성공하지 못했다. 개미목 운하는 13년 후 중종 30년(1535) 다시 수면위로 떠오른다. 지난 시절 여러 차례 굴포 운하가 실패해 이번에는 꼭 성공시키고자 공사에 박차를 가했다. 마침내 중종 31년(1536) 11월 호조의 주관으로 승려들을 동원해 개미목 운하 공사가 시작돼 중종 32년 7월 완료됐지만 역시 준공 후 흙과 모래로 지역이 메워져 실패하고 말았다.

굴포운하와 개미목 운하의 잇따른 실패로 본래 육지였던 안면도를 중심으로 운하를 건설하자는 발상이 제기됐다. 1808년 '만기요람'(萬機要覽)에는 인조(1623-1649)때 태안의 아전 방경잠이 충청감영에 안면도와 태안군 남면 사이를 끊어 운하를 건설하자고 제의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결국 안면도 운하가 건설되면서 안전하게 세곡선을 운행할 수 있었고, 수로의 길이도 많이 짧아진다. 안면내해를 이용하면 홍주목을 비롯한 천수만 지역 군현의 조운선은 예전보다 80㎞ 정도 거리를 단축할 수 있었다.

◇육운을 위한 창고 건립=안흥 앞바다에서 배가 자주 침몰하고 조운선이 난파당하면서 하루빨리 운하를 굴착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졌다. 1669년 1월 송시열은 물길이 순한 곳을 택해 창고를 설치하고 태안반도를 육로로 횡단한 후 다시 선박에 실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에 같은 해 2월 안민창사목이 제정되고 3월 창고 건립공사가 착공됐다. 하지만 이 방법도 육로를 통한 세곡의 운반이 시작되면서 금방 중단된 것으로 보인다.

한양으로 향하는 조운선의 길목에 태안반도 안흥량이 자리잡고 있어 한양을 향하는 배들을 괴롭혔다. 이에 고려시대부터 이 지역을 피하기 위한 굴포운하 공사가 왕실주도로 진행됐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자연이 만들어놓은 물길을 바꾸는 것이 얼마만큼 어려운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강보람 기자 boram@daejo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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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몇번의 실패 끝에 완공된 굴포운하는 세곡 운반거리를 단축시키는 등 상당한 기여를 했다. 사진은 대동여지도에 표시된 굴포운하 위치(원 부분).
몇번의 실패 끝에 완공된 굴포운하는 세곡 운반거리를 단축시키는 등 상당한 기여를 했다. 사진은 대동여지도에 표시된 굴포운하 위치(원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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