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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련으로 단련 위기는 정면돌파"

2013-02-01기사 편집 2013-01-31 21:3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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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성 CEO를 만나다 - 최애희 드리미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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왈가닥으로 소녀시절을 보냈던 철없던 한 여성이 어엿한 CEO로 변신했다.

충남 아산 인주의 한 시골마을에서 LCD, 반도체장비 전기제어장치, LED조명등을 생산하는 (주)드리미 최애희(40·사진) 사장. 최 사장은 창사 10년을 맞아 또 다른 꿈을 향해 도전하고 있다. 그의 집무실 벽면에는 '미치지 않으면 미치지 못한다'는 '불광불급(不狂不及)' 네 글자가 걸려 있다. 미치도록 덤벼들어야 무언가를 이룰 수 있다는 신념이 담겨 있다고 한다.

억척 CEO로 변신한 그는 소녀시절 별명이 '쌈닭'이었다. 충북 옥천에서 자란 그는 하루가 멀다 하고 패싸움에 가담했을 정도로 공부는 뒷전이었다. 말썽을 보다 못한 아버지는 급기야 대전의 여고로 진학시켰다. 하지만 조금씩 공부에 흥미를 갖기 시작한 뒤 달라졌다. 대학 때는 장학생으로 다녔다.

지금의 그가 있기까지 그를 단련시킨 것은 어쩌면 끝없는 도전과 승부욕 기질이다. 한때 골프에도 미쳤었다고 한다. 골프를 배운 지 두 달도 안돼 100타를 쳤을 정도다.

드리미가 성장하기까지는 친구와 선배라는 든든한 멘토가 있었다.경험이 회사의 밑천이라고 그는 믿는다. 그는 회사를 설립하면서 같은 계통에 근무하던 선배 앞으로 진로를 상의하는 한통의 이 메일을 보냈다. 서른에 회사를 차릴 나이는 아닌데 어떻게 했으면 좋겠냐고 물었다. 아직 나이가 어리고 사업할 자금도 부족했던 그 였다. 선배로부터 돌아온 답장은 "회사 이름을 '드리미'라고 지으면 좋을 것 같다"는 한마디였다. '드리미'는 꿈을 의미하는 영어 단어 드림(Dream)과 도우미의 합성어로 '기업을 하면서 많은 사람들의 꿈을 도와주라'고 했다. 그의 가능성을 믿어줬다.

네 명의 멤버로 초창기에는 인터넷 홈페이지 제작과 전자결제 시스템 개발을 시작했다.

하지만 1-2년 사이 소프트웨어 업계의 과잉으로 한계에 직면했다. 소프트웨어 업계 시장이 비대해졌던 것이다. 그러던 중 그 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일 만큼은 성실함으로 인정받았던 그였다. 국내 한 대기업 간부의 추천으로 세계적 진공장비 회사인 일본 '알박'의 한 임원을 만나게 되면서 회사는 LCD, 반도체, LED 등 전장제품이라는 새로운 활로를 찾게된다. 그렇지만 알박이 원하는 제품을 만들기에는 자금이 턱없이 모자랐다. 자본금이 고작 1억 원이었는데 장비가격만 5억 원이 넘었다.

"제가 가장인데 식구들을 굶겨 죽일 수 없다"며 회사에서 돈을 받지 않고 일을 하겠다는 각서를 썼다. 그의 배짱은 통했다. 알박은 그에게 기회를 줬다. 그에게 알박의 엔지니어 4명과 장비를 지원했다. 반드시 장비의 표준화를 시키겠다고 약속했다.

훗날 그가 회사를 안정화 시킨 뒤 알박을 찾아가 각서를 돌려달라고 했는데, 회사 간부는 다음날 찢어버렸다고 한다. 그의 가능성을 먼저 보았던 것이다.

알박과 거래를 트게 된 것은 품질을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매출이 1억 원 남짓이었던 2004년 3억 원짜리 장비를 턴키로 수주할 정도로 드리미의 품질력은 남달랐다. 알박과 거래를 하면서 2006년에는 35억 원의 매출을 기록하고 미국과 일본, 대만, 한국 등 알박그룹 전체에서 품질 대상을 받을 정도로 인정받았다.

그가 사업을 안정화 시키기까지 시련은 성공의 어머니였다.

2006년 아산 인주에 공장을 세우기 전까지 1년 동안 무려 7번이나 이사를 해야 했다. 그에게 임대로 입주하기로 하고 치렀던 아산 신창공장 준공식은 기억하고 싶지 않은 사건이다. 각계 인사와 지인, 시청 공무원들까지 초청해 준공식을 갖던 날, 공장이 다른 사람에게 넘어갔다는 소식을 전해들었다.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허름한 창고 생활을 하는 동안 그의 소박한 꿈은 깨끗한 화장실과 에어컨 있는 공장을 갖는 것 이었다. 어느 정도 회사가 안정을 찾았다고 생각했지만 그에게 시련은 그치지 않았다. 2007년에는 반도체 가격이 급락하고 거래하던 국내 반도체회사의 부도로 막대한 빚을 졌다. 심각한 자금난도 닥쳐왔다. 그때마다 그는 극복할 수 있다며 자신을 채찍질했다.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여자들이 하는 게 다 그렇지"라는 말을 듣는 게 죽기 보다 싫었다.

그는 빚을 얻어 월급을 줬다. 반드시 일어서리라고 다짐했다. 좌절은 그녀를 단련 시켰다.

그는 집과 차를 처분하고 경차 마티즈를 타고 다녔다. "빈손으로 시작했는데 더 이상 망해 봤자 지"라며 자신에게 주문을 걸었다. 2008년 그는 드디어 첫 번째 꿈을 이뤘다. 100억 원의 매출을 올리면서 드리미의 성공 드라마를 썼다.

그에게 시련은 진행형이다. 매출이 해마다 요동치고 지난해에는 절반으로 급감했다. 그는 회사의 경영 안정을 위해 생산품을 다양화하기로 했다. LED 조명 제작이라는 새로운 카드를 빼 들었다.

지난 2011년 그는 골프공에 맞아 병원 치료 중 병실에서 TV를 보다 우연히 LED가 눈에 들어왔다. 회사에 돌아오자마자 기술개발에 착수했다. 그로부터 불과 1년여 LED 제품 개발에 매달린 끝에 조달청에 제품 등록이라는 기염을 토했다.

그는 "여성기업인의 성공 롤 모델이 되어야 한다는 부담감에서 벗어나 변화와 혁신으로 도전하는 한 기업인으로 봐달라"고 말한다.

이찬선 기자 lcs70@daejo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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