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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만 들어가면 눈물흘렸던 울보 박용래 시인

2012-11-26기사 편집 2012-11-25 21: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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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대표문인 발자취를 따라서- ① 박용래 시인

첨부사진1대전 지역의 대표적인 향토 문학가인 박용래 시인은 자연주의적 서정시 세계를 개척하는데 큰 영향을 미쳤다.
12월 27일에 개관하는 대전문학관에 상설전시되는 대전의 대표문인은 모두 5명이다. 눈물의 시인으로 불리는 박용래, 충청시단의 선구자로 평가 받는 정훈 시인, 둑길의 시인 한성기, 의연한 선비 소설가 권선근, 50년대 한국문단의 대표 작가로 불리는 최상규 등이 그 주인공이다. 본보는 문학관 개관에 맞춰 이들 향토문인들의 삶과 작품세계를 5회에 걸쳐 시리즈로 엮는다.



◇눈물의 시인=그는 울보였다. 술에 취하기만 하면 그리운 사람들의 이름을 부르며 눈물을 흘렸고 전국 각지의 벗들이 대전으로 몰려와 술 한 잔씩 걸치고 돌아갈 때면 눈물 콧물로 붙들며 아쉬움을 표하기 일쑤였다.

'눈물의 시인' 박용래. 충청 지역의 대표적인 향토시인이자 한국 문단의 대표적 서정시인으로 후배 시인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친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박 시인은 1925년 음력 정월 14일, 충청남도 논산군 강경면 중앙동에서 밀양 박씨 가문의 3남 1녀 중 늦동이 막내로 태어났다.

강경 중앙보통학교와 강영 상업학교를 나온 박 시인은 학창시절 톨스토이,도스토옙스키를 읽어대는 문학소년이었다. 하지만 그 즈음 읍내 황산교 너머로 출가했던 홍래 누이가 초산의 산고로 사망함에 따라 충격으로 삶에 회의를 품기 시작했고 내성적이고 우울한 성격으로 변했다.

1943년 강경상고를 수석으로 졸업한 그는 조선은행에 취직한다. 하지만 그 자리를 적성이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박차고 나온 것은 해방 직전, 징용으로 끌려갈 위기를 가까스로 넘긴 박 시인은 1945년 해방을 맞아 은행으로 돌아가지 않고 김소운의 수필에 홀려서 1946년 일본에서 귀국한 그를 만나 문학을 배운다. 그 뒤 향토문인들과 '동백시인회'를 조직해 동인지 '동백'을 간행하면서 시를 발표하기 시작한다.

1955년 국어과 준교사 자격을 취득한 그는 대전철도학교 교사로 취임하고 중매로 만난 간호사 이태준과 결혼을 한다. 또 박두진 시인에 의해 '현대문학'에 '가을의 노래'가 추천을 받고 1956년 '황토길', '땅'이 추천을 받아 시인으로 등단하게 된다. 이후 대전의 대표적인 문인사랑방의 역할을 한 오류동 17-15번지로 정착한다.

1969년 첫 시집 '싸락눈'이 출간되고 시 '저녁눈'으로 '현대시학사' 제정 제1회 작품상을 수상한다. 이후 10여 년간 별 다른 직업 없이 술을 벗 삼아 시작 활동에 매진하던 박 시인은 1980년 7월 교통사고로 입원을 하게 되고 그 해 11월 21일 심장마비로 작고하게 된다. 사후 '한국문학' 제정 제7회 한국문학작가상을 수상했으며 1984년 10월 27일 대전 보문산 사정공원에 '박용래시비'가 세워지고 대전일보 박용래 문학상이 제정된다.

◇맑은 영혼의 서정이 빚어낸 슬픔의 세계=박 시인은 대전 지역의 대표적인 향토시인으로서 '눈물의 시인'이라 불릴 만큼 자연주의적 서정 세계를 개척하여 1950년대 전, 후 허무주의와 감각주의를 극복하는데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한국적 서정시의 원점에서 조금도 비껴 서지 않고 일관되게 자신의 시세계를 진전시켜나갔다. 반문명, 반사회, 반현실적인 것 들을 시적 기반으로 삼고 자연과 생명에 대한 연민과 공감을 형상화 하는데 주력했다.

박 시인의 시적 성향이 생명과 연민인 것은 어린 시절에 타계한 누이의 죽음, 식민지 말기의 강제징집, 해방 이후의 소용돌이와 한국전쟁의 체험들에 기인한다.

시의 형식면에서 볼 때 시인의 시는 주로 시각적, 청각적 비유에 의지해 단조로운 톤을 활용하여 간명하고 섬세한 묘사를 즐겼다. 동양적 여백의 미를 추구하여 짧은 시행, 반복과 병렬구조, 전통적인 민요조 리듬, 명사나 명사형 어미 등을 주로 사용했다.

간결하면서도 응축적인 구어를 사용해 깊은 서정적 여운을 느끼게 하는 것이 박 시인의 시가 지닌 큰 특징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대표작 '저녁눈', '구절초', '황토길', '담장', '겨울밤', '오류동의 동전' 등에서 이러한 점을 확인할 수 있다.

박 시인은 고향의 정서를 근대적 의미로서의 인간성이 배제된 사물의 이미지화를 통해 표출했다. 겨울밤, 꽃물, 밭머리에 서서 등을 통해 따뜻한 인간미를 배제한 채 근대화되기 이전의 고향풍경을 관조하듯 형상화했다.

그의 작품 '겨울밤'은 가슴 아프고 슬픈 사연을 지닌 고향집에 대한 추억이 녹아있는 작품으로 시인의 시적 성향을 한 눈에 알아 볼 수 있다.

◇결코 떠날 수 없던 곳 대전, 오류동=술을 좋아했던 박 시인은 대전의 거리를 누비며 술을 마셨다. 하지만 번화가는 피해 변두리 쓸쓸한 노동자들이 찾는 대폿집 같은 곳만 골라, 한 달이고 일 년이고 두루 누볐다.

대전 중구 오류동 149-12번지. 박 시인이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살던 집이다. 박 시인이 20여 년간 거주했던 이 집은 현재 중구 소유의 공영주차장으로 바뀌어 자취를 찾아 볼 수 없고 쓸쓸한 집터비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박 시인이 이곳에 살 때 집은 그야말로 한국의 내로라 하는 대표 문인들이 대전을 들르면 꼭 들렀다 가는 곳이기도 했다. 대표문인들 뿐만 아니라 무명의 예술가들도 집에 들러 인심 좋았던 박 시인의 술대접을 받고 돌아가고는 했다.

박목월, 박두진, 이동주, 고은 시인뿐만 아니라 도예가 이종수, 조각가 최종태 등 많은 이들이 술잔을 기울이며 문학과 예술을 논했다. 박 시인의 둘째 딸 박연씨의 기억에 의하면 박목월 시인이 집에 들를 때면 항상 돼지고기를 손에 들고 왔던 기억을 회상하기도 했다. 대전의 '문화사랑방' 역할을 톡톡히 했던 오류동 집에서 1980년 늦가을, 박 시인은 가족과 전국에서 몰려든 예술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임종을 맞이한다. 그의 나이 55세였다.

시인 고은은 자신의 시집 '만인보'에서 '어느 날 박용래'란 시를 통해 마음을 통했던 벗이었던 박 시인과 함께 했던 추억 한 자락을 다음과 같이 노래했다. 술 먹은 박용래가/대전 유성온천 냇둑/술 먹은 고은에게 물었다/은이 자네는/저 냇물이 다 술이기 바라지? 공연스레 호방하지?/나는 안 그려/나는 저 냇물이 그냥 냇물이기를 바라고/술이 그냥 술이기를 바라네/(중략)/박용래가 울었다 안주 없이 먹은 술을 토했다/괜히 새를 쫓았다고 화를 냈다/은이는 나뻐/은이는 나뻐/박용래가 울었다 고은은 앞서가며 울지 않았다. -고은 作 '어느날 박용래' 中

최신웅 기자 grandtrust@daejonilbo.com





저녁눈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말집 호롱불 밑에 붐비다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조랑말 발굽 밑에 붐비다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여물 써는 소리에 붐비다

늦은 저녁때 오는 눈발은 변두리 빈터만 다니며 붐비다.





겨울밤



잠 이루지 못하는 밤 고향집 마늘밭에 눈은 쌓이리.

잠 이루지 못하는 밤 고향집 추녀밑 달빛은 쌓이리.

발복을 벗고 물을 건너는 먼 마을.

고향집 마당귀 바람은 잠을 자리.





오류동의 동전



한때 나는 한 봉지 솜과자였다가

한때 나는 한 봉지 붕어빵였다가

한때 나는 좌판에 던져진 햇살였다가

중국집 처마밑 조롱(鳥籠) 속의 새였다가

먼 먼 윤회 끝

이제는 돌아와

오류동의 동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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첨부사진2박용래 시인 시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