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시티즌 전종구 사장

전종구 사장은 승부의 차원을 떠나 시민들에게 즐거운 여가선용의 기회를 부여하고 더 나아가 유소년 선수들을 체계적으로 길러내 대전시티즌을 명문구단으로 육성하겠다고 밝혔다.  빈운용 기자 photobin@daejonilbo.com
전종구 사장은 승부의 차원을 떠나 시민들에게 즐거운 여가선용의 기회를 부여하고 더 나아가 유소년 선수들을 체계적으로 길러내 대전시티즌을 명문구단으로 육성하겠다고 밝혔다. 빈운용 기자 photobin@daejonilbo.com
대담 = 송충원 경제부장

올초부터 상반기까지 대전시티즌은 끝모를 나락에 떨어졌다. 시티즌의 레전드로 불리던 최은성 선수와의 계약불발, 사장의 전격적인 사퇴, 그리고 프런트 내 불화설까지 확산됐다. 게다가 연패의 늪에 빠진 팀은 꼴찌에서 벗어날 기미가 보이지않았다. 이 때 등장한 구원투수가 전종구(59) 사장이다. 물론 사장 한 명이 교체됐다해서 곧바로 승패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거나 예전과 전혀 다른 팀이 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의 취임이후 확실히 프런트 분위기가 달라졌고, 경기력까지 되살아난 것만큼은 분명하다. 전 사장으로부터 그 비결부터 듣고 싶어졌다.

"특별한 비법은 잘 모르겠어요. 또 현재 모든 게 제대로 된 것은 아니고, 긍정적 변화가 있다해도 사장 교체가 절대적인 이유는 아닐 겁니다. 다만 지난 5월 말 취임이후 선수단은 심기일전해 초반 연패의 늪에서 탈출해 웬만큼 경기력을 끌어올렸고, 프런트 역시 의욕적으로 업무에 임하고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겸손하게 말문을 연 그는 취임이후 끊임없이 강조해온 2가지 화두, `변화`와 `희망`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취임초기 신뢰회복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했죠. 우선 선수단에게 사장을 믿고 경기에만 집중할 것을 주문하며 유상철 감독이하 코치진을 전폭적으로 신뢰한다는 점을 인식시켰습니다. 프런트는 각 부서별 화합이 절실하다고 판단, 팀제로 시스템을 개편했죠. 권한을 부여하고 그에 따른 책임을 묻는 책임경영, 자율경영체제로 전환시킨 겁니다."

전 사장의 `변화`노력은 곧 가시적인 성과로 나타났다. 우선 프런트 내 불신의 벽이 서서히 허물어졌다. 사무실내 칸막이를 모두 철거하자 팀간 소통이 원활해졌다. 각 팀별로 협력해 구체적인 사업을 진행하는 사례또한 적지않다. 각 학교에만 머물던 유소년 코치와 감독들도 주 3일 사무실에 근무하며 프런트와 허물없이 대화를 나누게 됐다.

`희망`도 커졌다. "시티즌내 변화와 함께 희망이 절실했어요. 팬들에게도 희망이 필요했구요. 다행히 어려운 상황에서 모든 구성원들과 팬들이 시티즌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갖기 시작한 것 같아요. 무엇보다 책임경영을 강조하다보면 선수단이 위축될 수 있고, 선수단에 집중하려면 자금확보가 문제인데, 최근 구단주인 염홍철 대전시장과의 독대를 통해 추경에 17억6000만원을 끌어와 경영중입니다."

프런트와 선수단의 사기는 물론 경기력도 눈에 띄게 상승했다. 시티즌은 올해부터 시행되는 프로축구 승강제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현실적인 문제에 직면해있다. 현재 프로축구는 16개구단 중 정규리그 성적에 따라 상위 8개 팀과 하위 8개 팀이 나눠 경기하는 스플릿 리그에 돌입했다. 하위 8개 팀 중 최종적으로 성적이 가장 나쁜 2팀이 내년 2부리그로 강등되는 데 전 사장이 취임하기전까지만해도 시티즌은 유력한 강등후보 중 하나였다. 하지만 스플릿리그 돌입이후 5경기동안 무패행진을 이어가면서 잔류가능성이 유력해진 상태다. 무엇이 선수단을 달라지게 만든 것일까.

"현재 프로축구는 기업구단 10개와 시민구단이 6개 있는데 재정적인 격차가 큽니다. 특히 시민구단 중에서도 대전의 여건은 좋은 편이 아닙니다. 실제 인천의 경우 설기현을 포함한 주전 3명의 연봉이 대전 11명의 선수 연봉보다 높습니다. 우리가 눈높이를 맞출 수 없다면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을 해야 합니다. 그것이 파이팅이고, 이를 위한 동기부여가 필요했습니다. 스플릿리그 돌입이후 무승부 수당을 없애는 대신, 홈어웨이 구분없이 승리수당을 파격적으로 인상했습니다."

전 사장은 전문 스포츠경영인 출신이 아니다. 선출직에 출마한 경험도 있고, 기업CEO도 해봤지만 30년가까이 기자로 활동한 언론인이다. 그것도 스포츠전문기자다. 그의 인생역정이 궁금해졌다. 우선 무엇이 그를 언론인으로서의 길을 걷게 만든 것일까.

"고교시절 글쓰는 것을 좋아해 학예반 활동을 했고, 무언가 탐구하는 것을 좋아했기 때문에 기자를 꿈꾸게 된 것 같아요. 또 운동을 좋아했기에 스포츠분야를 택한 것 같구요."

학창시절 승마와 골프외에 모든 스포츠를 두루 섭렵할 정도로 운동을 좋아했고, 재능도 있었다. 고교시절 보디빌더로 교내 대회에서 인기상을 받았으며, 사이클대회에선 1등을 차지하기도 했다. 1977년 중앙일보에 입사해 사회부 기자로 활동하던 그는 1981년 기자협회 축구대회에서 탁월한(?) 운동실력을 발휘했고, 이를 지켜본 데스크의 추천으로 체육부로 발령받게 됐다. 이후 축구를 포함한 스포츠 전 분야에서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했고, 1992년 체육기자로서 최고의 영예인 제4회 이길용 체육기자상까지 수상했다.

전 사장은 또 한국 기자로서 평양에 간 최초의 언론이기도 하다.

"1984년 남북통일축구대회 취재차 4박5일간 평양을 방문했고, 기행문 형태로 평양을 소개했는데, 한국언론에서 평양을 다룬 것도 그 때가 처음이었습니다."

그는 `열린 모습 닫힌 마음-두 얼굴 북한`이라는 제하로 `물꼬는 텄지만 아직 제방 둑을 허물기에는 이르다`라는 취지의 기사를 보도함으로써 적잖은 반향을 일으켰다.

스포츠전문기자로서 맹활약하다 1996년 대전으로 내려와 중앙일보 충청취재반장, 중부사업본부장을 역임한 그는 2006년 지방선거에서 열린우리당 대전 중구청장후보로 출마했으나 낙선의 고배를 마셔야만 했다. 아픈 상처일 수도 있을 것 같아 "후회하지 않느냐"고 조심스레 말을 꺼냈는데 반응이 의외다. 한마디로 "멋진 굿판 신나게 놀아봤다"는 것이다.

"공천이 일찍 확정돼 타 후보들보다 더 많이 선거운동을 할 수 있었어요. 선거구 전역을 일일이 3회 이상 다녔고. 저와 가족이 돌린 명함만 24만장이었음에도 개표결과 2만7000표를 얻는데 그쳤죠. 경제적 후유증보다는 마음의 상처가 켰죠. 하지만 이제와 돌이켜보면 인생에서 정말 좋은 약을 먹었던 것 같아요. 무엇보다 타인의 마음을 진심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을 느끼게 된 시간이죠."

이후 스포츠용품 제조회사 CEO를 맡게되고, 목요언론인클럽 회장 등 다양한 사회활동으로 분주하던 그가 대전시티즌 사장 공모에 응했고, 현재 모든 열정을 시티즌 재건에 쏟고 있다. 왜일까. 이에대한 그의 답변은 간단명료하다. 가장 하고 싶은 일이고,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이다. 사실 시티즌 창단과정에 그의 역할이 적지 않았다는 것은 이제 비밀이 아니다. 1995년 당시 홍선기 대전시장이 월드컵을 유치해놓고 어떻게 해야할 지에 대해 그에게 자문을 구했다.

"프로팀 창단을 권했고, 감독과 코치를 추천했죠. 스폰서에 대해서도 동아건설을 추천했는데, 여의치않아 당시 동양백화점을 포함한 몇 군데 컨소시엄을 제안했고, 그래서 5개 기업의 컨소시엄으로 시티즌이 창단된거죠."

프로축구 취재현장을 떠난 지 16년만에 프로축구단 전문경영인으로의 변신에 성공한 그는 시티즌을 명문구단으로 만들겠다는 각오를 피력한다. 하지만 그가 말하는 명문구단은 수시로 우승컵을 거머쥐는 구단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우선 시민구단의 비전은 대시민서비스 확충에서부터 시작돼야 합니다. 우승이나 승부의 차원을 떠나 시민들에게 즐거운 여가선용의 기회를 부여하고 경기를 통해 즐거움과 기쁨을 주어야 합니다. 독일 뮌헨의 옥토버광장처럼 대전 월드컵경기장에서 시민들이 함께 모여 즐기도록 하는데 주력할 생각입니다. 경기시작 전후 다양한 프로그램을 마련해 연주도 하고 파티도 열 겁니다. 특히 과학도시라는 특성을 살려 첨단 과학의 이미지에다 축구가 갖는 놀이터 이미지를 접목시켜 교육과 스포츠가 어우러진 시민공간으로 만들어 나가아죠."

명문구단의 또다른 필요충분조건으로 그는 프랜차이즈 스타 육성을 꼽았다. 유소년을 잘 키워, 그들이 시티즌의 젊은 동량으로 활약토록하며, 경륜이 쌓여 은퇴하면 지도자로서 시티즌을 위해 헌신하는 시스템을 구축하겠다는 것이다.

"현재 유성중과 충남기계공고에 유소년팀을 맡기고 있는데, 앞으론 나이별로 유소년 클럽을 세분화시킬 것입니다. 우선 14세 팀을 창단할 계획인데, 통상 20명이 유성중 유소년팀에 진학할 경우 자질미달로 10명이 도태됩니다. 이같은 폐단을 사전에 예방하기 위해 여과과정을 만들겠다는 거죠. 또 내년 6월에 시티즌 합숙소가 완공되면 유소년 선수들도 합숙을 시키면서 실력을 키워나가도록 할 겁니다."

시티즌 발전을 위한 전 사장의 아이디어는 한 두가지가 아니다.

"현재 시티즌의 입장수익은 7%대에 불과해요. 하지만 재밌는 경기를 하고, 시민구단으로서의 명문구단 시스템을 하나씩 구축해나간다면 바르샤나 맨유처럼 입장수익을 30-40%대까지 끌어올릴 수 있습니다. 용병을 중심으로 선수세일즈도 전개하는 방안을 검토중이며, 대시민 소통확대를 위해 사회적기업과 연계해서 선수단이 참여할 수 있는 나눔과 베풂행사를 준비하고 있어요."

마지막으로 시티즌에 남다른 애정을 지닌 그의 목표가 궁금해졌다.

"최근 저명한 교수 한 분이 선수단과 코칭스태프, 프런트 등을 대상으로 강연한 적이 있는데, 우리의 꿈을 물어본 적이 있어요. 국가대표를 꿈꾸는 선수와 대표팀 감독, 명문구단 관리자 등을 최종 목표라 말하는 이들이 많았는데, 저는 `시티즌 사장을 오래하는 것`이라고 했어요. 자리에 대한 욕심이 아니라 내가 잘 할 수 있는, 진정으로 하고싶은 곳에서 최선을 다하고자 하는 다짐입니다."

정리 = 이호진 기자 jinlee@daejonilbo.com

☞★★★★★★★★★★☞ [ 본문:2 ] ☜★★★★★★★★★★☜

대전 선화동에서 태어나 대흥동에서 어린시절을 보냈다. 성균관대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하고 1977년 중앙일보에 입사한 뒤 싱가포르특파원, 사회부, 전국부 기자를 거쳐 체육전문기자로서 화려한 이력을 쌓았다. 특히 체육기자로서 최고의 영예로 꼽히는 이길용 체육기자상을 수상했으며, 한국기자로는 최초로 남북통일축구 취재차 평양을 방문, 기행문 형태의 기사를 통해 북한의 생생한 모습을 전달했다.

1996년 대전으로 내려와 충청취재반장, 중부취재본부장, 중부사업본부장 등을 역임했으며, 새언론포럼 이사와 목요언론인클럽 회장 등 언론과 관련된 사회활동 및 지역사회 봉사활동에도 열정을 다했다.

올해 5월 대전시티즌 사장으로 취임한 그는 명문구단 시스템을 구축하겠다는 장기적 비전을 가지고, `변화`와 `희망`의 새 역사를 써내려가고 있다. 이호진 기자

<저작권자ⓒ대전일보사. 무단전재-재배포 금지>

저작권자 © 대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