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암마을 '예안이씨 종부'에게 듣는 옛 추석 이야기

 예안이씨 8대 종부 최황규씨가 능이버섯을 말리고 있다. 사진=한경수 기자
예안이씨 8대 종부 최황규씨가 능이버섯을 말리고 있다. 사진=한경수 기자
충남 아산 외암민속마을은 예안 이씨의 집성촌이다. 500여년 전에 형성된 이 마을은 양반가의 고택과 초가집, 돌담등이 그대로 남아 중요민속자료 제236호로 지정되어 있다. 외암마을에서 참판댁이라고 불리는 기와집이 있다. 이조참판을 지낸 퇴호 이정렬이 살던 집이다. 고종황제의 하사금으로 지어졌다는 이 집의 안살림을 책임지고 있는 예안이씨 8대 종부 최황규씨(68)를 만난 것은 지난 25일 오후였다.

추석이 일주일 가까이 남았음에도 종부의 추석맞이는 이미 시작됐다. 멀리서 오는 자식들과 일가 친척들을 위해 김치를 새로 담그고, 차례음식산자를 만들 준비를 하느라 눈코뜰새 없이 바빴다.

1966년에 중매결혼해 종갓집 맏며느리 생활을 시작한 그에게 명절은 찾아오는 일가 친척들이 평소보다 좀 더 많을 뿐인 일상이었다. 우리네 명절은 추석과 설날 딱 두 번이지만 종갓집 명절은 1년 내내 이어졌다. 한식, 단오는 물론 유두, 칠석, 동지 때마다 사당에 차례음식을 올려야만 했다. 거기에 9번의 제사를 지내야 했다. 한마디로 1년 내내 차례음식과 제수음식을 차렸다.

큰 살림을 책임지는 종부로서 추석맞이가 힘들지 않느냐고 묻자 "요즘 명절은 예전에 비하면 일도 아니죠. 마트에 가면 다 팔잖아요. 옛날에는 다 집에서 만들었죠. 두부도 직접 만들었고, 다식거리 만들기 위해 여름에 송홧가루 받아와서 물에 띄워 떫은 맛 제거하고 말린 다음 고운 채로 거르고…. 보름은 준비해야 손님을 맞이할 수 있었어요."

그가 들려주는 예전 추석 풍경은 풍요롭기만 했다. 예안 이씨 집성촌이다 보니 명절 때만 되면 찾아오는 일가 친척이 줄잡아 40명은 족히 됐다. 사랑채와 행랑채는 멀리서 오는 일가친척들의 차지였다. 집에 찾아오는 손님을 위해 항상 상차림 두 개를 준비했다. 손님의 기호에 따라 주안상과 다과상도 따로 마련했다. 손님들의 출출함을 빨리 달래주고자 하는 종갓집의 배려를 엿볼 수 있다. 종갓집 광이 넓은 이유도 손님을 위해 미리 준비한 음식이 많기 때문이란다.

차례음식은 보름 전부터 준비했다. 차례음식을 준비할 때면 일가들이 품앗이로 도와주었다. 적은 주로 쇠고기와 돼지고기, 닭고기를 사용했고, 숭어, 북어, 오징어도 차례상에 올랐다.

차례를 지낼 때면 마당이 비좁을 정도로 북적였다. 일가친척 30-40명이 모여 차례를 지내다 보니 항렬이 낮은 사람은 일각문 밖에서 절을 해야만 했다.

추석은 동네 사람들에게 인심을 베푸는 날이기도 했다. 돼지 한 마리 잡으면 집에 찾아오는 일가친척들 먹기에 충분했지만, 동네 사람들을 생각해서 서 너마리를 잡았다. 집 곳간에 쌓아두었던 곡식들을 명절을 계기로 동네주민들에게 베풀었던 게 우리네 양반가들의 삶이었다.

"시어머니 살아계실 때 동네 아낙네가 출산을 했어요. 시어머니께서 쌀 두 가마니를 주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한 가마니는 선물이고, 다른 한 가마니는 일을 해서 갚으라고 하셨어요. 공짜가 없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으셨던 것이죠."

지긋지긋 할 법한 종부생활에 대한 그의 솔직한 마음이 궁금했다. 의외의 대답이 돌아왔다. "시어머니 돌아가시고 종부 자리 물려받은 지 30년이 됐지만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짐이라고 생각한 적 없어요. 당연한 걸로 알고 살았죠. 부담으로 느꼈다면 아마 못했겠죠. 며느리들한테도 종부생활을 가르치고 있는데 잘 따라와줘서 고맙죠."

차례음식을 주문하는 요즘 세태에 대한 그의 생각을 듣고 싶었다. "저희 집은 집에서 나는 재료로 차례음식을 만들어요. 밤, 대추, 호두, 은행, 곶감이면 벌써 5색이 되잖아요. 거기에 사과와 배만 놓으면 되죠. 중요한 것은 정성이라고 생각해요. 요즘 세상살이가 바쁘다 보니 음식을 만들 시간이 부족하기 때문에 차례음식을 주문하겠지만 전 음식 하나를 놓더라도 자손들의 정성이 들어가 있으면 된다고 생각해요. 나중에 제 며느리는 어떨지 모르지만 제가 차례상을 차리는 한 직접 만든 음식만 올릴 거예요."

아산=한경수 기자 hkslka@daejo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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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풍요로움이 깃든 황금들녘을 보니 어느덧 추석이 다가와 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늘 한가위만 같아라'던 추석명절도 시대의 흐름을 이기지 못한 채 점점 휴일이 되어가고 있다. 그래도 저 풍성한 곡식을 벗삼아 서 있는 기와집과 초가집처럼 우리 마음속에 남아있는 추석은 여전히 풍요롭고 따뜻하다.  사진=한경수 기자
풍요로움이 깃든 황금들녘을 보니 어느덧 추석이 다가와 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늘 한가위만 같아라'던 추석명절도 시대의 흐름을 이기지 못한 채 점점 휴일이 되어가고 있다. 그래도 저 풍성한 곡식을 벗삼아 서 있는 기와집과 초가집처럼 우리 마음속에 남아있는 추석은 여전히 풍요롭고 따뜻하다. 사진=한경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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