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 최초 국가무형문화재 표태선 악기장

표태선은 가야금과 해금, 거문고 등 현악기 제작에 뛰어나 국가무형문화재 악기장(현악기 제작)으로 지정됐다. 사진=김재근 선임기자
악기 제작 과정을 설명하는 표태선 악기장. 사진=김재근 선임기자


"오동나무를 대개 2년 6개월에서 3년 가량 건조시킵니다. 처음에는 밖에 내놓아 눈과 비, 바람을 맞게 합니다. 이렇게 나무의 진을 제거하면 겉은 삭아서 검게 변하고 안쪽은 하얗게 나무의 결이 살아납니다. 그런 다음 마지막으로 건조한 창고 안에 쌓아둡니다. 소리를 내는 데는 나무가 제일 중요하거든요."

표태선 악기장의 작업 공간인 대전 보문산 자락의 명인국악기제작소는 곳곳에 오동나무 판자가 즐비했다. 작업장은 물론 담벼락과 골목, 텃밭, 심지어 지붕에도 오동나무 판자를 널어 말리고 있었다. 여기저기 공간이 있는 곳마다 국악기의 가장 중요한 재료인 오동나무를 세우거나 펼쳐놓은 것이다.


 

악기 제작은 좋은 오동나무를 제대로 건조하는 데서 시작된다. 지붕에도 오동나무 판자를 널어 말리고 있다. 사진=김재근 선임기자

<"가문의 영광… 아내에게 진심으로 감사">

표태선 악기장은 가야금, 거문고, 해금, 아쟁 등 모든 국악 현악기를 제작하는 장인이다. 이중에서도 전통방식의 가야금 제작 실력과 경력, 정통성 등을 인정받아 이번에 국가무형문화재 악기장(현악기 제작)이 됐다. 대전무형문화재 제18호 악기장(가야금 제작)에서 한단계 격이 더 위인 국가무형문화재로 발돋움한 것이다.

"가문의 영광이지요. 전국에 수많은 악기 장인이 있는데… 오랜 세월 직접 뒷바라지를 하고 살림을 꾸려온 아내가 제일 고맙습니다. 그동안 대전시에서도 많은 도움을 줬고요."올해가 악기를 만들어온지 45년째라고 한다. 18살 때 무작정 상경하여 우여곡절 끝에 국악기 제작의 길로 들어섰고 그게 평생의 생업이 된 것이다.

"시골 사는 게 답답하기도 하고 뭔가 새로운 일을 해보고 싶어 상경했는데, 서울 생활이 만만치 않았어요. 막상 부닥쳐보니 일할 만한 곳도 별로 없었고… 그때 오촌 당숙께서 악기 만드는 곳을 소개시켜줬어요."

1978년 그가 취직한 곳이 조대석의 공방이었다, 조대석은 일제 때부터 가야금 제작 기술을 배워 해방 이후 서울에서 악기제작소를 차려 그 기술을 널리 퍼뜨린 김붕기의 제자였다. 그는 조대석의 문하생으로 4년 넘게 일하며 오동나무 건조에서 대패질과 명주실 꼬기까지 가야금 제작의 기초와 실제를 하나하나 배웠다.

얼마 뒤 그는 김종기의 문하에 들어가 가야금과 현악기 제작 기술을 계속 익혔다. 김종기는 거문고와 가야금 등을 아주 잘 만드는 실력자였다.


 

표태선 악기장이 제작한 각종 국악 현악기들. 사진=김재근 선임기자

<18세 입문, 조대석 김종기 선생에게 배워>

"조대석 선생과 김종기 선생은 악기 제작 기법이 많이 달랐어요. 악기를 만드는 장인들마다 기술과 개성이 있는데, 조대석 선생은 칼을 많이 사용했고 김종기 선생은 줄을 많이 써서 작업을 했어요. 칼을 쓰면 작품을 화려하게 하는 만드는 데 장점이 있고, 줄을 사용하면 악기가 부드러운 곡선을 띄게 됩니다. 다행히 저는 두 가지 기법을 다 배울 수 있었습니다."

그는 이러한 배움 과정이 "재미 있었다."고 한다. 기왕에 기술을 배우기 시작했으니 젊었을 때 더 많이 더 깊이 익히기로 마음을 먹었던 것이다. 두 명의 스승으로부터 기술을 배우고 융합하여 자신만의 독특한 방식을 만들고 싶었다고 한다.

그가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된 것은 두 스승의 기술을 충실하게 배운 덕분이다. 문화재청은 한국과 중국, 일본의 다양한 악기의 제작 기법을 섭렵한 김붕기 선생의 칼 조각 기법이 조대석을 거쳐 그에게 잘 전승됐고, 국가무형문화재였던 김광주의 줄을 쓰는 공예가 김종기를 거쳐 그에게 잘 이어졌다고 평가했다. 두 가지 기술을 갈고 다듬어 섬세하면서도 정밀한 제작 솜씨를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그가 서울에서 대전으로 내려와 자리를 잡은 것은 김종기 스승 때문이었다. 스승이 48명의 제자를 두고 국악기를 대량으로 제작하다 경영난에 부딪쳤는데 이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대전행을 택했고, 그도 주저하지 않고 스승을 따라 대전으로 내려온 것이다.

대전행은 전화위복이 됐다. 대전시 중구 시민회관 뒤쪽에 공방을 차려 다시 악기를 제작하기 시작했는데 당시 국악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국악기 수요가 크게 늘었다. 학교에서도 국악을 가르치는 곳이 생겨났고, 일반인들도 국악을 배우느라 거문고와 가야금을 구입하기 시작한 것이다. 형편이 나아지자 스승은 그에게 창업을 권했고, 이를 계기로 명인국악기제작소를 설립하여 오늘에 이른 것이다.

"20여년 동안 내 이름으로 거문고와 가야금, 해금 등을 만들어 왔습니다. 운이 좋아 2008년에는 대전시무형문화재 18호 악기장 보유자로 인정도 받았고요."


 

표태선 악기장이 악기 제작에 사용하는 각종 연장들. 사진=김재근 선임기자

<가야금과 해금 제작에 뛰어난 실력>

표 악기장은 가야금, 거문고, 해금, 아쟁 등 모든 국악 현악기를 제작하는 장인이다. 특히 그는 가야금과 해금 제작에 뛰어난 실력을 보여주고 있다. 문화재청은 그를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하기에 앞서 현악기 제작의 핵심 공정인 울림통 제작, 줄 꼬기, 줄 걸기 등의 기량을 확인했고, 그가 만든 악기를 국악원에서 직접 테스트하는 과정도 거쳤다.

"이 일이 제 적성과 성격에 잘 맞는 듯합니다. 국악기 제작은 인내와 기다림이 필요한 일입니다. 나무를 사다가 몇 년 동안 말리고, 그것을 깎고 다듬어야 좋은 가야금 한 점이 나옵니다."

가야금이 나오기까지 시간도 많이 걸리고 공정도 매우 복잡하다. 가장 중요한 일은 우선 품질 좋은 오동나무를 확보하는 것이다. 오동나무는 돌이 많은 척박한 땅에서 자란 것을 최고로 친다. 이런 오동나무로 울림통을 만들면 짱짱하고 당글당글한 소리가 난다고 한다.

오동나무와 밤나무를 건조하는데 3년이 걸리고, 나무를 깎고 다듬어 장식을 하고 줄(현)을 매달기까지 한달 정도 소요된다.

맨 먼저 오동나무 판자로 위판을, 밤나무 판자로 밑판을 만든다. 대패질을 하고 자귀로 다듬어 위판을 만들고 인두질을 한다. 인두질은 위판의 오동나무에 남아있는 진을 빼내 겉을 단단하게 하고 나무의 멋스러운 무늬를 돋보이게 하며 해충을 막아주는 기능도 한다고 한다. 밑판은 토종 밤나무로 만든다. 밑판에 구멍을 뚫어 소리가 잘 울리도록 만들고, 위판과 밑판 사이에 졸대를 댄 뒤 아교풀로 접착시킨다. 이처럼 몸판을 만들고 그 위에 줄을 떠받치는 안족(雁足)을 만들어 붙인다. 안족 위로 명주실을 꼬아 만든 줄을 걸면 가야금이 완성된다.


 

대전시 중구 문화동 보문산 자락에 위치한 공방에서 거문고를 제작하고 있는 표태선 악기장. 사진=김재근 선임기자

<시간과 인내의 싸움… 천년 가는 작품 만들고싶어>

"가야금 한 점이 나오기까지 수십 가지 과정을 거칩니다. 자동차는 똑같은 규격으로 부품을 만들어 짜맞추면 되는데 악기는 그게 되지 않습니다. 나무의 성질에 따라 대패질도 달리해야 합니다. 나무도 알고 소리도 알아야 하고요. 여러 공정을 두루, 제대로 거쳐야 좋은 악기가 나옵니다."

그는 역사적 기록에 존재하는 신라금과 자양금 등의 옛날 악기도 재현했다. 신라금(新羅琴)은 가야국의 우륵이 처음 만들어 신라에 전한 가야금으로, 이게 일본에 전해지면서 '신라금'으로 불렸다. 일본의 정창원에 신라금이 전하는데 일본에 직접 가서, 이를 보고 정악가야금을 복원한 것이다. 충북 제천에 전하는 조선 후기 칠현금인 자양금(紫陽琴)도 실물을 보고 똑같이 만들어냈다. 국보 287호인 백제대향로에 새겨진 완함(阮咸)도 제작했다.

"요즘도 매일 나무를 깎고 다듬고 대패질하고 사포질합니다. 장식을 만들어 붙이고 명주실을 꼬아 줄을 만들다 보면 하루가 갑니다. 국악기는 하나에서 열까지 누구를 의지하지 않고 모두 직접 만들어야 합니다. 잘 만든 가야금과 거문고는 천년을 갑니다. 맑고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혼이 담겨있는 작품을 만들겠습니다."
 

눈비에 노출하여 건조 중인 오동나무 판자. 사진=김재근 선임기자

저작권자 © 대전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