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73주년 비화>
미 종군기자 칼 마이던스 촬영, 1950년 7월 31자 라이프 게재
대전전투 때 전사, 포로, 탈출 각기 다른 운명 겪어

미국 라이프지 1950년 7월 31일자 표지에는 대전전투 직전에 찍은 병사 3명의 사진이 실려있다. 종군기자 칼 마이던스 작품이다.

한 장의 사진이 있다.

1950년 7월 31일자 미국에서 발행되는 라이프지 표지에 실린 미군 병사 3명의 사진이다.

윌리엄 프리시 딘 사단장(소장)이 지휘하는 미국 24사단이 대전전투를 벌이기 며칠 전 34연대 소속 병사들이 대전 시내에서 지프차를 탄 모습이다. 뒤쪽으로 대전시내 모습이 희미하게 나온다.

3명의 병사들은 긴장감, 두려움, 피로감 등이 교차하는 듯한 표정을 하고 있다. 며칠 뒤에 치러질 운명의 대전전투를 예감이라도 하듯…

앞쪽 오른쪽 운전병이 루이스 렙코 주니어 병장이고, 왼쪽은 필리핀 출신 미국인 마일스 에이 케이블스 일병, 뒤쪽은 케네스 제임스 에드워드 일병이다. 사진 아래쪽에 24사단 병사들이라는 글귀가 나온다.
 

대전전투에 참전했던 루이스 렙코 주니어의 생전 모습. 한국전 참전용사라고 쓴 모자를 썼다.

렙코는 1932년 오하이오주의 로레인 출신으로 2차 대전 직후 미군에 입대했다. 새로운 세계에 대한 동경심 때문에 당시 나이가 16세인데 17세로 속여 입대했다고 한다. 24사단 34연대에 배속돼 한국전쟁에 투입될 때까지 계속 일본에서 근무했다.
 

대전전투에서 포로가 됐던 필리핀 출신 미군 케이블스의 훈장 내역을 기록한 문서.

필리핀 출신 케이블스는 얼핏 한국인처럼 보인다. 그는 2차대전 때 필리핀에 주둔했던 맥아더 휘하의 미군으로 참전하여 죽음이 행진을 겪었다. 죽음의 행진은 1942년 4월 필리핀을 점령한 일본군이 7만여 명의 연합군 포로를 바탄반도에서 카파스까지 120㎞를 강제 이동시키면서 다수를 학살한 사건을 말한다. 케이블스는 여기서 살아남았고 2차대전이 끝난 뒤 직업군인이 됐던 것으로 추정된다. 1910년생으로 한국전쟁 당시 40세였다.

에드워드는 1927년 일리노이주 화이트홀 출신으로 별다른 인적사항이 전하지 않는다. 이 사진에 찍혔을 당시 일병이었다.

이 사진이 실린 것은 라이프지 7월 31일자이다. 대전전투 직전에 찍은 것이다.

당시 전황을 살펴보면 이들 병사가 처한 상황을 엿볼 수 있다.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맥아더 장군은 가장 먼저 24사단을 파견했고, 24사단장 딘 소장은 곧바로 스미스 특수임무부대를 선발대로 보냈다. 스미스부대는 7월 5일 오산 죽미령에서 북한군 4사단 및 105전차사단과 첫 전투를 별였다. 이 전투에서 스미스 부대는 60명이 전사하고 82명이 포로로 잡혔다.

스미스부대에 이어 24사단 34연대가 7월 7일부터 9일까지 천안에서 북한군을 맞아 싸웠으나 연대장 마틴 대령이 전사하는 등 참패했다.

딘 소장은 전력 손실이 큰 34연대를 공주-논산 쪽으로 빼내 서쪽을 방어하게 하고 21연대를 전면에 배치하여 전의에서 전투를 벌였다. 9일부터 11일까지 전개된 전의전투에서 제21연대는 3일 간 적을 저지했으나 600여 명의 사상자를 내고 후퇴했다.

이어 벌어진 금강전투에서는 19연대가 13일부터 북한군의 금강도하를 저지했으나 16일 뚫리고 만다. 공주를 방어하던 34연대도 14일 북한군 제4사단에게 뚫렸고, 15일 논산으로 후퇴했다가 대전의 본대에 합류하게 된다.

사진에 나오는 3명의 병사는 이때쯤 사단본부가 위치한 대전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34연대 소속으로 천안과 공주, 논산전투에서 잇따라 패하면서 동료들의 죽음과 전쟁의 참혹함을 뼈져리게 겪은 터였다. 사진에 잡힌 병사들의 침울한 표정이 이를 잘 말해준다.

이들 세 병사의 비극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7월 19일부터 20일까지 벌어진 대전전투에서 24사단은 3933명이 참전, 전사 48명, 부상 228명, 실종 874명의 2400명의 손실을 입었고, 사단장인 딘 소장도 포로가 됐다.

렙코는 대전전투에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다. 남쪽으로 후퇴하던 중 산내 근처에서 차가 뒤짚혀 다리를 다친다. 대전의 남쪽 후방은 북한군 3사단과 4사단 병력이 옥천과 금산으로 빠지는 도로를 차단한 상태였다. 렙코는 여기서 딘 소장을 만났고 10여명의 동료와 함께 우여곡절 끝에 대전을 탈출하여 옥천에서 미군을 만나 목숨을 건진다. 딘 사단장은 일행과 헤어져 계속 산길을 헤매다 8월 25일 전북 진안에서 북한군에 사로잡혔다,

필리핀 출신 케이블스는 이날 포로가 됐다가 3개월 만인 10월 20일 극적으로 탈출에 성공했다. 케이블스는 2차대전과 한국전에서 2차례나 포로가 되는 경력을 갖게 됐다.

에드워드는 대전전투 이후 아무런 기록이 전하지 않는다. 20일 대전전투에서 전사했거나 실종된 것이다.

라이프지 7월 31일자는 대전전투가 끝난 뒤에 발행된 것이다. 잡지가 발행됐을 무렵 3명의 병사중 렙코는 대전을 탈출하여 본대에 합류했고, 케이블스는 포로가 됐으며, 에드워드는 전사한 상태였다. 라이프지 31일자에는 딘 소장의 실종기사도 함께 실려있다. 기사를 한국에서 미국으로 전송하는 데 시간이 걸린데다, 주간지라서 여러 날짜의 기사를 한꺼번에 게재한 것이다.

한국전쟁이 끝난 뒤 렙코는 고향인 오하이오에서 창고관리자와 사립탐정으로 일하다 2019년 6월에 별세했다. 그의 고향 앰허스트 광장에는 1950년 7월 31일자 라이프의 표지 사진을 담은 벽화가 그려져 있다. 그의 한국전 참전을 기념하여 조성한 것이다.

케이블스는 1993년 4월 82세에 영면했으며, 위싱턴의 마운틴 뷰 메모리얼 파크에 안장됐다.

이 사진은 한국전쟁 당시 종군기자로 활동했던 라이프지의 칼 마이던스(1907~2004)가 찍은 것이다. 마이던스는 한국전쟁 초기 24사단을 따라다니며 천안, 전의, 금강전투 등을 생생하게 렌즈에 담았다. 한국전쟁과 1948년 여순사건 관련 사진 등 다수의 수작을 남겼다.
 

1950년 7월 20일 대전전투 당시 퇴로가 막힌 미 24사단 병사들이 대전시내를 빠져나가지 못하고 있는 모습. 미군이 찰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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