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73주년 비화 … 임시수도 대전, 대통령 증발 사건
이승만 7월 1일 새벽 몰래 부산행… 대전시민 대공황
대통령 부재에도 군사·행정 집결, 20일간 국난수습 중심

한국전쟁 초기 대전으로 수도를 옮긴 정부는 1950년 6월 27일부터 7월 16일까지 20일 동안 충남도청을 중앙부처의 청사로 사용했다. 사진=김재근 선임기자

1950년 6월 27일 새벽 이승만 대통령은 극비리에 피난길에 오른다. 북한군이 38선을 넘어 남침한 지 꼭 이틀만의 일이었다. 이 대통령은 전날(26일) 비상국무회의를 열도록 지시했고, 이날 새벽 1시부터 회의가 열렸다. 그는 국무회의의 참석하지 않고 주미대사관과 맥아더 원수에게 전화를 하고 있었다. 이때 국무총리 겸 국방장관 신성모, 서울시장 이기붕이 경무대로 들어와 "사태가 급박하다."며 대전으로 피란할 것을 강권했다.

이 대통령은 새벽 3시 경무대를 나와 4시에 서울역에서 열차를 탔다. 일행은 대통령 부부와 경무대 경찰서장 등 6명이 전부였다. 열차는 실수인지 고의인지 알 수 없지만 대전이 아닌 대구까지 내려갔다. 대구에 도착한 그는 "내 평생 처음 판단을 잘못했다. 여기까지 오는 게 아니었는데… "라고 자책했다. 마중 나온 조재천 경북지사에게 적을 잘 물리치라고 한 뒤 발길을 돌려 오후 4시쯤 대전역에 도착했다.


 

이승만 대통령이 5일 동안 머물렀던 충남도지사 공관. 대전시 문화재자료 제49호로 지정됐다. 사진=김재근 선임기자

<이 대통령 27일 대전에, 지사 공관에 여장>

대전역에는 윤치영 내무장관과 이영진 충남지사 등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 대통령은 대흥동에 있는 충남도지사 관사에 짐을 풀었다. 대전이 전쟁으로 인해 임시수도 역할을 시작하는 순간이었다.

서울에 있던 고위관료와 정치인, 기업인, 언론인 등이 대전으로 몰려들었다. 대통령의 소식을 듣고 특별열차로, 혹은 승용차를 타고 속속 대전에 도착했다. 이들이 투숙한 곳은 성남장이었다. 성남장은 대전에서 가장 큰 여관으로 40여 개의 객실이 있었다. 이곳에 300여명이 묵었으며, 80여대의 승용차가 머물렀다.

27일 이승만 대통령이 대전에서 처음 한 일은 특별방송이었다. 그는 KBS 대전방송국의 방송기기를 자신이 머무는 충남도지사 관사에 가져오게 하여 서울의 KBS 중앙방송국과 중계선로를 연결시켰다. 그리고 저녁 9시 생방송을 전국에 내보냈다. 내용은 "적이 서울 외곽까지 다가왔다. 맥아더 장군이 충분히 원조하기로 했고, 폭격기도 도착할 것이다. 서쪽 옹진반도에서 동해안까지 38선 전역에서 싸우는 국군과 경찰에 사의를 표한다."는 것이었다. 이 내용을 11까지 세 차례 반복, 송출했다.

다음날(28일) 새벽 2시 40분경 국군이 한강 인도교를 폭파했고.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했다. 피란길이 막혀 시민은 물론 국군도 남하를 못했고, 수많은 우익 인사들이 북한군에 의해 희생됐다. 이 때문에 훗날 대통령이 대전으로 피란해놓고 마치 서울에 남아 있는 것처럼 거짓방송을 하여 국민들을 속였다고 비판을 받았다.

28일부터 본격적으로 대전 임시수도 체제가 가동됐다. 충남도청이 중앙청으로, 대전시내 관공서 건물은 정부부처 사무실로 쓰였다. 도지사 관사가 대통령 공관이 되고 장차관과 주요 공직자들은 성남장이나 유성온천, 지인 및 유지들의 집에서 머물렀다. 국무회의는 도지사실에서 열렸다.


 

1950년 6월 29일 수원공항에서 이승만 대통령(오른쪽)이 전황을 살피기 위해 일본 동경에서 건너온 맥아더 사령관을 반갑게 맞고 있다.

<대통령이 몰래 부산으로… '7월 1일 사태'>

이처럼 위급하고 급박한 시기 대통령이 몰래 대전을 떠나는 사건이 발생한다. 7월 1일 새벽 북한군이 수원을 지나 남하한다는 보고를 받고 쥐도 새도 모르게 대전을 뜬 것이다. 대통령 내외와 비서 등 5명은 차량으로 익산역에서 도착, 열차를 동원하여 목포에 이르렀다. 목포에서 해군 배를 타고 19시간의 긴 항해 끝에 다음날 부산에 도착했다.

대통령이 사라지자 성남장에 머물던 관료와 국회의원 등은 공황에 빠졌고, 너도 나도 짐을 싸 전주쪽으로 피란을 나선다. 대전 시내에는 유언비어가 횡행했고, 대전형무소에서는 직원들이 모두 도망한 틈을 타 죄수들이 소요를 일으켰다가 군에 의해 제지당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이러한 대혼란은 북한군의 수원 점령이 헛소문임이 밝혀지고 전주로 도망했던 정부요인들이 돌아오면서 진정된다. 특히 이날 저녁 대전역에 미국 24사단 선발대인 스미스 부대가 도착하면서 민심이 안정됐다. 2일에는 부산에 도착한 대통령과 전화가 연결되면서 정부 기능이 회복된다.

대전시민들이 눈에 비친 대통령과 정부요인, 정치인들의 행태는 실망스럽기 이를 데 없었다. 성남장 여관 주인 김금덕은 화를 내며 이들이 여관에 들어오지 못하게 막고, 승용차 타이어에 펑크를 내기도 했다. '7월 1일 피난 사태'는 국란의 시기 대통령과 위정자들의 민낯이 백일하에 드러난 사건이었다. 대전을 떠난 대통령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부산에서 있다가 7월 9일 대구로 가서 그곳에서 계속 머물며 국정을 원격 지휘했다.

대전에 대통령이 없었지만 임시수도 기능은 쉬지 않고 돌아갔다. 정부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전쟁 수행이었다. 29일 시흥지구전투사령부가 설치됐으며, 7월 5일에는 평택에서 3개 사단을 통합, 1군단이 창설됐다. 육군본부도 수원에서 평택을 거쳐 7월 4일 대전으로 이전했고, 공군도 7월 초부터 대전에 공군본부와 공지합동작전본부를 두고 전쟁을 수행했다.

6월 30일 수원의 미군 전방지휘소가 대전으로 이전했다. 유엔의 군사지원도 시작됐다. 트루먼 대통령은 맥아더 극동군사령관에게 주일 미군 사용권을 부여했고, 맥아더는 24사단 딘 소장에게 한국전 참전을 명령했으며, 24사단은 대전에 본부를 두고 스미스부대를 북상시켜 전투를 시작했다.


 

정일권 육군총참모장 겸 육해공군총사령관(가운데)이 1950년 6월 30일 19시 정부청사(충남도청)에서 신성모 국방장관에게 승진신고를 하고 있다. 사진=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무능한 채병덕 총참모장 해임, 정일권 임명>

무능한 채병덕 육군총참모장도 교체됐다. 그는 6일 29일 일본에서 급히 내한한 맥아더 장군이 어떻게 할 것이냐고 묻자 전술이나 전략도 없이 "200만 남한 청년을 모조리 징집해서 훈련시키면 알아서 격퇴해준다"고 답했다. 맥아더는 이승만에게 교체를 요구했고, 6월 30일 정일권은 대전으로 내려와 육군총참모장 겸 육해공군 총사령관 임명장을 받았다.

7월 1일에는 정일권 사령관이 대전의 미군 전방지휘소에서 처치 준장과 만나 한미 연합작전 체제를 구축했다. 이 때부터 경부축을 기준으로 서부전선은 미군(유엔군)이, 중부 및 동부전선은 국군이 맡게 된다. 7월 8일에는 전라도를 제외한 전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했다.

대전 임시수도 시기 한국은 미국과 2개의 중요한 군사협정을 맺는다. 유엔 안보리 결의에 따라 유엔사령부가 창설되자 이승만 대통령은 7월 14일 국군의 지휘권을 맥아더 극동사령관 겸 유엔군사령관에 위임했다. 7월 12일에는 '대전협정'으로 불리는 '재한 미국군대의 관할권에 관한 협정'을 맺었다. 미국이 주한미군에 대해 배타적 재판권을 요구했고 이를 들어줬다.

전쟁 초기 국난 수습의 중심지였던 대전 임시수도는 7월 16일 막을 내린다. 미 24사단이 오산과 천안, 전의전투에서 패배하고 12일부터 대전 북쪽 금강 일원(세종시 금남면)에 북한군이 나타나자 정부는 16일 서둘러 대구로 빠져나갔다.
 

정부요인과 정치인 등 300여명이 머물렀던 성남장 자리(현재 대전동부신협)에 당시 상황을 담은 표지석이 서 있다. 사진=김재근 선임기자
정부요인과 정치인 등 300여명이 머물렀던 성남장 자리(현재 대전동부신협)에 당시 상황을 담은 표지석이 서 있다. 사진=김재근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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