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의 예비타당성조사 제도
영호남 수십조원 사업 '특별법' 만들어 예타 무력화
지방마다 "기준 완화" "예타 면제" 등 요구 봇물

대전천 하상의 도로와 주차장, 체육시설 등을 정비하는 대전천 통합하천사업도 예비타당성조사를 통과해야 한다. 사진=김재근 선임기자
충남 서산 태안의 가로림만에 해양정원을 조성하는 사업은 현재 예타가 재실시되고 있다. 사진=해양수산부
충남도의회가 지난 14일 예비타당성조사 기준을 완화하도록 국가재정법 개정을 촉구했다. 사진=충남도의회


"인구의 절반이 수도권에 살고 있는 '서울공화국'에서 인구밀도가 낮은 지방은 비용편익 분석에서 절대적으로 불리하다. 서울공화국만 배를 불리는 예타제도의 근본적인 개선이 필요하지만, 우선 예타 기준을 현실에 맞게 상향해야 한다."

김태흠 충남지사가 최근 페이스북에 쓴 글이다.

충남도의회도 지난 14일 예비타당성조사 개선을 요구하는 국가재정법 개정 촉구 건의안을 채택했다. 도의회는 건의문에서 현행 예타제도가 비용편익비율(B/C)을 너무 강조해 인구가 적은 지방은 꼭 필요한 사업도 예타를 통과하지 못하고 있다며 ▲예타 조사 대상을 현행 총사업비 500억원 이상에서 1000억원 이상, 국비지원은 300억원 이상에서 500억원 이상으로 완화 ▲국회는 여기에 걸맞게 국가재정법을 조속 개정 ▲지방 숙원사업 예타 시 경제성 비중 축소 등을 요구했다.

<99년 시작, 공적 있지만 지방살리기 걸림돌로... >

"전라북도, 여당에 새만금 기반 사업 '예타 일괄 면제' 요청"

"홍준표 시장, 추 부총리에 신공항 철도·팔공산관통도로 예타 면제 요청"

"김병수 김포시장 5호선 김포연장 노선 확정·예타 면제 촉구"

최근 언론 기사의 제목들이다. 전국 곳곳에서 예타 통과 혹은 면제를 요구하며 중앙정부를 압박하고 있다.

24년 된 예비타당성 제도가 위기에 직면했다. 현실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개선과 보완 요구가 끊이지 않고 있다. 특히 수도권과 지방의 불균형이 심화되고, 지방의 위기가 고조되면서 이제 낡은 제도를 폐지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나오고 있다. 예타가 지방 살리기를 가로막고 있다는 것이다.

정부가 예타제도를 도입한 것은 1999년이다. 대규모 개발 사업의 우선순위, 투자시기, 재원 조달방법 등을 따져 재정투자의 효율성을 높이자는 취지였다. 이 제도에 따라 기획재정부 주관하에 KDI(한국개발연구원) 등에서 총사업비가 500억원 이상이고 국가 재정이 300억원 이상 들어가는 신규 사업에 대해 타당성조사와 예비타당성조사를 실시했다. 타당성조사는 해당부처가 주로 기술적인 사항을 검토하고, 예비타당성조사는 기재부가 경제적인 면을 검토하는 방식으로 이뤄진다.

예타는 경제성, 정책성, 지역균형발전 3가지를 분석한 뒤 마지막으로 종합평가를 진행한다. 예타 결과는 경제성이 좌우하는데 대개 비용 대비 편익(B/C)이 1보다 크면 '경제적 타당성'이 있는 사업으로 인정한다.

그동안 예타제도는 국비 사업 추진에 훌륭한 길잡이 역할을 해왔다. 과학적 평가로 재정 투자의 효율성을 높였다. 1999년부터 2020년 말까지 932건의 예비타당성조사를 실시, 이중 592건(426조 9000억원)을 통과시켰고, 340건(178조 9000억원)을 걸러내 막대한 예산 낭비를 막았다.

이러한 '공적'에도 불구하고 비판도 적지 않다. 2조 6000억원을 들여 한강과 인천 앞바다를 연결하는 경인아라뱃길과 운행한지 4년여만에 3000여억원의 적자를 내고 파산한 의정부경전철 등도 예타를 통과했다. 정치적 압력에 굴복하거나 수요를 잘못 예측하여 엉터리 사업에 면죄부를 준 것이다.

<경제성 평가 위주, 인구 많은 수도권에 유리>

근래 예타를 위협하는 가장 큰 존재는 정치권이다. 정치인들이 특별법을 만들어 자기 동네 특정 사업을 밀어붙이고 있는 것이다. 대표적인 것이 '광주 군공항 이전 특별법'과 대구경북 신공항 특별법' '가덕도신공항 건설 특별법' 등이다. 광주군공항은 6조 7000억, 대구경북신공항 12조 8000억, 가덕도신공항은 13조 7000억원이나 들어간다. 예타 통과가 여의치 않자 영호남 정치권이 특별법을 만들어 우회한 것이다. 예타조사가 필요한 천문학적인 사업은 빠져나가고, 잔챙이만 예타조사의 그물에 허우적거리는 모양새다. 충청권과 강원권의 반감과 소외감이 심각한 실정이다.

수도권과 지방의 격차 심화와 지방의 소멸의 위기도 예타제도의 근본적인 개선과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 기존의 예타제도가 급변하는 경제 사회적 현실을 제대로 담아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타조사의 핵심은 '경제성' 평가로 비용(투자)에 따른 편익(이익)이 잘 나와야 하는데 이것을 좌우하는 것은 해당지역의 인구의 많고 적음이다. 인구가 줄어 소멸위기에 처한 지방 사업은 예타를 통과할 가능성이 매우 낮다. 가면 갈수록 지방의 SOC와 삶의 환경이 나빠질 수 밖에 없는 구조다.

충청권의 경우 대전의 현충원IC, 충남 서산공항, 가로림만해양정원도 예타에서 탈락했다. 대전의료원과 대산-당진 고속도로 등은 예타 탈락 후 예타면제와 재조사로 사업을 추진하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향후 예타가 예정된 대전교도소 이전, 사정교-한밭대로 도로 개설, 옛장항제련소 생태복원, 대전천 통합하천사업 등도 결과를 장담하기 어렵다.

<국가균형발전 시대적 과제 걸맞게 고쳐야>

인구 감소로 예타 통과가 어려워지자 지방정부마다 '예타 면제'를 호소하고 있다. 예타를 신청해봤자 통과가 어려우니 지역균형발전 차원에서 예타에서 빼달라는 것이다.

국회가 이러한 요구에 부응하여 제도 개선에 나섰지만 일단 중단됐다. 기획재정위가 지난 4월 예타 면제 기준을 완화하는 국가재정법 개정안을 의결하려다 보류했다. 일부 시민단체가 혈세 낭비를 부추기는 포퓰리즘이라고 비난하자 꼬리를 내린 것이다. 개정안은 예타 조사 대상을 총사업비는 현행 500억원에서 1000억원으로, 국비는 300억원에서 500억원으로 완화하는 내용을 담았다.

예타제도가 도입된지 24년이 흘렀고 세상이 크게 변했다. 수도권은 고도비만에 허덕이고 지방은 인구 감소로 소멸 위기에 놓여있다. 청년들이 수도권에 몰려들고, 그 청년들은 수도권의 엄청난 집값과 물가에 결혼과 출산을 기피하는 등 국가 존망의 위기에 이르렀다. 모든 자원을 수도권에 집중시키는 국정운영 방식을 전면 재검토해야 할 시점에 이른 것이다.

정치권과 정부는 예타제도를 '국가균형발전'이라는 시대적 과제에 맞춰 개선해야 한다. 소멸위기의 지방을 살리기 위해 웬만한 지방사업은 예타를 면제하거나 예타 대상을 최소화해야 한다. 또한 경제성 평가 비중을 훨씬 줄이고, 지역균형발전 부분을 더 중시해야 한다. 특히 국가재정법을 강화함으로써, 특별법을 만들어 예타조사를 빠져나가는 반칙행위도 원천차단해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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