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무형문화재 제136호 김영조 낙화장
국내유일기능보유자, 공모전 10여 차례수상
인두로 종이 나무 지져, 그림글씨문양 등 표현

국가무형문화재 제136호 김영조 낙화장 모습.
김영조 낙화장
김영조 낙화장

[보은]충북보은에는 전통예술 지키는 장인 국가무형문화재 제136호 김영조 낙화장이 있다.

낙화는 종이나무 가죽비단 등 표면에 두가지인두(평 인두와 앵무부리 인두)만을 사용하여 그림이나 글씨문양 등을 표현하는 전통예술로 낙화시원에 관한 정확한 기록은 없지만 우리나라는 고대부터 낙화가 있어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김 낙화장은 낙화 명맥을 보은전통문화보존회관서 보은공예인과 함께 공동작업실을 운영하며 낙화작업에 몰입하고 있다. 인두와 숯불로만 작품을 완성하는 낙화가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되며 전통예술로 위상을 들어내고 있다.

그가 처음낙화를 접한 것은 1972년이다. 학창시절부터 그림그리기를 좋아하는 그를 보고 미술선생님은 재능이 있다며 미술분야 진로를 권유했지만 집안형편상 미대를 진학하지 못하고 직장을 얻어야 할 무렵 우연히 본 광고가 평생 삶을 결정하도록 한 것은 낙화연구소연구생 모집광고였다.

취업이 보장된다는 광고내용에 무작정 찾아간 곳이 당시 서울에 위치한 낙화연구소는 낙화가 전창진씨가 운영한 학원이었다. 스승을 만난 셈이다. 그곳에서 낙화 소재인 사군자에서부터 화조, 산수, 인물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습득했다.

이를 기반으로 응용하거나 새로운 문양을 창출할 수 있도록 열심히 연습하며 다른 학생들보다 2년간 열심히 낙화에 몰두했다. 연구소가 문을 닫았지만 낙화장과 연습생들이 모여 사무실을 열고 낙화를 제작과 판매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낙화장은 낙화를 평생직업으로 삼기 시작했고 1977년 생애 첫 전시회를 가졌다. 이후 전국관광지를 떠돌며 낙화판매로 생계를 유지하다 보은속리산입구에 기념품상점을 열었다. 이곳에서 10여 년간 작품을 판매한 것이 보은에 자리잡는 계기가 됐다.

많은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낙화작업을 포기하지 않고 오히려 박물관이나 전시관 등 전통회화와 낙화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찾아가 그림을 감상하고 연구하며 회화도록에 나와 있는 유명화가의 그림을 낙화로 모사해 보기도 했다.

이 과정에서 나무에 낙을 하는 기술과 종이(한지)에 낙을 하는 기술에 차이가 있다는 것을 알게됐다. 종이경우 인두의 온도가 조금이라도 높으면 타기 때문이다. 인두 열로 그림선과음양을 나타내야 하기 때문에 고도기술이 아니면 표현하기가 어려웠다.

실패를 거듭하며 장기간 반복된 노력 끝에 종이 낙을 마음대로 표현할 수 있는 수준이 됐다. 2007년부터 전승공예대전에 낙화산수병풍을 출품한 것을 시작으로 각종공모전서 10여 차례수상하면서 존재를 알렸다.

전통낙화는 기능을 배우는데 오랜 시간이 걸리고 도구재료의 선택도 까다로운 편이다. 기계가 아닌 오직사람의 손에 의해 완성되기 때문이다. 무한한 인내와 끊임없는 정진이 아니면 불가능한 작업으로 낙화로 작업할 수 있는 전통산수, 인물, 동물, 글씨, 정물 등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가며 공예적 응용성과 회화적예술성 독창성을 늘 염두에 두고 있기에 낙화가 주목받고 있는 이유다.

이 같은 열정이 2010년 충청북도 무형문화재지정, 2018년 국가무형문화재 제136호로 지정되는 결과를 얻었다.

김영조 낙화장 기능보유자는 "오백 여년역사를 지닌 우리 전통예술낙화가 한국을 대표하는 예술로 거듭날수 있도록 최선을 다한다"는 그는 1972년 입문이래 1979년 청목 화랑(속리산) 개원, 대한민국전승공예대전 및 국제교류전 출품하는 등 활발한 작품활동과 폭 넓은 전승교육으로 전통낙화기법 계승과 저변확대에 기여하고 있다.
 

국가무형문화재 제136호 김영조 낙화장 작업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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