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돋보기] 쌓여 가다 보면

2025-11-24     
이수정 남서울대학교 실용음악과 교수

누군가 겨울날 하염없이 내리는 눈의 무게가 얼마냐고 묻는다면 뭐라고 대답할 수 있을까. 하늘 높은 곳에서 시작되어 손끝에 닿기도 전에 사르르 녹아버리는 눈송이의 무게라니, 말 그대로 미미하기 짝이 없다. 그러나 이 작디작은 눈이 한겨울 내내 묵묵히 버텨온 나무의 가지 위에 한 번, 두 번, 셀 수 없이 내려앉을 때, 그 나무는 어느 순간 더 이상 자신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뚝' 하고 부러지고 만다. 작은 것의 끈질긴 누적이 결국 거대한 변화를 일으키는 셈이다.

프랑스 작곡가 모리스 라벨(Maurice Ravel)은 바로 이 '눈송이의 힘'을 음악으로 증명한 사람이다. 그는 텅 빈 오선지 위에서 아무것도 아닌 듯 가볍게 시작되는 리듬 하나로 음악사에 남을 명곡을 완성했다. 1928년, 라벨은 눈송이에 해당하는 단 하나의 리듬 '스네어드럼'의 집요한 반복을 고안했다. 곡의 시작부터 마지막 순간까지 쉼 없이 이어지는 이 리듬은 마치 폭설이 내리는 날, 멈추지 않고 쌓여가는 하얀 눈처럼 끊임없이 축적된다.

여기에 고혹적인 플루트의 선율이 얹히고, 다양한 관악기의 음색이 차곡차곡 더해지며 음악은 서서히 부피를 키운다. 오케스트라의 모든 악기가 총동원되는 순간, 우리는 어느새 처음에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거대한 눈덩이'를 마주한다. 음악은 점점 커지고 또 커지며 자연스럽게 정점에 도달한다. 그리고 '뚝' 눈에 짓눌린 나뭇가지가 끊어지듯 강렬한 여운을 남기고 사라진다. 이 눈의 축적에서 탄생한 작품, 바로 라벨의 명곡 '볼레로(Bolero)'다.

그렇다면 나의 눈꽃송이는 무엇일까. 우리는 모두 하루 24시간 동안 저마다의 눈송이를 쌓으며 살아간다. 크든 작든, 보잘것없는 듯 보이든, 우리의 습관과 루틴은 늘 우리 곁에 쌓이고 있다. 무념무상으로 바늘질을 하다 보면 어느새 실타래가 제법 굵어진 편물이 되어 있고, '이것만 하고 자야지' 하며 게임을 한 번, 두 번 켜다 보면 어느 새 검은 밤이 창문을 덮는다. 어떤 이들은 해야 할 일을 내일로, 또 내일로 미루며 아직 오지도 않은 미래에 눈송이를 허공에 쌓기도 한다. 이렇게 작은 행동들이 모이고 모여 결국 커다란 모습을 이룬다.

라벨이 '볼레로'를 세상에 내놓았을 때, 평단과 대중의 반응은 차가웠다. 음악이 없는 빈껍데기에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반복만이 존재하는 곡이라고 평가했기 때문이다. 라벨의 마음은 어땠을까. 수십 번의 퇴고 끝에 겨우 완성한 악보 앞에서, 그는 어쩌면 자신만은 확신하고 있던 작은 눈송이의 힘이 세상에서 외면받는 듯한 허탈함을 느꼈을지도 모른다. 애써 쌓아 올린 노력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툭툭 차이는 순간의 그 조롱의 무게를 견뎌내기 위해 라벨은 강하게 자신의 내면을 붙들었을 것이다.

그런 모습을 상상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우리의 이야기로 이어진다. 작은 노력을 차곡차곡 쌓아가는 과정에서 때로는 의심과 비난, 혹은 스스로의 회의감이 우리를 흔들기도 한다. 나무가 부러지기 전 먼저 우리의 어깨가 내려앉을 것만 같은 순간들. 이때 필요한 것은 특별한 재능이 아니라 흔들려도 무너지지 않는 꾸준함이다. 그래서 우리는 본능적으로 그런 정신력을 떠올린다. 김연아 선수처럼, 흔들리는 빙판 위에서도 자신만의 루틴을 한 치의 오차 없이 지켜내는 단단한 멘탈. 그 위에 열정 한 스푼을 얹고, 바람에 날아가지 않도록 우리를 붙잡아 주는 든든한 동료·가족·협력자들과 함께 하루를 쌓고 내일을 쌓다 보면, 결국 눈송이들이 만들어 낸 '부러짐의 순간'을 우리도 마주할 수 있으리라.

지금은 열매 맺는 가을이다. 혹시 내 안의 작은 발걸음이 멈춰 서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며, 오늘만큼은 라벨의 '볼레로'를 들으며 용기 있게 한 발 나아가 보면 어떨까. 색색의 삶의 열매들이 오늘 하루를 아름답게 채우기를, 그리고 언젠가 나를 단단하게 만든 나뭇가지가 멋지게 '부러지는 순간'을 경험하기를 기대하면서 말이다. 이수정 남서울대학교 실용음악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