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일논단] 물리적 성장 너머의 과제

이공계 기피 현상, 과기계 문제 함축 사회 소통 능력·공적 책임 의식 부족 수직적 구조 완화·자율성 회복 시급

2025-11-24     
최호철 한국화학연구원 국가전략기술추진단장

2000년대 초, 우리 사회는 이공계 진학 기피 현상과 함께 과학기술자 집단의 위상 하락 문제에 직면했다. 국내 주요 이공계 대학에서 지원율이 하락하고, 과학기술계 직업에 대한 선호가 낮아지는 현상은 단순한 입시 변화로 보기 어려웠다. 이공계에 대한 선호도는 과거에 비해 높아졌지만, 최근에는 상위권 수험생들이 의학 계열로 몰리는 현상이 두드러지며 공학과 기초과학 분야의 상대적 기피와 이공계 인력의 질적 하락에 대한 우려가 제기되고 있다.

최근 10년간 해외로 유출된 국내 이공계 인재가 30만 명이 넘는다는 얘기도 들린다. 이 같은 흐름은 입시 제도나 고용 시장의 문제를 넘어서, 과학기술자 사회가 오랜 시간 누적해 온 구조적 모순과 정체성의 위기를 상징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즉, '이공계 위기'라는 말은 단지 특정 세대의 진로 선택을 넘어, 과학기술자라는 사회 집단이 지금 어떤 지점에 서 있는지를 되묻는 물음이기도 했다.

한국의 과학기술자 집단은 산업화 시기에 국가 주도의 전략 아래 급격히 성장했다. 정부출연연구기관과 같은 조직들이 잇따라 설립되며 전문 인력이 대거 양성됐고, 이는 기술 수입과 응용을 통한 경제발전 전략과 맞물려 있었다. 이 과정에서 과학기술자들은 국가적 목표 달성의 실행자로 자리매김 했다. 따라서 이들의 역할은 경제발전에 대한 기여로 집중됐고, 그 사회적 정체성은 스스로 규정하기 어려운 상황에 놓였다.

하지만 1990년대 이후, 기술 선도국으로 전환이 요구되며 추격형 연구에서 벗어나 창의성과 자율성이 중시되는 혁신 체제가 강조되기 시작했다. 이 전환기에 과학기술자 사회는 새로운 역할을 요구받게 됐지만, 기존 제도와 문화는 그에 걸맞은 변화를 빠르게 수용하지 못했다. 과학기술자가 처한 환경은 변했지만, 그들을 둘러싼 지원 체계, 사회적 평가, 내부 조직문화는 정체되어 있었다.

결과적으로 '이공계 기피'는 단순한 진학률 저하를 넘어, 과학기술계 전반에 내재한 구조적 긴장을 드러내는 사회적 신호였다. 대학, 정부 연구기관, 산업계 등 과학기술자 집단 내부의 세분화는 공통된 목소리를 내기 어렵게 만들었고, 과학기술계를 대표하는 집단이나 의사 결정력이 부족하다는 점이 위기를 더욱 심화시켰다.

한편, 과학기술계 내부에서도 성과와 자원의 편중 문제가 지적됐다. 연구 성과가 소수의 상위 집단에 집중되고, 이들이 더 많은 기회를 차지하면서 신진 연구자나 중간층 과학기술자들은 상대적 박탈감을 경험하며 연구 활동에 대한 동기를 잃기 쉬웠다.

이러한 문제들을 종합적으로 바라볼 때, 이공계 위기는 단지 외부 요인에서만 비롯된 결과가 아니다. 그 이면에는 과학기술자 사회 내부의 자기 성찰 부족과 정체성의 부재가 자리하고 있다. 기술적 전문성에 자부심을 가지면서도, 사회와의 소통이나 공적 책임에 대한 인식은 부족한 경우가 많았다. 과학기술자들은 자신을 전문가로 규정하면서 공공 영역과 일정한 거리를 두는 경향을 보였고, 이는 정치적 대표성의 부족과 사회 전반에서 과학기술자의 존재감을 희석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결국, 한국 과학기술자 사회는 물리적 성장을 넘어, 내면의 성숙과 재구성이 필요하다. 지식 생산의 주체로서 자율성 회복, 사회적 공감과 소통 능력 확대, 그리고 내부의 수직적 구조 완화가 병행돼야 한다. 과학기술은 더 이상 폐쇄된 연구실 안의 일이 아니다. 공공의 이익과 미래 사회에 이바지하는 방향으로 과학기술자의 역할이 재정립돼야 하며, 그 기반은 자기 성찰과 집단적 책임의식에서 비롯될 것이다.

물론 제도적 보완과 정책적 대응도 중요하다. 그러나 보다 근본적인 해법은 과학기술자 사회 내부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과학기술자들이 앞으로 사회 안에서 어떤 위치에 서서 무엇을 지향할 것인지, 그리고 어떤 가치를 실현할 것인지를 진지하게 성찰할 때, 이공계 위기는 새로운 가능성의 출발점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최호철 한국화학연구원 국가전략기술추진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