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줌인] 평민출신 의병장… 신출귀몰 유격전술로 놀라운 전과

광복 80주년 기념, 충청의 독립운동가와 그 발자취 42) 청주 출신 한봉수 수십차례 매복 기습, 일제군경 두려움에 떨어 1910년 체포돼 사형선고, 사면으로 목숨 부지 1919년에도 만세운동 주도 징역1년 옥고 치러

2025-11-23     김재근 선임기자
충북 청주시 청원구 내수읍 학평리 85-4에 조성된 한봉수의병장 사적지.

충북 청주 출신의 의병장 청암 한봉수는 매우 독특한 항일 독립투쟁가이다. 이 땅에서는 1895년 명성황후가 시해당하고 단발령이 내려졌을 때 을미의병, 1905년 을사늑약에 분노하여 을사의병, 1907년 고종의 퇴위와 대한제국 군대의 해산에 반발하여 정미의병이 일어났다. 대개 유림이나 전직 관료와 군인이 병사를 모으고 부대를 편성, 지방의 주요 도시와 성을 공격했다.

청주 출신 의병장 청암 한봉수

한봉수는 기존의 의병과는 전혀 다른 전술로 전투를 벌였다. 많은 군사를 모아 부대를 이끌고 전면전을 벌인 게 아니라 상황과 지형에 따라 서너명 혹은 수십명 단위로 부대를 꾸려 신출귀몰하듯 게릴라전을 전개했다. 일제 군경을 습격하여 죽이고, 친일파와 헌병보조원, 밀정을 처단했으며, 우편물을 빼앗고 지역의 부호들로부터 군자금도 모금하였다. 전력이 우세한 일제에 정면으로 맞서기보다는 매복과 기습, 회피와 도주 등 기동성을 무기로 맞서 싸웠다. 치밀한 정보를 바탕으로 민첩하고 교묘한 전술로 일제를 공격했고, 이 때문에 일제는 그를 매우 두려워했다.

청암 한봉수는 1884년 충북 청주시 청원구 내수읍 세교리에서 태어났다. 선대는 고려말-조선중기까지 권문세족이었으며 고관을 지낸 사람도 많았으나 17세기 이후 후손들은 평범한 상민으로 지냈다.

1960년 한봉수 의병장 가족사진. 자료=독립기념관

아버지가 일찍 세상을 떠나 가난했으며, 8세 때부터 서당에서 한학을 배웠다. 청년 시절 괴산군 청안면 장암에 있는 솜 공장에서 일했다. 그러던 중 1907년 청주 진위대 출신 군인 김규식을 만나 항일투쟁의 길로 들어선다. 진위대는 대한제국 시기 지방과 국경에 설치된 군사조직이었다. 1907년 8월 일제가 군대를 해산하자 진위대원들이 곳곳에서 항일 무장투쟁에 나섰던 것이다.

청주시 내수읍 학평리 묘 옆의 의병장 청암 한봉수공 묘비

한봉수와 김규식은 해산 군인 100여 명을 모아 '왜적구축대'라 칭하고 충청북도 곳곳에 출몰하여 일제 경찰과 수비대를 공격했다.

1967년 청주 중앙공원 송공비(공적비) 건립 행사에 참석한 한봉수 의병장습. 자료=독립기념관

9월 15일 미원에서 청주수비대와 교전했으며, 10월에는 문의군을 습격하여 군수를 처단하고, 분파소(파출소)의 물품을 탈취했다. 12월에는 세교리 장터에서 일본인 금광업자의 집을 습격하여 불태우고 재물을 빼앗았다. 세교장에서 우편물을 습격하고, 미원에서 경찰대와 교전을 벌이기도 하였다.

충북 진천군 문백면 옥성리 546-15에 세워진 의병장 청주한공봉수 항일 의거비. 1908년 6월 한봉수 부대가 우편물을 호송하던 일본 헌병 시마자키를 사살한 곳이다. 사진=진천문화원
일제가 한봉수부대의 공격으로 사망한 시마자키 상등병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석. 위쪽에 한봉수 항일 의거비를 조성했다.

1908년 1-2월에는 세교장에서 일진회원을 처단했으며, 김명심 등과 함께 산내일면 판교리의 홍모, 묵방리의 이종익에게 군자금을 모금했다. 4월에는 김규환 등 20여 명과 함께 세교에서 우편물을 습격했다. 체송인(배달부)이 도주하자 현금 3000원을 탈취, 지폐는 군자금으로 쓰고 은화와 동화는 주민들에게 나눠줬다. 6월에는 김규환 석성국 등과 함께 초정리 산기슭에 매복, 말을 타고 우편물을 호송하는 일본 기병 2명을 기습했다. 1명이 총에 맞아 죽고 1명이 도주하자 우편물을 탈취, 2000원을 확보했다. 6월에는 오근장-진천군에 이르는 도로에서 일제 헌병을 습격했다. 헌병 2명이 지나가는 것을 보고 보리밭에 숨었다가 총격을 가해 상등병 시마자키를 죽였다. 7월 이후에는 김규환과 떨어져 부하 수십명으로 독립부대를 조직, 투쟁을 계속하게 된다.

이 무렵 일제는 한봉수를 체포하지 못한 채 궐석재판을 진행, 1908년 11월 공주지방재판소에서 사형을 선고했다.

충청북도 괴산군 사리면 수암리에 세워진 모래재의병격전유적비. 한봉수 의병장이 1909년 6월 일본군을 기습한 곳이다. 사진=독립기념관

1909년 2월에는 부하 1명과 함께 북강외일면 양지리 김상희의 아들을 납치, 2차례에 걸쳐 9백원을 받아냈다. 6월에는 한춘산으로 하여금 북강외이면 백자동에 사는 방인재를 처단케 했다. 방인재는 한봉수가 군자금을 요구하자 경찰서에 밀고하여 한봉수의 부하 2명을 체포하게 한 자였다. 6월 29일에는 부하 이정구 등과 괴산군 사치(모래재)에서 우편물을 호위하는 일본군 2명을 매복 공격, 1명을 사살했다. 여기서 군용총 2정, 총검 2개, 탄약 90발을 획득했다. 9월에는 부하 이정구 등과 함께 북강내이면 화죽동에 사는 헌병대 밀정 박래천을 참살했다.

모래재의병 격전 유적비의 뒷면.

부하 30여명과 함께 경북 상주로 가서 배신자 2명을 처단한 것도 눈길을 끈다. 한봉수 부대는 의병의 일원인 정화춘과 전경모가 일제와 밀통, 의병의 거처를 알려준 죄를 묻고 도로 위에서 죽였다.

일제의 기습을 받는 일도 겪었다. 조운식 등 500여 명과 함께 강원도 영천군의 한 주막에서 식사하던 중 일본군에게 포위 공격을 당한 것이다. 한봉수 부대는 동료 5명의 사체를 버리고 탈주했다.

충북 청주시 청원구 내수읍 세교리 197-1 한봉수 생가. 1970년 당시 사진으로 현재는 상가가 들어섰다. 자료=독립기념관

군자금 모금활동도 계속 벌였다. 부하들과 함께 의병의 취지를 알리는 문서를 갖고가 청주군 청천면 면장 진필오에게 30원, 산외이면 면장 홍모에게 30원을 확보했다. 북강내이면과 서강내이면에서도 군자금을 모금했다.

한봉수 의병은 1907년 9월부터 1909년 말까지 26차례나 무장투쟁활동을 벌였다. 일제가 파악한 것만 그렇고, 당시 청주 세교 청안 등에서 일어난 정체 불명의 의병활동도 대부분 한봉수 부대의 행위로 추정된다.

청주시 청원구 내수읍 학평리 한봉수의병장 사적지에는 묘소가 조성 돼있다. 사진=김재근기자

한봉수 의병은 동에 번쩍 서에 번쩍 기민하고 대담한 유격전술로 일제를 괴롭혔다. 일제는 '조선폭도토벌지'에 "그들은 연월(시간)이 지나면서 한층 더 교묘해졌다. 첩보술과 경계술은 놀랄 만큼 진보되고, 행동도 더욱 민첩해져 때로는 우리 토벌대를 우롱하는 듯하다. 그 세력이 때로 축소되거나 확장된다 해도 결코 경시할 수 없으니, 과연 언제 완전히 평정할지 우려스럽다."고 적고 있다. 당시 한봉수 부대는 충청권에서 가장 강력한 항일 군사조직이었던 것이다.

그는 1910년 2월 오송리에서 의병 활동을 벌인 뒤 잠적한다. 일제가 집요하게 추적했고, 가족들을 괴롭혔기 때문이다. 충북을 떠나 서울의 처가로 피신한 그는 더 이상의 도주와 은신이 불가능하다고 판단, 충북경찰에 자수 의사를 전달했다. 그러나 일경은 자수 의사를 무시하고 순사를 보내 5월 15일 체포하기에 이른다.

한봉수에게 교형(목을 매달아 죽임)을 선고한 1910년 6월 29일 공주지방재판소의 기록. 자료=독립기념관
한봉수의 공주지방법원 재판 문서.

한봉수는 1910년 6월 공주지방재판소 청주지부에서 내란 수괴죄로 교수형을 선고받았다. 1908년 11월 공주지방재판소의 궐석재판에서도 이미 교수형을 선고받은 터였다. 한봉수는 사형 집행을 기다리다 뜻하지 않게 풀려나게 된다. 1910년 9월 한일합방(경술국치)이 이뤄지자 조선총독부가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독립운동가 등 348명을 사면한 것이다.

석방 이후 그는 내내 일제의 감시와 탄압을 받았다. 일제 고위관료의 행차가 있을 때마다 가택연금을 당했다고 한다.

그런 가운데도 항일 독립의지는 꺾이지 않았다. 1919년 홍명희와 함께 고종의 장례에 참여하기 위해 상경했다가 손병희를 만났다. 손병희로부터 3.1만세운동 계획을 전해들은 그는 고향에 내려와 4월 1일 세교리 장터와 2일 내수보통학교 학생 만세시위를 이끌었다. 이 사건으로 체포돼 징역 1년의 옥고를 치렀다.

청주시 문의면 대청댐 문의문화재단지 안에 독립운동가 7인의 조형물이 있다. 이 중의 하나가 한봉수 의병장 동상. 김재근 선임기자
청주시 상당공원내 한봉수의병장 동상. 사진= 독립기념관
충북 청주시 상당구 남문로 2가 중앙공원 의병장한공봉수 송공비. 김재근 선임기자

한봉수는 해방 이후-1972년 작고할 때까지 청주시 내덕동에서 조용히 지냈다. 자신의 활동을 자랑하거나 알리지 않아 1970년대에 이르러서야 주목을 받게 됐다. 학계는 그의 무장투쟁을 높게 평가한다. 전문적인 군사교육을 받은 적이 없지만 최적화된 유격전술로 놀랄 만한 전과를 거뒀다. 주민들의 민심을 얻어낸 것이나, 강원 경북까지 폭 넓게 활동한 점, 연해주 의병부대와 연계하여 노령으로 가고자 한 점 등은 그의 전략적 사고와 안목을 엿보게 한다. 무장의 맥이 이어졌는지 그의 손자인 한민구가 국방장관을 오른 것도 이채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