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년전 오늘] 내연녀 위장결혼 내세워 '5억 보험살인'…25년 전 옥천의 비극

2025-11-14     황희정 기자
1999년 11월 10일 충북 옥천 안내면 인포리 대청호 인근 공터에 세워진 승용차 안에 한 30대 남성의 시신이 발견된 모습. MBC 뉴스 캡쳐

늦가을 안개 낀 대청호변 갈대밭 한가운데, 문이 잠긴 작은 승용차 한 대가 이틀째 같은 자리에 서 있었다.

"이틀 전부터 보였는데 오늘 아침에도 있길래 자세히 봤더니 차 안에 사람이 있는 것 같아서요"

낚시를 나온 중년 남성 둘은 불길한 예감에 파출소 문을 두드렸다.

이 신고 한 통이 이후 '보험금을 노린 연쇄 살인'의 실체를 드러내는 출발점이 됐다.

◇대청호변 승용차 안 시신…"단순 사고가 아니다"

1999년 11월 10일 오전, 충북 옥천 안내면 인포리 대청호 인근 공터에 세워진 티코 승용차 안에서 34세 남성 김 모 씨가 숨진 채 발견됐다. 운전석에 앉은 채 조수석 쪽으로 쓰러져 있던 시신에는 겉으로 드러난 큰 외상이 없었다.

그러나 차량 열쇠와 지갑, 휴대전화, 유서 등이 모두 없다는 점, 낚싯대와 떡밥이 그대로 남아 실제 낚시는 시작도 못 한 정황, 부서진 사이드미러와 주변 지형의 불일치 잇따라 확인됐다.

부검 과정에서는 시신의 시반(사후 혈액이 고이면서 생기는 피부의 반점) 위치가 발견 당시 자세와 맞지 않는다는 사실도 드러났다.

검안의는 "사망 후 한 차례 이상 시신이 옮겨진 흔적"이라고 판단했고 경찰은 '시신 이동이 수반된 타살 사건'으로 수사를 전환했다.

◇내연녀를 '아내'로 앉힌 위장 결혼…수상한 보험 가입 5건

숨진 김 씨는 사건 두 달 전인 1999년 10월, 자신의 옛 직장 동료이자 인쇄소 사장이었던 강 모(당시 29) 씨로부터 23세 여성 김 모 씨를 소개받았다.

강 씨는 평소 김 씨와 내연 관계였으며, 채무에 시달리던 상황에서 '보험 사기' 대상으로 직장 동료 김 씨를 선택했다.

강 씨는 내연녀를 피해자에게 소개해 상견례와 결혼식 없이 혼인신고만 하도록 만들었다. 실제 동거 기간은 20일도 채 되지 않았다.

혼인신고 직후, 내연녀 김 씨는 남편 명의로 운전자·교통사고 보험 5건을 연달아 가입했다.

수익자는 모두 아내 김 씨였고 교통사고로 사망할 경우 지급되는 보험금은 최대 5억 7000만 원에 달했다.

남편 월급은 135만 원이었지만 부부가 납부해야 할 보험료는 한 달 70만 원을 넘었다.

특히 마지막 보험 가입 3일 뒤 남편이 실종되면서 경찰은 "보험 가입-사망"이 촘촘히 맞물리는 점에 주목했다.
 

강 씨가 내연녀 김 씨와 함께 쓴 유서. E채널 프로그램 '용감한 형사들4' 유튜브 캡쳐

◇남편 살해 뒤 내연녀까지 제거…부산 모텔에서 '위장 자살'

수사가 강 씨와 내연녀 김 씨를 향해 좁혀지자, 강 씨는 범행 은폐를 위해 내연녀까지 살해하기로 마음먹었다.

1999년 11월 22일 밤, 강 씨는 김 씨를 "바람 쐬러 가자"며 부산 영도구 동삼동의 한 여관으로 유인했다.

여관 투숙 후 강 씨는 "같이 죽자"며 유서를 쓰게 한 뒤, 김 씨에게 소주를 마시게 하고 수건으로 목을 눌러 실신시킨 다음 오른쪽 손목 동맥을 흉기로 그어 숨지게 했다.

현장은 자살처럼 꾸며졌지만 부검 결과 '경부 압박에 의한 질식사', 즉 타살이었다.

여관방의 유서·소주병과 대청호 차 안의 떡밥 포장지에서 강 씨 지문이 공통으로 검출되면서 남편과 내연녀 살해 모두 강 씨가 지휘한 사실이 드러났다.
 

MBC 뉴스 캡쳐

◇인쇄소 방화·아내 교통사고까지…'보험금 사냥꾼'의 치밀한 수법

경찰은 강 씨 주변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이전에도 보험금을 노린 범행이 반복됐음을 확인했다.

강 씨는 1998년 9월 자신이 운영하던 대전의 한 인쇄소에 친구 임 씨, 유 씨 등을 시켜 고의로 불을 지르게 하고 화재보험금을 4900만 원가량 수령했다.

이 과정에서 공범 중 한 명은 온몸에 화상을 입었지만, 강 씨는 약속했던 대가를 제대로 건네지 않은 채 잠적한 것으로 조사됐다.

또 1999년 5월에는 아내 명의로 교통사고 안전 보험을 여러 건 가입한 뒤 주말·휴일 사고 시 보험금이 두 배로 지급되는 특약까지 걸어둔 상태에서 '고기를 사 오라'며 아내를 밖으로 내보냈다. 아이를 업고 길을 걷던 아내는 갑자기 달려온 차량에 치여 전치 16주 다리 골절을 입었고 이 사고로 지급된 1800만 원 상당의 보험금은 모두 강 씨가 챙긴 것으로 드러났다.

결국 경찰은 옥천 대청호변 남편 사망 사건, 부산 여관 내연녀 살해 사건, 인쇄소 방화, 아내 교통사고까지 모두 강 씨가 설계한 '보험금 연쇄 범죄'로 결론 내렸다.

강 씨의 주변에는 언제나 보험증권과 채무, 그리고 이용당한 사람들의 이름이 남았다.
 

체포된 강 모(당시 29살) 씨의 모습. MBC 뉴스 캡쳐

◇6개월 도피 끝 검거…"보험 범죄는 언젠가 반드시 드러난다"

부산 사건 이후 강 씨는 잠적했지만 또 다른 내연녀를 이용해 도피자금을 마련하려다 동선을 노출했다.

경찰은 강 씨 은신처 열쇠를 확보해 2000년 2월 중순 대전의 한 아파트에서 그를 검거했다.

강 씨는 조사 과정에서 범행 대부분을 자백했다.

다만 내연녀 살해에 대해선 "죽여달라 해서 들어 준 것"이라며 '촉탁 살인'을 주장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법원은 강 씨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1심과 2심, 대법원을 거치는 동안 강 씨는 "범행의 일부는 계획적이지 않았다"며 끝까지 항소했지만 재판부는 "개전의 정이 전혀 없다"며 2001년 사형을 확정했다.

강 씨는 현재까지도 사형 미집행 상태로 25년째 복역 중이다.

당시 수사 관계자들은 "돈 몇 억 원을 위해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생명을 잇달아 빼앗은 사건"이라며 "보험 범죄는 언젠가 반드시 드러난다"는 말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