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요광장] 문화유산 지키는 과학기술
애니매이션 영화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열풍이 뜨겁다. 제목을 줄여 케데헌이라고 부르는 이 영화는 미국 소니 픽처스에서 제작하고, 넷플릭스를 통해 개봉했다. 케이팝, 그리고 한국의 풍경과 문화적 요소가 한가득 담긴 이 영화는 수십 개 나라에서 흥행 1위를 기록했으며, 최근 넷플릭스 역대 영화 시청 순위도 1위에 올라섰다. 영화 제목처럼 케이팝 스타일의 영화음악도 엄청난 성공을 거뒀다. 주인공 삼인조 걸그룹 헌트릭스가 부른 노래 '골든'이 미국 빌보드 핫100과 영국 싱글 차트 1위를 동시에 차지하고 다수의 곡을 순위에 올렸는데, 이는 케이팝을 대표하는 그룹인 BTS나 블랙핑크도 이루지 못했던 업적이다.
영화에 등장하는 까치와 호랑이도 관객의 사랑을 받고 있다. 까치와 호랑이의 조합은 작호도(鵲虎圖) 또는 호작도라고 부르는 조선 시대 민화에서 모티브를 얻은 것이다. 평민을 상징하는 까치가 내려다보는 가운데, 힘과 권력의 상징인 호랑이를 우스꽝스럽게 묘사해 양반과 권력층을 풍자하는 것인데, 부끄럽게도 필자는 감독 인터뷰를 통해서야 그 의미를 알게 됐다.
케데헌은 국립중앙박물관(국중박)에 때아닌 호황을 몰고 왔다. 그렇지 않아도 아시아에서 가장 인기 있는 박물관이었는데, 한국 문화에 관심을 가진 관람객이 더 늘어나고, 기념품 가게의 까치와 호랑이 배지가 불티나게 팔려나가고 있다고 한다. 박물관의 온라인 쇼핑몰에서도 인기 상품들은 품절 행진을 거듭하는 중이다. 국중박의 기념품은 만들기가 어렵고 비싸더라도 모두 국내산을 고집한다고 하니, 나라의 자존심을 지키고자 하는 국중박에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그런데 국중박에는 관람객이 만들어 내는 지상의 소음과 대비되는, 고요함이 감도는 비밀스러운 지하 구역이 있다. 전시되지 않은 문화유산을 보관하는 수장고와 전시물을 복원하고 보존 처리하는 장소이다. 작호도와 같이 한지나 비단 위에 그려진 작품은 아무리 조심스레 취급하고 온습도 조절을 잘해도 언젠가는 색이 바래고, 때로는 미생물의 공격을 받아 손상을 입는다. 그러므로 첨단 장비를 사용해 검사하고, 망가진 부분은 보수하고, 전문가들이 색을 새로 칠해줘야 할 필요가 있다. 이곳에서는 문화유산이란 단순히 선조들이 후손들에게 남겨 놓은 선물이 아니라, 선조와 후손이 시간을 뛰어넘어 공동으로 하는 작업의 산물임을 느낄 수 있다.
당연하게도 세계의 문화 대국은 문화유산을 연구하고 보존하는 데 큰 노력을 쏟으며, 그 나라의 최신 과학기술을 총동원한다. 프랑스에서는 이미 50년 전부터 원자력 기술을 문화유산 연구와 보전에 활용하는 조직, 아르크-누클레아르(ARC-Nucleart)를 운영하고 있다. 이 조직은 감마선을 이용해 람세스 2세의 미라나 타이태닉호에서 건져낸 물건들을 보전 처리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걸로도 부족한지 관람객 세계 1위를 자랑하는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은 고가의 입자 가속기까지 자체적으로 갖추고 문화유산 검사 도구로 사용하고 있다.
우리나라 현실은 어떨까. 우리도 해방 이후 문화유산 보전에 많은 성취를 이뤘으나, 아쉬운 부분도 분명 남아있다. 일례로 작품 보수에 사용하는 비단은 모두 일본에서 수입하는 실정이다. 수백 년 전 작품을 보수하는데 바래지 않은 새 비단을 쓸 수 없는 노릇이다. 따라서 방사선 처리를 통해 인위적으로 나이를 먹도록 한 재료를 사용해야 하는데, 아직 국내 기술은 충분하지 않다고 한다. 그간 경제 발전에 몰두하느라, 과학기술을 문화와 환경과 같은 분야에 적용하는 데까지는 두루두루 관심이 미치지 못한 탓이다.
작년 한국원자력연구원에서 국가 유산 원자력 클리닉을 공식적으로 발족시킨 것은 그런 의미에서 하나의 이정표가 되리라 기대한다. 병원에서 검사와 치료에 방사선을 활발히 활용하듯, 문화유산을 위해서도 방사선 기술의 쓰임새는 무궁무진하다. 이 클리닉의 첫 사업이 문화유산의 보수에 사용할 비단의 국산화라고 하니, 앞으로는 국중박의 기념품뿐만 아니라 문화유산 보존도 '국산화'가 되길 기대해 본다.
박승일 한국원자력연구원 책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