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덕포럼] 'PBS 폐지' 출연연, 국책연구기관 거듭나야

2025-08-12     
김태진 정보통신기획평가원 수석연구원

정부가 정부출연연구기관(출연연)의 인건비를 외부 과제 수주로 충당하던 연구성과중심제(Project Based System, PBS) 제도의 폐지를 선언했다. 국정기획위원회의 이 같은 결정은 지난 30년간 과학기술계의 자율성과 창의성을 가로막아온 구조적 병폐를 바로잡을 전환점이다. 단순한 행정 개편을 넘어 우리나라 연구개발(R&D) 생태계를 새롭게 재설계할 출발점이 되기를 기대한다.

PBS는 1989년 상공부(현 산업부)가 공업기반기술개발사업을 추진하며 도입했고, 1996년부터 출연연 전반에 확대 적용됐다. 이 제도 아래서 출연연은 인건비의 일부만 정부로부터 지원받고, 나머지를 과제 수주로 메워야 했다. 그 결과 연구자는 안정적인 연구보다는 과제 확보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고, 출연연은 장기적 국가 전략 연구보다 단기 성과중심의 실용 연구에 치우쳤다. 더 큰 문제는 PBS가 한국 R&D 생태계를 '관료 중심'으로 고착화시켰다는 점이다.

각 정부 부처는 부처별 실링 예산으로 자신들의 요구에 맞는 연구과제를 기획하고, 이를 관리하고 사업에 참여할 산하 유관기관과 협의체·단체들을 만들었다. 여기에 기업 대학 민간연구소까지 경쟁에 가세하며, 출연연은 과제 수주를 위한 무한 경쟁에 내몰렸다. 매년 정부 주도의 수천 개의 과제가 쏟아지는 가운데, 연구는 점차 형식적인 결과로 마무리됐다. 정부는 대형 사업을 만들 때 부처 중심의 별도의 사업단을 만들기도 했다. 현재 70여 개 사업단이 운영 중이다. 사업의 성과나 후속 관리는 사업단 해산 이후 부처별 전문기관의 역할이 된다. 이러한 국책 연구사업 추진 과정에서도 출연연의 역할은 미흡했고, 경쟁에 의한 연구과제 수행기관의 역할이 대부분이었다. 국책연구기관으로서 국가 핵심 전략 기술을 선도해야 할 출연연의 위상은 손상됐고, 전반적인 국가 연구의 질도 함께 저하됐다. 지식은 축적되지 않았고, 연구자의 창의성과 자율성은 제도 속에서 희미해졌다.

출연연 인건비 PBS 폐지를 계기로 국가 R&D 생태계 전반의 혁신을 기대해 본다. 그리고 국책연구기관으로 출연연의 위상 재정립을 위하여 몇 가지 방안을 제안한다.

첫째, 출연연 임무의 법적 권한과 책임을 강화해야 한다. 국가의 미래를 좌우할 전략기술에 대한 기술적 판단은 책임 있는 기술 전문가 집단인 출연연이 맡는 게 타당하다. 국가전략기술 연구수행 중심에 출연연이 있어야 한다. 국책연구기관으로의 당연한 위상 정립이다. 이를 위한 법제화가 시급하다.

둘째, 국가 R&D 거버넌스에 출연연의 지위를 제도화해야 한다. 국가과학기술자문회의 등 최고 의사결정기구에 출연연 기관장들이 당연직으로 참여하고, 부처별 주요 R&D 심의기구에 출연연의 조직적 참여를 제도화해야 한다.

셋째, 출연연 내부의 강도 높은 자기혁신도 병행돼야 한다. PBS에 길들여진 관료적 조직문화, 출연연간 부서간 장벽, 과제수주 위주의 연구 풍토는 근본적으로 개편돼야 한다. 연구자율성을 확보해 스스로 연구의 투명성과 공공성(기록과 공개)을 높이고 민간·대학 등 타 연구집단과 차별화되는 윤리성을 강화해야 한다. 국책연구기관으로서 연구 본연의 역할에 집중할 수 있도록 조직을 혁신하고, 융합적 연구 환경 마련이 필요하다.

출연연의 PBS는 한 시대의 제도였지만, 이제는 수명을 다했다. 연구는 과제가 아니라 질문에서 출발해야 한다. 국가가 쏟아낸 수많은 과제 속에서 질문이 사라졌고, 그 결과가 과학기술의 정체였다. 이제 출연연은 국책연구원으로의 본연의 자리로 돌아가야 한다. PBS 폐지는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어야 한다. 이번 결정을 계기로 출연연이 다시 국가 R&D의 중심으로 우뚝 서기를 바란다. 김태진 정보통신기획평가원 수석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