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줌인] 아나키스트 이론가… 독립운동·혁명·농업 독특한 이력
광복 80주년 기념, 충청의 독립운동가와 발자취 (27) 충주 출신 유자명 의열단 주도, 일제에 암살·파괴 폭력투쟁 불사 광복후 귀국 실패, 중국 근대농업 발전 큰 영향 남북 공인 독립운동가… 중국정착 이유 저평가
유자명은 '숨은 인물' '배후 인물' 같은 독특한 독립운동가이다. 광복을 위해 의열단과 아나키스트 운동, 상하이 임시정부에서 열렬하게 일했지만 크게 도드라지지 않는다. 빼어난 실력을 갖춘 이론가로서 널리 소통하고 아우르면서 치밀하게 매사를 추진했다. 목적을 이루기 위해 묵묵히 비밀스럽게 기획하고 준비하고 지원하는데 힘을 쏟았다.
유자명은 1894년 충주시 이안면에서 태어났다. 충주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수원농림학교(서울대 농대 전신) 입시에 실패했지만, 서울에서 1년 공부한 뒤 1913년 이 학교에 입학했다. 1916년 수원농림학교 졸업한 그는 고향의 충주간이농업학교 교원으로 일했다.
1919년 3.1 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자 농업학교 학생들과 충주 장날에 만세운동을 벌이기로 했으나 한 학생의 밀고로 무산됐다. 위기를 느낀 유자명은 서울로 피신, 지인의 집에 머물렀다. 이때 만세운동에 참여했던 고향 친구 이병철을 만나 대한민국청년외교단에 참여했다. 외교단은 조소앙의 친동생 조용주와 이병철 안재홍 등이 만든 비밀 항일운동 단체로 본부를 서울에 둔 채 상하이 임시정부와 연락을 취하고, 국제적으로 독립을 인정받기 위해 각국에 조직원을 보냈다. 유자명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협력하기 위해 1919년 6월 상하이로 건너갔다.
유자명은 상하이 임시정부의 제6회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충청도 몫의 의원에 선출되었으며, 임정 요원이자 신한청년당 대표인 여운형의 권유로 신한청년단에도 가입했다. 임정의 법무부 비서국장인 김한을 만나면서 사회주의를 접했고, 그와 함께 일본의 잡지를 보면서 사회주의와 아나키즘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됐다.
1919년말 서울로 귀국한 유자명은 김한과 함께 사회주의 연구모임을 만들고, 조선청년연합회에도 참여했다.
이 무렵 유자명은 일본인 모리토 타츠오 등의 글을 읽으면서 사회주의와 거리를 두고 아나키즘으로 선회한다. 특히 러시아 아나키스트 크로포트킨의 사상을 적극 받아들였다. 크로포트킨은 자본주의 사유재산과 사회주의의 권위주의를 비판하며서 인간은 경쟁이 아닌 상호부조로 함께 발전할 수 있다는 주장을 내놓았다. 서구열강이 적자생존의 진화론으로 제국주의 식민지 지배를 정당화하던 시대 "만물은 서로 돕는다."는 이론이 독립운동가들에게 큰 반향을 일으켰고, 이회영 신채호 김좌진 박열 백정기 정화암 이강훈 등 많은 이들이 아나키스트가 되었다.
1921년 4월 베이징으로 건너간 유자명은 신채호 이회영 등과 교류했고, 1922년 김원봉을 만나 의열단에 가입, 통신과 선전 분야를 맡게 된다. 이때 단재 신채호가 조선혁명선언을 작성한 경위도 흥미롭다.
1922년 3월 의열단원 3명이 상하이 황포탄에서 다나카 기이치 일본 육군대장을 저격했으나 실패하고 엉뚱하게 그 옆에 있던 영국 여성이 사망했다. 이 일로 각국이 의열단을 비난하고 임시정부조차 자신들과 무관하다고 해명하기에 이른다. 김원봉은 의열단이 무분별한 테러단체가 아니라 이념과 목표를 가진 혁명단체라는 알리기 위해 글을 작성하기로 했다. 이때 유자명이 평소 존경하던 신채호를 추천했고, 직접 베이징에서 신채호를 모셔와 글을 작성하게 된다. 유자명은 신채호와 함께 합숙하며 의열단의 취지를 설명했고, 이 때문에 조선혁명선언에 암살과 파괴 등 폭력을 옹호하는 아나키즘 사상이 짙게 반영된 것이다.
유자명은 의열단의 암살과 파괴공작에 깊이 간여했다. 1924년 1월 김지섭 의사가 일본 왕궁에 폭탄을 투척하도록 지원했다. 1925년 3월 북경에서 의열단의 이종희와 이기환, 다물단의 최주영과 이규준이 일제의 밀정 김달하를 처단했는데, 다물단(단장 황익수) 역시 아나키스트 유자명 신채호 이회영 등이 관련된 조직이었다. 유자명은 1926년 11월 나석주 의사가 서울 조선식산은행과 동양척식회사에 폭탄을 투척하도록 무기를 마련해줬으며, 나 의사가 순국하자 추모회를 열고 소책자를 발행, 배포했다.
유자명은 1925년 광주에서 열린 의열단 개조회의에 참가했다. 의열단은 기존의 폭력운동으로 혁명을 성공할 수 없다고 보고 조선민족혁명당을 설립했다. 1927년에는 남경에서 한국을 비롯 중국, 인도의 대표가 모여 동방피압박민족연합회를 만들었다.
1930년에는 아나키스트 이회영 정화암 안공근 백정기 이강훈 등과 남화한인청년연맹을 결성했다. 이듬해 10월에는 남화한인연맹이 주축이 돼 한중일 3개국 아나키스트들이 항일구국연맹을 조직했다. 청년연맹과 구국연맹은 의열단처럼 무력투쟁을 추구했다. 1932년 백정기 이달 정화암이 독립운동가 이회영을 밀고하여 죽게 한 이규서와 연충열을 처단했다. 상하이 프랑스 조계의 요리집 육삼정에서 주중 일본공사 아리요시 아키라와 일본군사령부 간부들의 암살을 시도했으며, 밀정과 친일행위를 한 이종홍 이용노 등을 처단했다. 유자명이 '흑색공포단'으로 명명한 구국연맹은 중국인 친일파 왕정위를 저격하고 샤먼과 텐진의 일본영사관에 폭탄을 투척, 일제를 공포에 떨게 했다.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항일운동 세력의 통합이 필요해졌다. 조선민족혁명당, 조선민족해방자동맹, 조선혁명자연맹(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 조선청년전위동맹 4개 단체가 조선민족전선연맹을 결성했는데 유자명은 혁명자연맹의 대표로 참여했다. 민족전선연맹은 장제스의 국민당 정부와 공조하여 1938년 10월 조선의용대를 창설했다. 의용대 대장은 김원봉이었으며 유자명은 6명으로 구성된 지도위원으로 일했다.
상하이 임시정부는 1942년 좌우파가 두루 참여하는 임시의정원(국회)을 구성했는데 유자명도 의원으로 참여, 헌법 개정을 위한 위원으로 일했다. 유자명이 이끄는 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에게 12석이 배분됐으며, 이 때문에 유자명은 광복 때까지 의정원 의원으로 일했다.
유자명은 항일운동을 하면서 농업과 교육 분야의 일을 계속했다. 근대농업을 전공한 농업전문가로 중국이 필요로 하는 인재였으며, 그 자신도 생계를 위해 돈벌이가 필요했다. 일본어와 중국어에 능통해 학생들을 가르치고 농업을 연구, 경영하는 데도 전혀 어려움이 없었다.
유자명은 1929년 중국인 지인의 요청으로 한복염열사기념농장에서 농업생산을, 1930년에는 푸젠성 취앤저우의 여명고중에서 생물학을 가르쳤다. 1930년-1935년까지 상하이 입달학원에서 농업과 일본어를 가르쳤으며, 이때 입달학원 학생들과 난징 근교 제일농장을 관리하기도 했다. 이외에도 국민당정부 건설위원회의 동류실험농장, 복건원예시험장, 광시성의 영조농장 등에서 농업기술자를 양성하고 농작물을 연구했다. 1944년에는 푸젠성 정부의 초청으로 복안현의 계병농장 준비처 주임으로 근무했다.
1945년 일제가 패망했지만 유자명은 조국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푸젠성에서 있었던 탓으로 귀국할 방도가 마땅치 않았다. 1946년 타이완으로 옮겨 1950년까지 대만성 농림기술실 등에서 일하며 대만의 농업개혁을 연구했다. 1950년 귀국을 신청하고 비자까지 발급받았지만 한국전쟁이 일어나 무산됐다. 일본과 홍콩 등을 전전하던 유자명은 후난성 부성장 청싱링의 도움으로 중국 창사의 후난농업대 교수로 일하게 된다. 유자명은 이 대학에서 중국 벼 재배의 기원을 밝혀내고, 중국 남방에 재배 가능한 포도 품종을 개발하는 등 중국의 근대농업 발전에 큰 업적을 남겼다. 그가 살았던 후난농대의 관사가 전시관으로 조성돼 장사시 문화재로 등록됐으며, 학교 안에 흉상도 조성됐다.
유자명은 조국 광복을 위해 헌신한 애국지사이고 혁명가이지만 농학자와 교육자로서도 큰 발자취를 남겼다. 또한 남한과 북한이 공히 인정하는 독립유공자이다. 대만 정부에서도 일했으며, 중국 근대농업 개척자로서 중국정부도 높게 평가하고 있다. 고향 충주에서는 제법 예우를 해주고 있지만, 각계에서 중국에 정착했다는 이유로 박하게 평가하는 현실이 자못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