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줌인] 중국 신해혁명 핵심들과 교류… 상하이 임시정부 터 닦아

광복 80주년 기념, 충청의 독립운동가와 그 발자취 (23) 청주 출신 예관 신규식(하) 중국혁명가 쑨원 천치메이 등과 교류 국제사회 최초로 임정 국제승인 받아 43세에 "정부! 정부!" 외치며 최후맞아

2025-07-13     김재근 선임기자
신규식이 살았던 상하이 남창로 100-5번지의 옛집. 가까운 곳에 중국 신해혁명의 지도자 천치메이, 천두슈 등이 살았다. 사진=독립기념관

당시 상하이는 세계 각국이 조계를 설치하고 무역활동을 벌이는 동서양 문물의 용광로였고,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혁명가들이 넘치는 국제도시였다.

예관은 상하이에서 천치메이 쑨원 등 중국혁명동맹회 간부들과 교류하게 된다. 예관은 중국혁명의 성공이 한국의 독립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보았다.

◇신규식과 교류한 중국의 혁명가들

쑨원(손문)(왼쪽부터) 천치메이(진기미), 천궈푸(진과부)
쑹자오런(송교인)(왼쪽부터), 탕지야오(당계요), 황싱(황홍)
뤼텐민(려천민)(왼쪽부터), 후한민(호연민), 장지(장계), 천두슈(진독수)
천두슈(진독수)(왼쪽부터), 랴오중카이(료중개)

예관은 혁명가들이 '만권보'를 발행할 때 망명자금으로 가져갔던 돈을 희사했다. 중국혁명동맹회에 가입했으며 1911년 우창봉기와 상하이봉기에 동참했다. 신해혁명으로 청나라가 무너지고 중화민국이 탄생했으며, 쑨원이 초대 임시대통령이 됐다. 위안스카이의 독재에 반대한 1913년 7월 제2차혁명에도 천치메이와 함께 참가했다.

중국 혁명가들은 예관의 박학한 유학적 소양과 무관학교에서 배운 군사지식, 유창한 중국어, 혁명에 대한 열정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이들은 쑨원이 제창한 민족 민생 민권 삼민주의에 입각하여 봉건체제와 청왕조 타도, 제국주의 거부, 민주공화국 건설을 지향했다. 광복과 공화제 국가를 꿈꾸는 예관을 동정하고 지지했다.

예관은 혁명동지인 쑹자오런이 1913년, 천치메이가 1916년 위안스카이의 하수인에 의해 암살을 당했을 때 절절하게 슬퍼하고 통곡해 중국인들을 놀라게 했다. 예관의 인간관계는 천치메이의 조카인 천궈푸 등에게 이어져 훗날 임시정부가 장제스의 국민당정부와 공조하는 바탕이 됐다.

예관은 1912년 5월 한국교민들의 상부상조를 위해 '동제사'를 조직했다. 동제는 함께 배를 타고 물을 건넌다는 '동주공제'의 줄인 말로 궁극적인 목표는 광복이었다. 대종교와 밀접했으며 신석우 박은식 조성환 홍명희 신채호 조소앙 문일평 여운형 등이 참여했다. 예관은 동제사를 토대로 '신아동제사'도 만들었다. 신아동제사는 중국측의 도움을 받기 위한 조직으로 한국인은 물론 천치메이 쑹자오런 황싱 천두슈 천궈푸 탕샤오이 후한민 랴오중카이 범광계 등 중국혁명동맹회 인사들이 대거 참여했다.

신규식에 세운 박달학원과 학생들. 가운데가 예관 신규식, 왼쪽이 신성모, 오른쪽은 예관의 친동생 신건식이다. 사진=독립기념관

1913년에는 한국청년을 중국과 구미의 학교에 진학시키기 위해 중국어와 영어 등을 가르치는 박달학원을 세웠다. 윤보선 여운형 이범석 조소앙 민필호 등 100여 명이 이 학교를 거쳤다. 졸업생들은 훗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실무와 대외 교섭을 담당하는 인재로 성장했다. 수많은 한국 청년들을 바오딩 군관학교와 난징 해군학교, 톈진 군수학교 등에 보내 독립군 지휘관으로 양성했다.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1915년 유동열 박은식 이상설 유흥렬 등과 신한혁명당을 만들었다. 이 조직은 일본이 세계대전에서 패배하면 독립의 기회가 생길 것이라며 고종을 정점으로 하는 입헌군주국가를 추진했으나 고종과의 접촉에 실패하고, 일제가 전쟁에 승리하면서 무산됐다.

1917년에는 조소앙 신채호 박은식 신석우 등 14명과 함께 '대동단결선언'을 발표했다. 경술국치는 무효이고, 해외 모든 단체들이 모여 국가 기관을 조직하자는 내용으로 독립운동의 방향이 왕정복고가 아닌 공화주의로 정해졌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의 길잡이가 됐다.

예관은 미국의 윌슨 대통령이 민족자결주의를 내놓자 1915년의 만주에서 무오독립선언을 발표하게 하고, 박달학원 제자 여운형 장덕수 김철 등으로 하여금 신한청년당을 만들어 독립만세운동을 이끌게 했다. 동경에 동제사 요원인 장덕수 이광수 조소앙 등을 파견하여 2.8독립선언을 이끌었고 395명의 학생이 귀국하여 3.1운동에 참여토록 했다. 국내에는 선우혁와 곽경을 이승훈과 손병희에게 보내 종교인들의 3.1운동이 동참토록 요청했다.

1919년 4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돼, 임시헌장(헌법)을 제정하고 이승만을 초대 국무총리로 선출했다. 예관은 출범 당시 자리다툼에 실망하여 이름을 올리지 않았다. 제4회 임시의정원회의에서 충청지역 의원으로 부의장이 됐지만 주도권 다툼이 벌어지자 그만뒀다.

이 무렵 신한청년당과 임시정부는 제1차 세계대전의 전후처리를 다루는 파리강화회의에 주목했다. 독립을 호소할 수 있는 기회라고 보고 영어에 능숙한 김규식을 파견했다. 그러나 회의는 승전국의 잔치였고 약소국의 주장은 철저히 무시, 가시적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1920년 12월 18일 열린 이승만(가운데 꽃다발을 두른 사람)의 상하이 방문 환영식. 오른쪽 2번째가 예관 신규식이다.
1921년 1월 1일 대한민국 임시정부 신년하례회 사진. 앞에서 두 번째 줄 왼쪽에서 네 번째가 예관 신규식이다.

9월에 3·1운동 이후 국내외 여러 개의 정부가 통합돼 통합 임시정부가 출범했지만 또 노선 갈등이 불거졌다. 이승만은 미국에 거주하며 임시정부에 소홀, 많은 불만이 제기됐다. 1920년 이승만이 상하이로 와서 수습을 시도했지만 국무총리인 이동휘와 갈등이 벌어졌고. 일부 각료가 취임을 거부했다. 이동휘와 안창호가 임정을 떠났다. 이승만은 1921년 5월 신규식에게 전권을 위임하고 미국으로 건너갔다.

예관은 임정의 국무총리대리 겸 법무총장 겸 외무총장에 대통령직까지 대행한다. 임정은 1921년 11월부터 열리는 워싱턴 국제회의에 독립청원을 시도한다. 이 회의는 1차대전 이후 군비축소와 동아시아의 질서재편이 목표였다.

신규식이 호법정부의 대총통 쑨원(손문)을 만나 임시정부를 공인받은 곳으로 추정되는 중국 광저우 동교장 일대. 현재는 도심으로 변했다, 사진=독립기념관

예관은 이러한 흐름을 읽고 광동의 중화민국 호법정부 쑨원 대총통을 만났다. 예관과 쑨원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중국 호법정부의 상호 외교 승인 △중국 군사학교에 한국학생 입학 △중국은 범태평양회의에서 한국측의 독립 선전 활동 협조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광저우에 상주대표 파견하고 비용은 중국 호법정부가 부담할 것 등에 합의한다. 예관의 인맥 덕분에 임시정부가 최초로 국제공인을 받았고, 워싱턴회의에 독립을 청원했다.

그러나 기대했던 청원은 무산됐다. 미국은 쑨원의 호법정부가 아닌, 북경의 북양정부를 중국의 정통으로 인정한 것이다. 임시정부는 다시 내홍에 휩싸였고, 국민대표회 개최 요구가 불거졌다. 예관이 수습에 힘썼지만 국무원들이 대거 사퇴하면서 신규식 내각이 붕괴돼 무정부 상태에 빠졌다. 쑨원의 호법정부가 천중밍의 쿠데타에 직면한 것도 절망감을 안겨줬다.

예관은 임시정부의 갈등과 중국혁명의 좌초 등을 보면서 상심이 커졌고 심장병 증세가 날로 악화됐다. 수면과 음식을 줄이고 말을 잘 하지 않았으며, 종내는 음식과 대화도 거부했다. 25일이나 단식을 한 끝에 1922년 9월 25일 "정부! 정부!"라는 유언을 남긴 채 43세의 생을 마감했다.

국립서울현충원 임시정부 요인 묘역의 신규식 묘소. 중국 상하이 홍교로 만국공묘 송경령능원에 있던 유해를 1993년 8월 10일 이곳으로 옮겼다. 사진=국립서울현충원

예관은 군사전문가, 외교가, 교육자, 종교인, 계몽운동가, 사회운동가였으며 혁명가적 기질도 갖춘 독립지사였다. 쑨원 천치메이 등과 교류하며 중국 신해혁명에 참여하여 동지적 관계를 맺었다. 일찍 상하이에 자리를 잡은 채 독립운동가들의 정착을 도왔다. 상하이 임시정부 탄생의 토대를 닦았으며, 임정의 국제공인을 이뤘고, 이러한 흐름은 훗날 임시정부와 장제스 국민당 정부의 공조로 이어졌다. 상하이 임시정부의 후반에 김구가 있었다면 그 전반에 씨와 거름을 뿌린 이는 예관 신규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예관과의 인연으로 임시정부를 도운 쑨원 천치메이 천궈푸는 해방 이후 한국 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쑹자오런 탕지야오 황싱 뤼텐민 후한민 장지 등에게는 대통령장과 독립장이 추서됐다.

예관이 독립운동사에 큰 발자취를 남겼지만 충북의 고향에서의 대우는 매우 박절하다. 예관과 동생 신건식이 태어난 생가는 조그만 표지석이 전부이고 주변에 공적비 하나 없다. 정부나 지자체 차원의 생가 정비사업도 이뤄지지 않았다. 이래도 되는 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