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줌인] 상하이 망명·독립운동… 43년 일생 조국광복 몸 바쳐

광복 80주년 기념, 충청의 독립운동가와 그 발자취 (22) 청주 출신 예관 신규식(상) 중국어학교 무관학교서 외국어·신문물 배워 을사늑약에 "오적 나오라" 매국노 맹비난도 경술국치 등 망국에 생애 3차례 자결 시도

2025-07-06     김재근 선임기자
가덕면 인차리 뒷산에 조성된 예관 신규식과 부인 조씨 합장묘. 부인 조씨의 유해를 모시고 예관을 합장(가묘)한 곳으로, 예관의 유해는 국립 서울현충원에 안장됐다.

말쑥한 양복 차림에 까만 색안경, 카이젤 수염…. 한쪽을 흘겨보는 듯한 독특한 얼굴….

여느 독립운동가와는 사뭇 다른 예관 신규식의 이미지이다. 겉만 보면 평안하고 모던한 삶을 산 것처럼 보이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격정적이고 치열하게 살았고 43년의 일생을 모두 조국광복에 바쳤다. 인생의 궤적을 좇다 보면 그가 대의를 위해 평생을 바친 아주 큰 인물이라는 점을 실감하게 된다.

예관 신규식 (충북 청주 출신의 독립운동가).

신규식은 1880년 충북 청주시 상당구 가덕면 인차리에서 신용우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청주시 동쪽의 낭성 가덕 미원면에는 고령신씨가 500년에 넘게 세거해온 집성촌이 많았는데 이곳의 신씨를 상당산 동쪽에 산다고 하여 산동신씨라고 불렀다. 그는 세 살 때 천자문을 뗐을 정도로 뛰어났다. 당시 신씨 문중에 신규식을 비롯하여 단재 신채호, 경부 신백우 3명의 천재가 태어났는데 이들을 일컬어 '산동 3재'라고 불렀다.

한학을 배우며 어린 시절을 보낸 예관은 서울로 올라가 1896년 관립한어학교에 입학한다. 대한제국은 외국어에 능통한 인재를 키우기 위해 일어 영어 러시아어 등을 가르치는 외국어학교를 세웠는데 신규식은 중국어를 가르치는 한어학교에 다녔다.

그는 재학 중에 독립협회에 참여, 서재필 안창호 이승만 이상재 주시경 박은식 나철 등과 교류하고, 문중 청년인 신흥우, 신채호도 만났다. 독립협회는 국권수호와 민권신장, 내정개혁을 추구하는 단체로 만민공동회라는 집회를 열어 시민운동을 벌였다. 지식인과 상인 시민들이 참여하여 자주독립, 외세의 간섭 배제, 의회 설립, 탐관오리 처벌 등을 요구했다. 예관은 학생임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재무를 맡는 등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러나 고종은 독립협회가 무능한 정부를 비판하고 공화제 국가를 내세우자 탄압에 나섰다. 1898년 11월 간부 17명을 검거하고 황국협회를 사주하여 독립협회를 습격했다. 이때 그도 곤욕을 치렀고 이 일로 학교를 졸업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를 보면서 예관은 새로운 세상에 눈떴고 공화제 국가를 꿈꾸게 된다.

충북 청주시 상당구 가덕면 인차리의 신규식 생가는 아직도 옛건물의 골격이 그대로 남아있다. 이곳에서 태어난 신규식과 동생 신건식 모두 독립운동사에 큰 업적을 남겼다. 김재근 선임기자

예관은 1900년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에 입학했다. 문관 가문에서 무관학교에 들어간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일본과 서구열강이 조선을 침탈하고 국정을 농단하는 것을 보면서 군사의 중요성을 절감했다. 그는 무(군사)를 경시하는 태도가 국가에 위태로움과 허약함을 초래한다고 봤다.

예관은 무관학교 시절 의형제를 맺은 조성환과 함께 부패와 불합리에 저항, 동맹휴학을 시도했다. 그러나 동맹휴학은 사전에 학교 당국에 발각됐고 여러 동료들이 처벌을 받았다. 예관은 병이 나서 고향에 내려와 치료를 하던 중이라 처벌을 면했다. 그러나 학교측의 선처로 동료들은 무관학교를 무사히 마쳤고, 예관도 1902년 7월 참위로 임관했다.

부위로 승진했던 예관은 1905년 인생의 중요한 전기를 맞는다. 일제가 강압적으로 을사늑약을 맺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한 것이다. 분개한 그는 동지들과 더불어 지방의 군사조직인 진위대와 함께 의병을 도모했으나 실패했다. 전국에서 을사늑약을 규탄하는 소리가 빗발쳤고 민영환 조병세 홍만식 김병규 이건석 등이 목숨을 끊어 조약의 부당함을 호소했다. 열혈 청년장교 신규식도 몽둥이로 종로의 계동·가회동·운니동 고관대작 집의 대문을 두드리며 "을사오적 나오라!"며 울분을 토했다. 그러나 청년장교 한 사람이 고래고래 소리치고 매국노를 비난해도 변하는 것은 없었다.

예관 신규식의 오른쪽 눈은 음독자살로 시력을 잃어 한쪽으로 쏠린 채 흘겨보는 모습을 하고 있다.

절망한 예관은 음독자살을 시도했으나 가족들에게 발견돼 목숨을 건졌다. 부인 조씨가 급하게 해독제를 먹였기 때문이다. 부인이 남편의 불같은 성정을 알고 미리 해독제를 준비해놨다고 한다. 그러나 이로 인해 오른쪽 눈의 시신경이 망가져 시력을 잃어 사물을 바로 보지 못하게 되었다. 주변에서 애꾸눈이라고 놀리기도 하고 걱정했지만 그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한자어 흘겨볼 '예'와 바라볼 '관'이라는 글자를 따서 스스로 '예관'이라는 호를 지었다. 기울어진 나라를 바로 보지 못하고, 일제를 흘겨(째려)보겠다는 뜻이 담겨 있다.

1907년 일제는 대한제국을 압박하여 정미7조약을 맺었다. 헤이그 밀사사건을 이유로 고종을 퇴위시키고 대한제국의 법령 제정 및 행정권을 장악했으며 군대를 해산했다. 군대해산에 항거하여 황제를 호위하던 시위대의 1대대 대대장 박승환이 자결하자 당시 부위였던 예관도 군사를 이끌고 대한문까지 진출했다. 이때 예관도 자결하려 했으나 동료들의 만류로 그만뒀다.

신규식이 상하이에서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조직한 동제사의 멤버들. 오른쪽부터 예관 신규식, 우창 신석우, 단재 신채호. 모두 고령 신씨이다. 자료=국사편찬위원회

당시 예관은 애국계몽과 산업부흥 운동도 벌였다. 1901년 고향 인차리의 문동학원 설립에 참여했으며, 1903년에는 덕남사숙을 세웠다. 사숙에서는 산술과 측량 등 주로 실업과목을 가르쳤다. 1908년에는 계몽운동단체인 대한협회에 가입했고, 군대를 그만둔 동료와 함께 산업진흥을 위해 황성광업주식회사를 만들었으며, 박찬익과 함께 '공업계'라는 월간지도 창간했다. 사립학교인 중동학교의 야학교 교장을 맡았으며, 대한자강회와 대한협회에도 참여했다.

국력을 기르기 위해 동분서주하던 예관은 1910년 경술국치로 나라가 망하자 다시 자결을 시도한다. 그러나 때 마침 예관의 집을 찾았던 대종교 종사 나철에 발견돼 목숨을 건졌다. 이 일을 계기로 나철과 깊이 교류하게 되었고 대종교 본사의 경리부장과 종리부장 등 주요 직책을 맡아 일했다. 예관은 이전에 친척의 권유로 대종교에 입교한 터였다.

대종교는 일제 때 홍암 나철이 시작한 민족종교로, 단군을 교조로 섬겼으며, 민족주의 성향이 매우 강했다. 훗날 1914년 길림성 화룡현으로 총본사를 옮겼고, 1919년 대한독립선언서(무오독립선언서) 발표를 주도했다. 대종교도들이 만주 북로군정서의 주축을 이뤘고, 상해에서는 임시정부 수립에 대거 참여했다. 대종교에서는 종교활동이 독립운동이고, 독립운동이 곧 종교활동이었다.

청주시 상당구 가덕면 인차리의 신규식 생가의 사랑채.오래된 농가 건물 앞에 신규식, 신건식 형제의 생가를 안내하는 표지석이 설치돼 있다. 김재근 선임기자

예관은 1911년 봄 중국 상하이로 망명했다. 망명길에 오르기 전 예관은 대종교의 나철과 상의하고, 고향으로 내려가 집안 사람인 신백우와 독립투쟁의 방향을 논의했다. 예관은 대종교도로서 이름을 신정으로 바꿨고, 대종교의 상하이 서도본사라는 조직을 맡아 교인들과 함께 종교활동을 하며,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을 시작했다. 늘 대한민국 지도와 단군영정을 갖고 다니며 아침 저녁으로 영정에 경배하며 조국광복을 빌었다.

비슷한 시기 청주의 고령 신씨 '산동 삼재'가 모두 해외 망명을 택했다. 예관은 상하이로 건너갔고, 단재 신채호는 블라디보스토크로, 경부 신백우는 간도로 떠난 것이다. 훗날 이들은 상하이에서 만나 임시정부에 함께 독립운동을 벌였다.

당시 독립운동가들에게 상하이는 만주에 비해 매우 생소한 곳이었다. 조선인도 별로 없었고 한국을 아는 사람도 없는, 불모지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예관은 1910-20년대 상하이에서 뛰어난 실력과 능력, 인품, 혜안으로 역사에 빛날 눈부신 독립운동을 전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