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설위원의 시야비야] 캐스팅 보터의 비애
이 대통령 충청권서 48.39% 득표 대선 후 충청권 외면하는 분위기 지역 사회 적극 대응해야 할 시기
충청권은 역대 대선에서 캐스팅보트 지역으로 통했다. 영·호남처럼 특정 정당에 표를 몰아주지는 않았지만 미세한 차이로 승패를 분명하게 결정지은 곳이다. 대선이든 총선이든 충청권의 승자가 최종 승자가 됐다는 사실이 이를 입증한다. 대선 후보들의 충청권 득표율이 전국 득표율과 동행하고 있는 것도 특이한 현상이다. 전국의 선거 판세를 압축한 듯한 충청권이 '선거의 바로미터'로 불리는 까닭이다.
21대 대선도 이런 선거 방정식을 벗어나지 못했다. 이재명 대통령은 선거판의 중원으로 불리는 충청권에서 승리하면서 대선 승리를 견인했다. 대전·세종·충남·충북에서 48.39%를 얻어 김문수 국민의힘 후보(41.85%)를 6.54%p 차이로 따돌렸다. 이 대통령이 전국적으로 49.42%를 득표해 김 후보(41.15%)에 8.27%p 앞선 것과 큰 차이가 없다. 충청권 유권자들의 선거판 균형 감각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20대 대선도 충청권이 승패를 좌우했다. 당시 이 대통령은 윤석열 전 대통령에 0.73%p 차이로 석패해 '졌잘싸(졌지만 잘 싸웠다)'라는 말을 들었다. 전국적으로 24만 7077표를 졌는데 충청권에서 14만 7612표를 뒤진 사실이 뼈아팠다. 반대로 충청권에서 14만 7612표를 이겼더라면 진즉 대통령이 됐을 것이다. 부질없는 상상이 아니다. 그만큼 선거에서 캐스팅보트 역할이 중요하다는 의미다. 정책 대결보다 진영 간 대결이 벌어지는 대선은 더더욱 그렇다.
문제는 충청권이 대선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지만 선거 이후엔 그만한 대접을 못 받고 있다는 점이다. 이 대통령이 대선에서 세종시민들에게 받은 득표율은 무려 55.62%나 된다. 민주당의 텃밭인 전남, 광주, 전북에 이어 전국 17개 광역자치단체 가운데 4번째로 높은 수치다. 그런데 취임하자마자 해양수산부의 조속한 부산 이전 지시를 내렸다. 지역민들의 의사와 정면으로 배치되는 중차대한 일을 서슴없이 추진한다는 사실이 놀랍다.
부산을 해양수도로 만들기 위해 해수부를 부산으로 옮겨야 한다는 생각은 위험한 발상이다. 이런 식이면 문화체육관광부를 광주로 보내고, 농림축산식품부를 경북으로 보내도 된다는 말 아닌가. 아무리 대선 공약이라고 하지만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서둘러야 할 일인지 묻고 싶다. 해수부의 부산 이전은 해수부 공무원들이 반대하고 있고, 이 대통령이 즐겨 말하는 '사회적 합의'도 거치지 않았다. 이는 곧 이 대통령이 충청권 주민들과 약속한 '세종시 행정수도 완성'에 역행하는 일이기도 하다.
해수부 이전 문제는 충청권을 바라보는 이 대통령의 시각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영호남 가는 길에 잠깐 스쳐가는 지역 정도로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닌지 의구심이 든다. 대선 기간 '충청의 사위'를 자처한 이 대통령이 충청권에 머문 시간은 다 합쳐도 한나절밖에 되지 않는다. 영·호남 지역에서는 3-4일씩 머무르면서 집중적으로 유세를 펼쳤던 것과는 확연히 다르다. 이 대통령이 앞으로 충청권 공약을 얼마나 잘 지켜나갈지 의문부호가 찍히는 지점이다.
안타깝게도 충청권의 대응은 소극적이다 못해 무기력하기까지 하다. 이 대통령의 대선 승리에 크게 기여했으면서도 막상 대선이 끝나니 얻어내기는커녕 오히려 있는 것도 뺏겨야 할 판이다. 민주당의 충청권 국회의원들은 20명이나 되지만 하나같이 침묵을 지키고 있고, 세종시의회는 결의문 하나 내지 않고 있다.
이 모든 게 캐스팅 보터의 비애가 아닐 수 없다. 그렇다고 지역사회가 이 대통령의 선의만 바라보고 손 놓고 있을 일은 아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법이다. 충청권의 존재감을 확인할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지 다 해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