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줌인] 충무공 이순신 12대손… 평생 독립운동 몸바쳐
광복 80주년, 충청의 독립운동가와 그 발자취 (17) 아산 출신 애국지사 이세영 의병·대한제국 군인 복무·신흥무관학교 교장 등 투쟁 중국 청두서 신사회 부위원장 활동 중 72세로 생 마감
이세영은 조선말-대한제국-일제강점기 굴곡진 시대를 관통한 독립운동가이다. 충무공 이순신의 12대손으로 의병에 참여했고, 대한제국의 군인으로 복무했으며, 학교를 세워 계몽운동을 벌였다. 광복을 위해 중국으로 망명, 신흥무관학교 교장을 지냈고, 대한통의부와 한교공회 등에 참여하는 등 평생을 독립운동에 바쳤다.
고광 이세영은 1869년 아산시 음봉면 신휴리에서 이민하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동생 이창영도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신휴리는 덕수이씨 율리공파 집성촌이었는데 이세영의 집안도 이 가문의 일원이었다. 고광은 13살 때 덕수이씨 충무공파 이민철의 양자로 들어간다. 율리공파에서 충무공파로 호적이 바뀐 것이다. 고광은 20대 중반 무렵 양부 이민철의 선영과 땅이 있는 청양군 장평면 관현리에서 살았다. 고광의 출생지가 청양 정산으로 와전된 것은 이러한 내력 때문이다.
고광은 어린 시절 주자학을 배웠고, 21세 때는 서울로 올라가 신식 교육기관인 육영공원에 입학, 근대문물과 서양학문을 익혔다. 1886년 고종이 세운 이 학교는 조선 최초의 관립 근대학교로 영어를 비롯 독서 산학(수학) 지리 정치 등을 가르쳤다.
1895년 명성황후가 시해되는 을미사변이 일어나고 갑오개혁의 일환으로 단발령이 내려지자 고광은 항일 의병운동에 뛰어든다. 청양 정산에 머무르고 있던 그는 김복한 등 호서 유림이 참여한 제1차 홍주의병에 참모장으로 나섰다. 의병은 한때 홍주관아를 점령했으나 화력이 절대 우세한 일제 병력에 패배하게 된다. 이때 고광은 의병투쟁의 한계를 느끼고 무관의 길로 들어섰다.
고광은 집안은 충무공 이순신 후손으로 대를 이어 수군의 요직을 맡았으며, 양부 이민철도 정3품 수군절도사를 지냈다. 그의 장인 김재은도 전라도병마절도사와 병조참판을 지낸 무인이었다.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를 졸업한 이세영은 육군 정위(대위)로 승진, 헌병대장 서리까지 올랐다.
그러나 고광은 1904년 일제가 러일전쟁에서 이겨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공고히하고 대한제국 군대를 장악하자 공직을 그만두고 청양으로 내려온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대한제국이 외교권을 잃자 제2차 홍주의병이 일어났다. 고광도 민종식이 주도한 홍주의병에 중군장으로 참전했다. 그러나 의병은 홍주성 전투에 패배했고, 고광은 일제에 체포되기에 이른다. 1906년 대한제국 재판기관인 평리원에서 종신 유배형을 받아 황해도 황주로 쫓겨났고, 1907년에 철도(鐵島)로 옮겨졌다가 같은 해 특사로 풀려났다.
일제의 강한 국력과 군사력을 체감한 고광은 교육계몽운동을 벌인다. 1908년 청양에 지역유지들과 함께 성명학교를 세워 젊은이들을 가르쳤다. 고광이 교장을 맡았고, 그가 살던 집을 교실로 사용했으며, 근대 문물과 문화를 가르쳤다. 동생 이창영도 육군무관학교를 나와 장교로 복무한 인재로 학교에서 함께 일했다.
고광은 독립의군부에도 이름을 올린다. 독립의군부는 고종이 대한제국 출신의 의병장 임병찬에게 밀지를 내려 만든 비밀독립운동 단체였다. 고광은 충청 전라 경상 3도사령관을 거쳐 함경 평안 황해도의 3도사령관을 맡았다. 그러나 이 조직은 일제에 발각돼 와해됐다.
고광은 국내 활동이 여의치 않자 1913년 중국 단동으로 망명했다. 고광은 한인공교회 운동을 시작했다. 이 운동은 청나라 말기 중국 정치지도자 캉유웨이가 추진한 것으로 유교(공자)를 종교화 국교화하여 나라를 안정시키자는 취지였다. 고광은 이 운동을 통해 한인사회 단결을 도모하고 독립운동가들을 지원했다.
고광은 서간도에 설립된 신흥무관학교에서 독립군 양성에 힘을 쏟았다. 이시영 이회영 형제가 서간도에 세운 이 학교는 군사학과 민족교육을 통해 우수한 지휘관을 다수 배출했다. 김좌진 홍범도 이범석 지청천 양세봉 최진동 등이 이 학교 출신이다. 고광은 이 학교에서 교관과 학도감으로 일했으며 1917년 6월부터 1919년 8월까지 교장직을 수행했다.
1919년 2월에는 중국 길림에서 발표된 대한독립선언서(무오독립선언서)에 서명했다. 이 선언서는 일본의 식민통치를 부정하고 한국의 독립과 민족 자결권을 주장한 것으로 김규식 조소앙 안창호 김동삼 이상룡 박은식 이시영 김좌진 등 39명이 이름을 올렸다. 이 선언은 3·1 운동을 촉발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사상적 기반을 제공했다.
고광은 3.1운동 이후 국내에서 설립된 한성임시정부의 참모총장, 중국 상하이에서 출범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참모차장으로 참여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출범 때는 직접 상하이를 다녀온 것으로 보인다. 그의 명성과 위상이 매우 높았기 때문에 국내외 이런저런 독립운동이 벌어질 때마다 직접 참여하거나 중요한 자리에 추대된 것이다. 고광은 1919년 2월 고종 사망 직후 서간도지역 13개 단체가 모여 만든 13단체대표회의 회장을 맡았다. 서간도지역의 군사기관인 군정부의 임시군사령부사령관과 군정규칙제정위원도 담당했다.
환인현에서 조직된 한교공회에도 참여했다. 손극장 손병헌 독고욱 등 청년들이 참여한 이 단체는 일제 기관을 습격하고 친일 협력자를 처단했다. 일제는 이 무렵 만주의 독립운동 단체를 대대적으로 단속했는데 고광도 1920년 7월 흥경현에서 체포됐다. 봉천의 일본영사관으로 이송돼 그해 10월 풀려날 때까지 고문이 동반된 고통스런 옥고를 치렀다.
북경으로 거처를 옮겨 독립운동을 하던 고광은 만주로 돌아와 1922년 9월 대한통의부에 참여, 군사부장을 맡았다. 1920년 경신참변과 1921년 자유시참변 이후 독립군 세력의 통합 필요성이 제기됐다. 광한단 한족회 독립단 대한국민단 대한청년연합회 등이 합쳐져 대한통군부로 출범했고 1922년 8월 이것이 통의부로 확대 개편된 것이다. 대한통의부 여러 파벌이 존재했고 공화주의와 복벽주의자 사이에 갈등도 심했다. 고광은 통의부의 일부 세력이 이탈하여 대한의군부를 결성하자, 의용군을 이끌고 이를 진압, 수습했다. 그러나 고광은 독립군끼리 전투를 벌인 것에 회의와 책임감을 느껴 통의부를 그만두고 북경으로 갔다.
북경에서 1923년 신팔균 박용만 등이 만든 교민 민족운동 단체인 북경한교동지회에 참여했고, 도산 안창호가 주도한 민족유일당 운동에도 참가했다. 도산은 공산주의 민주주의 복벽주의 무정부주의 세력의 분열을 극복하자는 운동을 벌였다. 1930년에는 북경에서 조성환 손일민 등과 함께 민족단결 및 독립운동을 추구하는 한족동맹회를 조직했다. 그러나 동맹회는 주도권 문제로 갈등이 빚어졌고. 일제가 화북지방을 점령하는 등 대내외 환경이 악화돼 1933년 4월 해산되기에 이른다.
충칭으로 거처를 옮긴 그는 신사회를 조직했다. 신사회는 사회주의 계열의 인사가 모인 단체로 항일독립과 사회개혁 운동을 동시에 추구했다. 신사회 부위원장으로 동분서주하던 고광은 광복을 4년 앞두고 1941년 5월 28일 쓰촨성 청두에서 순국했다.
일제는 이세영에 대해 "극단적인 민족주의자로 반일단체를 조직하고 지도자가 되어 활동했다"고 기록했다. 중국 청두에서 72세로 숨질 때까지 그의 생애는 온통 광복운동으로 점철됐다. 그는 위상과 활동에 비해 매우 덜 알려진 편이다. 독립운동을 하면서 여러 가명을 사용했고, 해방 이후 연구조사도 미흡했기 때문이다. 형과 함께 중국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을 벌였던 동생 이창영도 국내에서 군자금을 모으다 일경에 체포돼 사망했다고 전해질 뿐 알려진 게 없다. 참으로 답답하고 안타까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