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줌인] 을사늑약에 분노 관직 접고 망명… 초기 독립운동 구심점

광복 80주년 기념, 충청의 독립운동가와 그 발자취 ⑫ 진천 출신 헤이그 밀사 이상설 헤이그 밀사로 전세계에 독립 호소 민족계몽·외교독립·무장투쟁 시도 갖은 방법 분투… 해외 떠돌다 순국

2025-04-20     김재근 선임기자
충북 진천군 진천읍 산척리 134-2에 위치한 보재 이상설 생가. 김재근 선임기자

1905년 11월 30일 한 선비가 종로 거리에서 울면서 운집한 시민들에게 일제에 빼앗긴 국권을 회복하자고 호소했다. 일장 연설을 마친 그는 머리를 땅에 부딪치며 자결을 시도했다. 주위에 몰려있던 시민들이 이를 제지하여 목숨을 부지하게 했다. 김구의 <백범일지>에도 이 일화가 전한다. 독립운동가 보재 이상설의 이야기이다.

보재 이상설은 고위 관료 출신으로 을사늑약에 분노, 해외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에 평생을 바쳤다.

보재는 1870년 충북 진천군 덕산면의 가난한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매우 총명했는 데 7세 때 같은 집안의 이용우에게 양자로 가면서 큰 변화를 맞는다. 서울에 사는 이용우는 정3품 동부승지를 사람으로 형편이 넉넉했다. 보재는 25세 때인 1894년, 조선왕조 최후의 과거시험에 급제하며 관계에 입문했다. 27세에 최고 교육기관인 성균관 교수 겸 관장이 됐고, 한성사범학교 교관, 탁지부 재무관 등을 거쳐 법무부의 차관급인 법부협판에 올랐다.

보재는 1904년 일본이 대한제국에 황무지 개척권을 요구하자 박승봉과 함께 상소를 올렸다. 그는 "토지는 국가의 근본이고 재물은 민생의 근본"이라며 반대했고, 보안회라는 시민단체까지 만들어 여론을 조성, 무산시켰다.

이상설이 사재를 들여 1906년 북간도 용정에 세운 근대식 교육기관 서전서숙. 서전서숙이란 교문의 글씨도 이상설이 직접 썼다. 사진=독립기념관


□ 고종에게 "나라가 망할 바에야 자결하라" 상소

1905년 일제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는 을사늑약을 체결하려 하자 직접 반대행동을 벌인다. 5차례에 걸쳐 고종에게 상소를 올려 이 조약은 일제가 조선을 침략하고 지배하기 위한 도둑질이며, 황제의 재가도 받지 않은 불법 조약이고, 매국노(을사오적)를 사형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특히 고종에게 "그 약관(늑약)을 인준해도 나라는 망하고 안 해도 망합니다. 이래도 망하고 저래도 망할 바에야 차라리 순사(殉死)하여… "라며 나라를 잃을 바에야 자결하라는 표현까지 썼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그는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종로에서 대중연설을 한 뒤 자신도 자결을 시도했고 자결에 실패한 이후 곧바로 독립투쟁에 나선다. 고위관리 출신으로서는 드물게 모든 것을 정리하고 실천적인 독립운동의 길로 들어선 것이다.

보재는 1906년 4월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쳐 북간도 용정에 정착, 서전서숙을 개설했다. 서전서숙은 역사 지리 수학 등의 신학문과 항일 민족교육을 병행했다. 그는 서전서숙의 초대 교장을 맡아 이동녕 여준 김우용 박정서 황달영 등의 애국지사와 함께 일했다. 직접 <산술신서>라는 교과서를 만들어 가르쳤으며, 교사 월급과 책값, 학용품 등의 비용을 댔다. 보재는 망명을 전후하여 양부에게 물려받은 서울의 저택과 고향 진천의 많은 전답을 처분했다. 일제의 내사 기록에도 이상설이 서전서숙 설립을 주도하고 운영자금도 댄 것으로 나와 있다.

1907년 보재는 고종의 특사로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리는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파견된다. 고종은 비밀리에 그를 특사의 우두머리인 정사, 이준과 이위종을 부사로 임명했다. 헤이그 회의는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가 제안하여 열린 국제회의로 세계 각국이 군비축소와 국제분쟁의 평화적 해결, 국제 중재재판소 설치 등을 논의하는 자리였다. 고종은 특사단에게 일제의 불법 강압적 행위를 널리 알리고 외교권을 회복하라고 명했다.

이상설이 평화회의의 의장인 러시아 대표와 주최국 네덜란드의 외무장관을 만났으나 도움을 거절했고, 다른 나라들도 모두 외면했다. 일제의 방해 때문에 본회의장에는 입장도 못했다. 우리의 입장과 요구를 담은 문서를 각국 대표에게 보내고 신문에 알리는 것으로 임무를 대신했다.

헤이그 특사의 외교활동은 이준이 순국하면서 중단됐다. 보재는 7월 14일 이준이 건강악화로 갑자기 숨을 거두자 장례를 치른 뒤 활동을 그만두고 이위종과 함께 유럽 각국을 순방했다. 보재는 영국과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등을 돌며 일제 침략의 불법성을 알리고 독립을 호소했다.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의 기관지 만국평화회보 1907년 7월5일자에 실린 특사단의 사진. 왼쪽부터 이준 이상설 이위종. 사진=독립기념관
1909년 2월1일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출범한 독립운동단체 대한인국민회의 기념 사진. 앞줄 오른쪽 두번째가 이상설이다. 사진=진천군


□ 헤이그 밀사로 전세계에 대한독립 호소

헤이그 밀사 사건으로 국내에서는 커다란 정치적 변화가 일어났다. 일제는 헤이그 특사를 구실로 고종을 퇴위시키고 순종을 즉위시켰다. 대한제국에 정미7조약을 강요하여 행정과 사법권을 빼앗고 군대를 해산시켰다. 이상설은 궐석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국내에 돌아올 길이 막힌 것이다.

보재는 1908년 미국으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계속했다. 미국 국민과 정부를 상대로 독립을 호소하고 동포사회에 독립운동 단체를 만들었다. 애국동지대표회와 대한인국민회를 결성하여 독립운동을 벌였다.

1909년 4월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와 독립운동을 재개했다. 연해주의 한인 지도자들을 규합하고, 러시아와 중국의 접경인 흥개호 주변에 한흥동이라는 독립운동 기지를 개척했다. 한인 청소년을 모아 민족주의 교육을 실시하고 군대를 양성하려는 목적이었다.

1910년 6월에는 연해주와 국내의 의병을 통합, 십삼도의군을 조직했다. 도총재는 유인석이 맡았고, 이범윤 이남기 홍범도 안창호 등이 함께했으며 보재는 외교를 담당했다. 블라디보스토크 한인대회를 열어 성명회를 조직, 항일 투쟁을 벌였다. 이를 불온하게 여긴 일제는 러시아에 제재를 요구했다. 러시아 정부는 성명회와 십삼도의군 대표 20여명을 체포했으며, 이상설은 니콜리스크로 추방됐다가 이듬해 석방됐다. 한인사회 산업을 진흥시키자는 취지로 권업회를 조직하고 권업신문도 발행했다. 보재는 권업회의 창립총회에서 의장을 맡았고, 단재 신채호에 이어 권업신문의 주필과 사장직도 수행했다.

1914년에는 연해주를 중심으로 대한광복군정부를 조직하고 정통령을 맡았다. 이 조직은 경술국치 이후 최초의 해외 망명정부로 노령·북간도·서간도 3개 지역에 산재한 군대의 업무를 총괄했다. 그러나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되면서 러시아와 일본이 동맹을 맺고 연해주의 한인사회를 탄압, 권업회는 물론 대한광복군정부도 해체됐다.

1915년 상하이로 가서 여러 독립운동단체를 묶은 신한혁명당을 조직했다. 박은식 신규식 조성환 유동열 등이 참여한 혁명당은 국내외 군대를 연결하여 무장독립 전쟁을 추진했다. 이상설은 고종을 망명시켜 독립운동에 활용하려 했으나 서울에 파견한 성낙형이 일제에 체포돼 실패했다.

충북 진천 이상설 생가 옆의 숭렬사 경내에 세워진 보재 이상설 동상. 김재근 선임기자
충북 진천의 보재 이상설 기념관. 2023년 3월 말에 문을 열었다.
보재 이상설기념관 앞에 설치된 이상설 동상. 김재근 선임기자

□ 48세에 러시아서 순국… 기획 실천력 모두 갖춘 인재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온 보재는 1916년부터 병석에 누웠다가 1917년 4월 1일 우스리스크에서 폐질환으로 순국했다. 향년 48세였다.

이상설은 저물어가는 조선왕조의 마지막 관리가 됐다가 망국을 겪고 독립운동에 뛰어들어 고난으로 점철된 삶을 살다 갔다. 광복을 위해 민족계몽과 외교독립, 무장투쟁 등 3가지 독립운동 노선을 모두 시도했다. 그의 생애에는 엄혹한 시절 갖은 방법으로 분투했던 독립지사의 눈물겨운 시간이 생생하게 담겨있다.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한 뒤 일제의 심문에서 "이범윤과 같은 인물 만명을 모아도 이상설 한 분에 못 미칠 것이다."라며 존경을 표했다. 독립운동가들도 그를 '두뇌' '주뇌'라며 이론과 기획· 실천력, 전략적 사고까지 갖춘 최고 인물로 평가했다. 더 오래 살았더라면 상해 임시정부에서도 큰 역할을 해냈을 인재 중의 인재였다. 유학자 집안에서 성장했지만 새로운 학문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근대 수학을 정리한 <수리>라는 책도 내고 물리학 분야 <백승호초>, 화학 분야 <화학계몽초>를 저술하는 등 근대과학에 선구적인 업적을 남겼다.

조국 광복을 위해 해외를 떠돌다 순국한 그의 유언이 큰 울림을 준다.

"동지들은 합세하여 조국 광복을 기필코 이룩하라. 나는 조국 광복을 이루지 못하고 이 세상을 떠나니, 어찌 고혼인들 제국에 돌아갈 수 있으랴. 내 몸과 유품은 모두 불태우고, 그 재도 바다에 날린 뒤 제사도 지내지 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