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줌인] 3·1운동,6·10만세운동 막후 지원한 천도교 4세 교주

동학농민운동 참전해 덕산 예산 신례원 전투 승리 신간회 운영도 주도적 참여… 멸왜기도운동 이끌어 광복 80주년 기념, 충청의 독립운동가와 그 발자취 ⑩ 예산출신 춘암 박인호

2025-03-30     김재근 선임기자
서울 강북구 우이동의 봉황각. 1910년 천도교에서 교인들의 교육과 수련을 위해 지은 건물로 이곳을 거쳐간 많은 인사들이 3.1만세운동과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사진=국가유산청

지난 2019년 불교 기독교 천도교가 공동으로 3.1운동과 관련 주목할 만한 의견을 내놓아 큰 관심을 끌었다. 3.1운동의 민족대표가 33인 아닌 50인이라고 밝힌 것이다. 3개 종교가 참여한 10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회는 50인에 대한 자료, 유적, 사진 등을 발굴, 정리한 자료집 8권도 펴냈다.

춘암 박인호는 천도교 제4세 교주로 독립운동사에 많은 발자취를 남겼다.

잘 알다시피 3.1운동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인물은 33명인데, 동아일보 1920년 7월 12일자 3.1 운동 재판 기사에는 48명의 사진이 실렸다. 서명자 33중에서 3.1운동 직후 중국으로 망명한 김병조와 옥중 순국한 양한묵을 제외한 31명에 17명을 더한 48명이다. 17명은 천도교의 박인호 김홍규 노헌용 이경섭 4명, 기독교는 김도태 안세환 함태영 김원벽 김세환 5명, 기타(일반) 임규 송진우 현상윤 최남선 강기덕 정노식 김지환 한병익 8명이었다.

민족대표 50인은 선언서 서명자는 물론 기획과 연락, 문서 작성과 인쇄 배포, 조직 동원, 자금 지원 등에 참여한 인사 17명까지 더한 숫자이다. 망명하거나 사망한 김병조와 양한목을 제외하여 48명이라고 하는 주장도 있으나 이들 2명도 분명한 독립지사로 제외할 이유가 전혀 없다.

추가자 17명 중의 대표적인 인물 중의 하나가 충남 예산 출신 춘암 박인호이다. 춘암은 3.1운동을 주도한 의암 손병희의 그림자같은 존재로 의암에 이어 천도교 4세 교조를 지냈다. 의암이 대내외적으로 천도교를 대표했다면 춘암은 내부에서 천도교의 체계화와 교세 확장, 교육, 조직, 재정, 민족계몽운동, 독립운동 자금지원 등 실무를 도맡았다.

1910년대 동학의 주요 인사들로 동학농민운동 당시 접주와 대접주로 추정된다. 맨 아래 앉아있는 왼쪽 사람이 춘암 박인호, 오른쪽이 의암 손병희이다. 사진=카페 모시는 사람들

 

충남 예산군 예산읍 관작리에 세워진 동학농민운동기념공원의 조형물. 박인호는 1894년 당시 내포지역의 동학군을 이끌었다. 김재근 선임기자

□ 동학농민운동 참전, 덕산 예산 전투 승리

의암은 "춘암은 생각하는 것은 나만 못하지만, 대도를 지키는 데는 내가 춘암만 못하다. 춘암은 밤에 만져 보아도 도(道) 덩어리이다. 내가 한강을 걸어서 건너라 하면 춘암은 서슴없이 걸어 들어간다"라고 할 만큼 절대 신임했다. 의암이 3.1운동에 앞서 감옥행을 예견하고 춘암에게 천도교의 훗날을 당부했을 정도이다.

춘암은 1855년 충남 예산 오가면 양막리 빈농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1833년 예산읍의 김월화 부부를 통해 처음 동학을 접했고, 천안 목천에 있는 동학 2세 교주 해월 최시형을 찾아가 동학에 입문했다. 이듬해에는 충북 음성 가섭사 사은암에서 최시형의 지도 아래 손병희를 만나 함께 49일간 수련을 했다. 동학에 깊이 심취한 춘암은 포교에 노력했고 교인 수천 명과 10여 개의 포를 맡는 지도자로 성장했다.

1892년 동학교조인 최제우의 억울함을 풀어달라는 신원운동을 벌어지자 교도들과 함께 상경하여 궁궐 앞에서 상소를 했다. 1893년 충북 보은에서 열린 집회 때는 덕의포를 이끄는 대접주에 임명됐다. 보은집회은 전국에서 동학교도 1만-2만명이 집결, 최제우에 대한 신원, 일본과 서양세력 배척, 탐관오리 처벌 등을 요구했다. 동학은 정부의 강경 대응과 고종의 해산명령을 따라 집회를 그만뒀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동학군을 이끌고 참전했다. 춘암은 호서의 지도자 박희인과 함께 관군 및 일본군과 전투를 벌여 덕산 예산 신례원 등에서 승리했으나, 홍주성 전투에서 신식무기를 앞세운 일분군에게 패배했다. 관군의 추격을 피해 예산의 금오산과 청양의 칠갑산에 숨어 살다가 1897년부터 최시형을 찾아가 동학의 일을 보았으며, 1898년 최시형이 체포돼 교수형을 당하자 유해를 수습하여 안장했다.

1897년 최시형의 뒤를 이어 의암 손병희가 3세 교주에 오르자 시종일관 의암과 함께했다. 나이는 춘암이 의암보다 6살 많았지만 개의치 않았다. 1901년 의암이 일본으로 망명한 뒤 국내에서 문명개화운동을 도모하자 평안도와 황해도 등 서북지방을 돌며 문명개화의 필요성을 널리 알렸다. 의암의 지시에 따라 진보회를 조직, 민족주의적인 입장에서 문명개화와 계몽운동을 벌였다.

922년 8월 천도교 북경전교실의 인사들. 앞줄 가운데가 신숙, 왼쪽이 박래홍(춘암 박인호의 아들), 신숙의 뒤에 서있는 인물이 최동오. 천도교는 중국 포교조직을 통해 상해임시정부를 지원했다.

□ 신간회 지원, "일본 망하게…" 기도운동 벌여

의암이 1905년 동학의 명칭을 천도교로 바꾸고 개혁에 나서자 춘암은 금융관장, 차도주, 대도주를 맡아 교단을 조직하고 정비했으며, 각종 제도와 규칙을 만들고 다듬었다. 전국에 천도교 교리와 보통교육을 가르치는 교리강습소를 700여 개나 설치했다. 적극적인 포교 활동 덕분에 1910년대 신도가 300만명에 이를 정도로 교세가 커졌다.

1919년 3.1운동 때 춘암은 손병희의 전략에 따라 민족대표 33인에는 이름을 올리지 않은 채 자금 집행과 조직동원 등을 담당했다. 춘암은 거사에 앞서 평안 황해도의 천도교 지도자 30여 명을 서울로 불러 만세운동의 취지를 알렸다. 독립선언의 취지를 설명한 조선독립신문 1만부를 제작, 3월 1일 탑골공원 시위대에 배포했다. 결국 춘암도 3월10일 일경에 체포됐고, 출판법 및 보안법 위반으로 기소됐으나 1920년 10월 무죄를 받고 1년 8개월 만에 풀려났다.

춘암은 그 뒤로도 계속 독립운동을 벌였다. 상하이와 베이징에 천도교 포교 조직을 설치하고 이곳에서 일하는 최동오와 신숙을 연결고리로 하여 임시정부에 자금을 댔다.

충남 예산군 오가면 양막리 생가터에 세워진 춘암 박인호 유허비. 김재근 선임기자

1926년 조선조 마지막 왕인 순종의 장례일에 일어난 6.10 만세운동도 적극 지원했다. 권오설이 주도한 이 만세운동은 사회주의 민족주의 종교계 청년계 노동계 농민계가 두루 참여한 반일운동이었다. 천도교에서는 청년동맹의 박래홍과 박래원 등이 직접 참여했으며, 전국적인 조직을 동원하여 격문의 인쇄와 배포 등의 실무도 담당했다.

1927년에는 항일단체 신간회의 탄생과 운영에 천도교가 주도적으로 참여하게 했다. 신간회는 조선의 정치·경제적 해방을 목표로 독립·청년·사회운동 등을 벌인 단체로 천도교의 권동진이 초대 부회장, 이종린과 박래홍(춘암의 아들)이 중앙위원으로 참여했다.

멸왜기도운동도 춘암이 주도한 독립운동이다. 춘암은 1936년 8월 전국의 천도교인에게 식사 때마다 일제의 패망을 재촉하는 기도를 올리도록 했다. 기도문은 "개같은 왜적놈을 한울님께 조화(신통함)받아 일야간(하룻밤)에 소멸하여 속히 조선독립달성하고 대보단에 맹세하고 더러운 오랑캐 원수까지 갚겠습니다."는 내용이었다. 일제는 1938년 2월 이 특별기도를 적발한 뒤 전국적으로 단속에 나서 천도교도 256명을 투옥했다. 당시 춘암은 84세의 병약한 노인이라 체포를 면했지만 교인 4명이 고문 후유증으로 출옥 후 사망했다.
 

동아일보 1920년 7월 12일자 3.1운동 관련 기사에 48명의 사진이 실려 있다. 맨 아래 줄 오른쪽 세번째가 춘암 박인호이다.

□ 의암 손병희 뒤에서 온갖 일 도맡아

춘암은 1940년 4월 86세로 세상을 떴다. 천도교(동학)는 수운 최제우-해월 최시형-의암 손병희-춘암 박인호로 종통이 이어지며 조선말에서 일제강점기 민족사에 커다란 자취를 남겼다. "사람이 곧 하늘(한울)"이라며 인간은 누구나 존엄하고 평등한 존재라는 사상으로 봉건적인 신분질서를 타파하려 했고, 포덕천하, 광제창생, 보국안민, 지상천국이라는 이념을 내세워 어두운 시대 고통받는 백성들에게 새로운 세상이 열릴 것이라는 희망을 제시했다. 민족 개화와 계몽, 교육에 앞장섰고 독립운동에도 크게 기여했다. 춘암은 1908년 손병희에 이어 4세 교주에 오른 뒤 오롯이 종교인이자 사회운동가 독립운동가의 삶을 살았다. 박래홍 박래원 등 춘암의 자식과 집안사람도 천도교인으로서 독립운동을 벌였다.

독립운동사에 천도교가 얼마나 크게 기여했는 지는 백범 김구의 말에 잘 나타난다. 해방이 되고 상해에서 돌아온 김구는 천도교 대교당에서 행한 귀국 연설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천도교가 없었다면 3.운동이 없었고, 3.1운동이 없었다면 … (중략) … 상해 임시정부가 없고, 상해 임시정부가 없었다면 대한민국의 독립이 없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