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줌인] "대동단결" 호소… 독립운동 헌신한 임시정부 '큰 어른'
② 임정의 정신적 지주 석오 이동녕 광복 80주년 기념, 충청의 독립운동가와 그 발자취 청년기부터 국내는 물론 중국·러시아 오가며 활동 임시정부 의장 3회·주석 4회 등 순국 전까지 온힘
임시정부하면 여러 인물이 떠오른다. 김구, 여운형, 조소앙, 이승만, 안창호, 김규식, 이회영, 이시영, 조완구, 신채호, 양기탁, 이동휘, 박은식, 홍진 등…. 윤봉길과 이봉창 의사도 임시정부와 닿아 있다. 헌법전문에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밝혔듯이 임정은 대한민국의 뿌리이다. 1897년 세워졌다가 1910년 일제에 병합돼 사라진 대한제국을 딛고 왕이 아닌 백성이 주인인 민주공화제 국가가 탄생한 것이다.
임정의 상징인 백범 김구 못지않게 일생을 독립에 헌신한 사람이 있으니 그가 바로 석오 이동녕이다. 석오는 임정의 정신적 지주, 웃어른, 큰어른, 구심점 등으로 불린다. 힘들고 궁핍하고 암울했던 상황에서 임정의 중심을 잡고 온갖 이견과 갈등, 분열을 극복해냈다. 그의 호는 돌 같은 사람이라는 뜻의 '석오(石吾)'이다. 큰 바위처럼 묵직한 겸양의 자세로 통합과 단결을 도모했다.
석오는 사회운동가, 교육자, 언론인, 임시정부 요인 등 다양한 삶을 살았고, 종교도 기독교와 대종교를 섭렵했다. 이처럼 폭 넓은 인생역정을 관통한 것은 대한독립이었다. 일제에 빼앗긴 나라를 되찾기 위한 방편으로 온갖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이동녕은 1869년 천안시 목천면 동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 한학을 공부했고 24살 때 응제진사(임금의 특명으로 치르는 임시 과거)에 합격, 진사가 됐다. 그러나 석오는 전통적인 유학에 머무르지 않았다. 조선에서는 1884년 갑신정변, 1894년 동학농민운동과 청일전쟁, 갑오경장, 1904년 러일전쟁이 일어나고 1905년에는 을사늑약이 체결되는 등 격변이 일어났다. 이러한 사건과 서구문화, 기독교 등을 접하면서 국권수호, 민권, 개화, 개혁, 민주, 평등, 평화, 민족의식 등의 가치관이 싹텄던 것으로 보인다. 조국의 독립과 민주국가 건설이 일생의 과제로 자리 잡았다.
□ 청년기부터 사회운동, 교육, 언론 참여 독립운동
청년기에서 50세까지 석오는 국내는 물론 중국과 러시아를 오가며 독립운동을 펼쳤다.
1893년 원산에서 부친이 운영하던 광성학교(광명학교)에서 육영사업을 벌였다. 1896년에는 서재필, 윤치호, 이상재 등이 만든 독립협회에서 활동하며 만민공동회를 개최, 민권과 국권 수호, 부패 무능 관료 해임, 외세 축출, 신분차별 철폐 등을 요구했다. 이 때문에 이준, 이승만 등과 함께 7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는 이종일이 운영하는 제국신문의 논설위원이 되어 우리 스스로 강해져야 한다는 자강론을 역설했다. 1902년에는 전덕기 목사 등과 함께 YMCA운동을 펼쳤다.
석오는 을사늑약으로 대한제국이 외교권을 빼앗기자 조약 파기를 주장하다 2개월간 감옥생활을 했다. 석방이 되자 1906년 북간도 용정촌으로 망명, 이상설 등과 서전의숙을 세워 민족교육을 실시하고 독립 의지를 불어넣었다.
귀국 후에는 신민회와 공립협회를 조직하고 대한매일신보 창간을 도왔으며, 대성학교와 오산학교 설립에도 참여했다. 신민회는 각계각층 800여 명이 참가한 비밀결사로 실력 양성을 통한 국권 회복을 목표로 대중계몽, 교육과 산업 진흥, 독립군 양성 등을 추진했다. 1911년 일제는 데라우치 마사타케 총독의 암살을 기도했다는 105인 사건을 조작하여 신민회를 탄압했고 여러 인사들이 검거돼 감옥에 가고 옥사했다. 신민회는 훗날 만주 신흥무관학교와 상하이 임시정부의 토대가 됐다.
1910년 한일병합조약으로 대한제국이 사라지자 석오는 만주 서간도로 망명,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하여 초대 교장을 맡았다. 이 학교 출신의 독립군은 만주의 서로군정서와 북로군정서, 중국 본토의 의열단, 임시정부 산하 광복군 등의 주축을 이뤘다.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으로 거처를 옮긴 석오는 군관학교 설립을 추진하다 붙잡혀 3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항일독립운동단체인 권업회를 만들고, 대동신문과 해조신문을 발행, 민족정신을 고취시켰다. 1918년에는 길림에서 대종교 김교헌를 비롯 조소앙, 조완구, 김좌진 등과 무오독립선언서를 발표했다.
□ 임정 의장 3회, 주석 4회, 국무총리 6회 지내
1919년 3.1독립만세운동 이후 석오는 임시정부에 헌신한다. 임정은 우리 역사상 최초의 민주공화정 국가로 입법기관인 임시의정원, 사법기관인 법원, 행정기관인 국무원을 두어 3권분립 체제를 갖췄다. 석오는 임정 의정원의 초대 의장으로 선임돼 4월 11일 정부 수립을 선포했다. 이승만이 행정의 수장인 국무총리로 선출됐으나 미국에서 오지 않자 권한대행을 맡는다. 임정이 대통령제로 바뀌자 이승만이 대통령, 석오는 내무총장을 맡아 포고문을 작성하여 국내 동포들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국내와 연계한 연통제의 조직과 운영을 담당했다. 이듬해 이동휘가 이승만과 갈등으로 국무총리를 그만두자 총리 대리를 맡아 위기를 극복했다.
1923년 임정의 내부 갈등과 투쟁방안을 논의하기 위해 국민대표회의가 개최되자 안창호, 여운형, 조소앙 등과 시사책진회를 구성하여 대동단결을 호소했다. 1924년에는 국무총리로 취임했으며, 이승만의 오래 자리를 비우자 대통령 직대를 맡았다.
이처럼 석오는 임시의정원 의장 3차례, 주석 4차례, 국무총리 6차례(서리와 대리 포함), 대통령, 내무총장, 군무총장 등으로 일하며 임정을 지켰다. 출신지와 이념, 투쟁 방법론 등에 따라 갈라질 때도 그는 늘 대동단결을 주장했다. 공정하고 청렴하고 온후했던 까닭에 반대세력도 석오를 존경했으며 임정이 위기에서 처할 때마다 중책이 맡겨졌다. 임정 요원 중에서 석오처럼 핵심 요직을 두루 많이 거친 사람이 없다.
백범 김구는 석오에 대해 "이(利)를 보면 겸양을 생각하고 의(義)를 보면 위험을 무릅쓴다. 재덕이 출중하나, 일생을 자기만 못한 동지를 도와 선두에 내세우고 남의 부족을 보충하고 고쳐 인도했다"고 회고했다. 백범이 어려울 때마다 늘 상의하고 의지한 게 석오였다. 백범은 "오늘의 나를 있게 한 것은 이동녕의 덕분이었다"고 밝혔다. 석오는 1932년 김구, 이유필 등과 계획을 세워 윤봉길과 이봉창 의사의 의거를 추진했다.
□ 순국 순간까지 독립 위한 "대동단결" 호소
석오는 임정이 상하이, 항저우, 난징, 창사, 치장으로 옮겨 다니는 동안 단 한번도 임정을 떠나지 않았다. 1937년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김구와 함께 한국국민당 대표로 여러 정당 및 단체와 통합을 추진했으며, 1939년 네 번째 주석을 맡아 전시내각을 구성하고 병력을 모집하기 위해 서안에 대한군사단을 파견하였다.
노구를 이끌고 백범과 함께 광복군 창설을 위해 노력하다 급성폐렴으로 쓰촨성 치장에서 숨을 거두게 된다. 1940년 3월 13일, 그의 나이 71세였다. 운명하는 순간까지 석오는 한국국민당과 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이 꼭 통합하라며 단결을 호소했다. 석오의 유언대로 3당은 한국독립당으로 통합 출범, 충칭 임시정부 시대를 이끌게 된다.
석오의 71년 삶의 지향점은 오직 하나 대한독립이었다. 독립운동가들이 분열하고 다툴 때 그는 "싸우려면 왜놈하고나 싸워라"고 호통치며 묵묵히 임정을 지켰다. 강하고 직선적인 백범 김구 곁에서 그는 늘 자신을 뒤로 한 채 양보하며 타인을 보듬어 안았다. 겸양과 소통으로 화합과 단결을 이끌어낼 수 있는, 이 시대에 꼭 필요한 인물상이 100여년 전 임정의 기둥으로 올곧게 서 있었던 것이다.
서문동 석오 이동녕선생 선양회 상임대표
"석오 선생의 업적이 너무 낮게 평가돼 있습니다. 임시정부의 의정원(국회)의 의장을 3차례나 지냈고, 주석 4차례와 대통령을 역임하는 등 국가수반을 5차례나 역임하셨습니다. 1962년에 건국훈장 2등급인 대통령장을 추서한 것은 공적 자료가 미비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석오이동녕선생선양회 서문동 상임대표(남서울대 행정지원처장)는 2019년 창립 이래 천안 출신 독립운동가 이동녕을 기리기 위해 다양한 활동을 펼쳐왔다. 석오의 업적을 새롭게 조명하는 행사도 열고, 근래에는 서훈을 올리기 위한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2등급인 건국훈장 대통령장 대신 1등급인 건국훈장 대한민국장으로 높여야 한다는 것이다. 지난해 말 현재 독립유공자 중 대한민국장 서훈자는 33명, 대통령장 90, 독립장은 822명이다.
"석오는 초대 임시의정원 의장으로서 대한민국이란 국호를 정하고 삼권 분립에 기초한 민주공화제를 채택하는 등 민주국가의 초석을 놓았습니다. 백범 김구도 가장 존경하는 사람으로 석오를 꼽았습니다."
서훈 상향을 위해 서문동 대표는 박상돈 천안시장과 함께 2023년 출범한 서훈상향민관추진위원회 공동위원장을 맡았다. 지난해 말까지 시민 7만 3000명의 서명도 받았다.
"석오는 애국계몽과 독립운동에 평생을 바쳤습니다. 대동단결을 강조한 선생의 삶과 정신을 널리 알리도록 노력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