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희순의 충청女지도] 가슴속 군자의 도 품고 인생 살아간 여성 선비
김호연재② 남녀차별 심했던 조선시대 장벽 앞 자신의 처지 크게 좌절 "할 수 있는 일 아무것도 없다" 탄식하며 문학 작품으로 승화
아까워라, 이내마음(可惜此吾心) / 탕탕한 군자의 마음(蕩蕩君子心). / 겉과 속 숨김이 없으니(表裏無一隱) / 밝은 달이 흉금을 비추도다(明月照胸襟). / 맑고 맑음은 흐르는 물과 같고(淸淸若流水) / 깨끗하고 깨끗함은 흰 구름 같아라(潔潔似白雲). / 화려한 사물 즐겨하지 아니하고(不樂華麗物) / 뜻은 구름과 물의 자취에 있도다(志在雲水痕). / 속된 무리와 하나 되지 못하니(弗與俗徒合) / 세상 사람들 도리어 그르다 하네(還爲世人非). / 규방 여인의 몸 된 것 슬퍼하노니(自傷閨女身) / 창천은 가히 알지 못하리라(蒼天不可知). / 아, 할 수 있는 일 그 무엇이랴!(奈何無所爲) / 다만 각각의 뜻 지킬 뿐이지(但能各守志). - 김호연재 시 '자상(自傷)'
이 시는 김호연재(1681-1722) 시인이 읊은 '자상'이다. 김호연재는 시에서 '탕탕한 군자의 마음'을 지닌 자기 자신이 너무도 아깝다는 말로 시상을 열었다. 김호연재는 자신이 여성으로 태어난 것을 슬퍼했다. 밝은 달처럼, 맑고 맑은 물처럼, 깨끗하고 깨끗한 흰 구름처럼, 그녀의 정신세계는 높고 고결함을 추구했다. 화려한 사물이나 타인의 사랑을 구하는 성정이 아니기에, 여성으로 태어난 것을 더욱 슬퍼했다. 김호연재는 탕탕한 군자의 마음을 지니고도 다 펼쳐 낼 수 없었던 시대의 장벽 앞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다"라고 말하며 좌절했다.
◇동춘당 송준길의 증손부
김호연재는 19살인 1699년에 동춘당 송준길의 증손자 소대헌 송요화(1682-1764)와 혼인했다. 혼인 후 첫 번째 집은 법천으로, 지금의 대전 대덕구 법동이다. 김호연재는 법천에서 15년, 송촌에서 8년, 스물세 해를 회덕의 하늘 아래에서 살다 갔다.
김호연재의 친정 안동 김씨와 시집 은진 송씨는 선대부터 혼인과 학맥으로 맺어진 관계다. 회덕 은진 송씨의 역사를 연 쌍청당 송유(宋愉)의 증손녀 송씨(宋順年의 딸)는 영의정을 역임한 정광필의 처인데, 정광필과 송씨 부부는 김호연재의 고조부 김상용의 외고조부와 외고조모이다. 송·김 두 가문의 친밀한 관계는 문중의 위선사업, 곧 송씨의 선대 무덤의 비석이나 각종 건축물의 편액과 기문 등을 써 준 것으로도 알 수 있다.
송·김 두 가문이 본격적으로 혼인관계를 맺기 시작한 것은 제월당 송규렴(宋奎濂)과 안동 김씨 김태희(金兌喜)의 혼인이다. 김태희는 김호연재의 종고조 김상헌의 손녀다. 김태희는 송규렴의 아내로, 김호연재는 송준길의 증손자 송요화의 아내로 각각 회덕 은진 송씨의 여성으로 살았다.
◇가난과 고독으로 점철된 혼인생활
혼인 이후 김호연재의 삶은 가난과 고독, 치열함으로 얼룩져 있다. 혼인 이전엔 아들과 딸 차별 없는 교육을 받으면서 막내딸 꿈 많은 문학소녀로 성장했다면, 혼인 이후엔 가정 살림의 무게를 짊어진 생활인으로서의 삶을 살게 된 것이다. 그리고 새롭게 형성된 가족관계 속에서 적잖은 불편함이 드러났다. 그 불편함과 갈등의 극단에서 셋째 언니에게 보낸 시가 있다. "깊고도 깊은 시름 고통스러우니, 항상 적에게 포위되어 있는 듯하다('속오형(屬五兄)' 시)"라고.
남편 송요화는 과거 공부 등 학문 연구에 몰두하고자 집을 떠나있을 때가 많았다. 김호연재는 남편의 부재 속에서 살림을 경영하느라 노심초사했다. 30여 명에 달하는 노비들의 생계도 책임져야 하는 입장에 있었던 것이다. 노비의 규모를 보면 부유했던 것으로 짐작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조선시대의 농사는 열악했고, 가뭄 등 흉년이라도 들면 주인 입장에서 그들의 식량문제까지 해결해야 하는 의무가 주어졌던 것도 사실이다.
이로 인해 친가나 시가의 가족에게 식량 좀 보내달라는 절박한 편지를 자주 보내게 됐다. 25살 때인 1705년 12월, 제천현감으로 재직 중인 시아주버니 송요경에게 전달된 한 통의 편지가 전해진다. 그 편지의 주요 사연은 "장이 떨어져 절박하니, 콩 서너 말만 얻어서 간장을 담아 먹으려 합니다"이다. 사실 이런 편지는 가정 경제를 책임져야 할 남편에게 보내는 것이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호연재가 42살로 세상을 하직할 때까지, 남편은 벼슬살이에 나아가지 못했다. 가난은 호연재의 생애 속에서 계속되었다. 보은 군수로 재직 중인 친정 7촌 조카 김순행에게 쌀을 구하는 시 '걸미삼산수(乞米三山守)'가 전해진다.
◇문학으로 치유된 삶, 죽음 앞에서도 다짐한 군자 정신
김호연재는 속된 세상 사람들과 섞일 수 없었으므로 자신이 늘 외톨이였다고 고백했다. 넓고 광대한 군자의 기상을 지녔으나, 자신의 역량과 욕망을 펼칠 수 있는 시대가 아니었으므로 고통스러워했다. 이에 "술을 마시고 시를 쓰나니, 세상 사람들이 미치광이라고 말해도 꺼리지 않겠다(詩酒任隨意, 不嫌世稱狂. '한정(閑情)'시)"라고 그 궁극의 아픔을 쏟아냈다. 김호연재의 문학작품 속에는 술에 대한 얘기가 적잖게 나온다. 김호연재는 새벽이슬이 옷깃을 적시는 순간까지 잠 못 이루며, 그렇게 문학으로 자신의 삶을 위로하고 치유했다.
김호연재는 한시작품 곳곳에서 '군자'·'성현'·'도'를 언급하며, 그 정신을 잃지 않고 실천하고자 했다. '만음'이라는 시는 42살 죽음을 앞둔 지점에서 창작한 것이다. 김호연재는 이 시에서 40여 년의 삶을 돌이켜 보며 "가난과 근심, 질병과 고통, 영광과 치욕이 다 내 명이다. 다만 몸과 마음을 살펴 성현을 배우겠다(點檢人間四十年, 貧憂疾苦互相連. 窮通榮辱皆吾命, 但省身心學聖賢.)"고 다짐했다.
김호연재는 말년으로 갈수록 마음속에 화(火)를 갖게 됐다. 문헌에 의하면 그는 세상을 하직하기 전 몇 년간 극심한 심화병(心火病)에 시달렸던 것으로 보인다. 왜 아니겠는가. 가슴 속에 군자의 도를 심고, 그 하나의 일념으로 인생을 경영한 여성 선비. 그러나 김호연재는 "뜻이 있어도 말하기 어렵고, 문필 있으나 감히 다하지 못한다. 다만 홀로 소리를 삼켜 통곡하고, 뚝뚝 눈물이 옷깃을 적신다"라고 탄식하였다. 300여 년 전 김호연재는 그렇게 여성문학사의 역사가 됐다. 문희순 문학박사·충청문화연구소 연구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