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줌인] 독립투사 집안의 10대 소녀, 아우내만세운동 주도
① 유관순 열사와 독립운동가 가족 광복 80주년 기념, 충청의 독립운동가와 그 발자취 인근 지역 돌며 동참 요청… 수감 후에도 광복 의지 불태워 부모 모두 순국, 오빠도 공주 만세운동 주도 혐의 징역형
한겨울 찬 바람이 거세게 불고 눈발이 흩날리는 날 유관순 열사의 고향을 찾았다. 수은주가 크게 떨어져 손발이 금방이라도 얼어붙을 듯 시려왔다. 엄동의 날씨에도 드문드문 유관순 열사의 기념관과 생가를 찾는 사람들이 보였다.
유 열사는 1902년에 태어나 1920년 18세의 나이에 세상을 떴다. 우리 역사에 이처럼 짧게 살다간 인물이 길이길이 위대한 인물로 추앙받는 사례가 없다. 수많은 독립운동가 중에서 가장 선명하게 기억되는 인물 중의 하나가 유 열사이다. 왜 10대의 어린 여성이 이처럼 죽음을 무릅쓰고 처절하게 '독립'을 외쳤을까?
□ 천안 연기 청주 진천 등 돌며 동참 요청
그가 태어난 천안시 병천면 생가는 초라한 초가집이다. 안채는 방 2개와 툇마루, 부엌이 있는 ㄱ자형 구조이고, 앞쪽 별채는 헛간과 화장실이 있는 ㅡ자형 작은 집이다. 학교를 다닐 형편이 아니었는데 사애리시(Mrs. Alice H. Sharp)라는 선교사가 이 동네 교회를 방문했다가 유관순의 똑똑하고 당찬 모습에 이끌리게 된다. 선교사는 그를 공주로 데려가 영명여학교 보통과에 입학시켰다. 1916년 이 선교사의 도움으로 서울의 이화학당 보통과 3학년에 교비 장학생으로 편입했다.
유 열사는 1919년 고등과 1학년 때 운명의 3·1독립만세운동을 만난다. 3월 1일 파고다공원 시위대가 이화학당 앞에 이르러 이 학교 학생들의 동참을 외쳤고, 유 열사는 친구들과 담을 넘어 만세운동에 나섰다. 그는 3월 5일 남대문 제2차 만세운동에도 참여했다. 이날 다른 학생들과 함께 일경에 붙잡혀 구금됐으나 학교측의 도움으로 풀려났다.
휴교령이 내려지자 3월 13일 사촌 언니 유예도와 함께 고향인 천안으로 내려와 독립만세 운동을 벌인다. 아버지 유중권, 작은아버지 유중무, 기독교 전도사 조인원(독립운동가 조병옥 박사의 부친) 등과 아우내(병천) 장날인 4월 1일에 만세운동을 벌이기로 한 것이다. 인근은 물론 천안, 연기(세종시), 청주, 진천 등을 돌며 동참을 요청했다.
4월 1일 오전 아우내 장터에서 3000여 명이 모여 시위를 시작했다. 그는 태극기를 나눠주고 선두에 섰다. 오후 1시경 긴급출동한 일제 헌병이 군중을 칼로 찌르자 유관순을 비롯한 시위대는 희생자를 메고 헌병파견소로 몰려가 격렬하게 항의를 벌인다.
□ 부모 모두 아우내장터 현장에서 순국
잠시 뒤 병력을 충원한 일제 헌병은 총검을 휘두르며 무차별 사격을 실시, 유 열사의 아버지 유중권과 어머니 이소제 등 19명이 죽고 30여명이 부상을 당했다. 그는 아버지의 시신을 업고 시위대원과 함께 파견소로 몰려가 항의를 벌였다.
유 열사는 아우내만세운동 주모자로 체포돼 공주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로 징역 5년형, 2심인 경성복심법원에서 3년형을 받았다. 그는 "삼천리 강산이 어디인들 감옥이 아니겠느냐."라며 상고를 포기, 3년형이 확정돼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다.
유 열사는 옥중에서도 광복의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동료들과 함께 만세를 불렀고 이로 인해 숱한 고문을 당한다. 이듬해 3월 1일에는 3.1운동 1주년을 맞아 옥중에서 독립운동가인 어윤희, 박윤덕 등과 함께 만세를 주도했고 이 때문에 더욱 심한 고문을 겪게 된다. 만세운동 당시 입은 상처도 있던 데다 고문으로 방광이 파열되는 등 건강이 악화돼, 1920년 9월 28일 18세 나이로 형무소에서 숨을 거둔다. 살이 썩어들었지만 일제는 치료를 해주지 않았다.
돌아보면 그는 매우 짧은 그러나 영원한 삶을 살았다. 공주 영명여학교와 이화학당, 만세운동 외에는 별다른 기록이 없다. 꽃처럼 피어날 시기에 조국 독립이라는 큰 짐을 안고 사투하다 삶을 마친 것이다.
유 열사는 이화학당 시절 태극기를 그려 교실과 기숙사 벽에 붙이고, 친구들과 함께 태극기와 애국가를 적어 갖고 다녔다고 한다. 일제의 재판이 의미가 없다며 만세운동 재판 3심을 포기했고, 감옥에서도 온갖 고문에 굴하지 않고 만세운동을 벌였다. 아우내만세운동 당시 아버지와 어머니가 학살당하자 군중들과 함께 헌병대로 시체를 메고 가 격렬하게 항의를 벌였다.
감방 동료인 독립운동가 어윤희는 유 열사가 배고픔과 외로움, 동생들 걱정 때문에 고통스러워하고 슬퍼했다고 기억했다. 파주만세운동을 주도한 임명애가 감방에서 애를 길렀는데 그가 한겨울에 기저귀를 허리춤에 차서 녹여줬다고 한다. 독립을 위해 강렬한 의지와 행동으로 일관했지만 한편으로는 배고픔에 힘들어하고 집안을 걱정하는 따뜻하고 여린 소녀였던 것이다.
□ 오빠는 공주만세 주도, 독립운동가 다수 배출
유 열사 뿐 아니라 집안의 독립운동도 길이 기억할 만하다.
아버지 유중권은 지역 인사들과 함께 아우내 만세운동을 기획, 주도했고, 4월 1일 당일 일제의 총검에 찔려 죽었다. 어머니 이소제도 만세시위에 참여, 남편의 죽음에 항의하다 총에 맞아 순국했다. 오빠 유우석은 4월 1일 공주 만세운동을 주도한 혐의로 체포돼 징역 6월형을 선고받았다. 유우석은 원산청년회 활동으로 4년형을 받는 등 계속 독립운동을 벌였다. 유우석의 처 조화벽도 강원도 양양의 만세운동을 이끈 독립운동가이다.
유 열사의 작은아버지 유중무는 아우내만세운동 주동자로 체포돼 징역 3년형을 받았다. 유중무의 장녀인 유예도도 서울 파고다공원 독립만세에 참여했고, 유 열사와 함께 귀향하여 만세운동을 시작했다. 유중무의 손자인 유제경은 교사로 재직하던 중 학생들에게 독립사상을 고취시켰다는 이유로 3년형을 치렀다. 유예도의 아들인 한필동은 오사카외국어대학 재학 중 학병으로 징집돼 중국에서 근무하다 탈출, 광복군에 입대하여 임정요인 호위 등의 임무를 수행했다. 유관순의 종조할아버지 유도기도 아우내만세운동 사건으로 1년형을 치렀다.
유 열사에게 가장 훈격이 높은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9명에게는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됐다. 독립운동사에 유 열사 만한 인물도 드물고, 이처럼 독립운동가를 여럿 배출한 집안도 찾아보기 어렵다.
유 열사의 짧은 삶을 살펴보면 슬픔과 아픔, 애잔함이 끊이지 않는다. 어린 여성의 독립에 대한 절절한 염원과 부모의 죽음에 대한 깊은 원한, 그리고 고통…. 잘 쉬시라! 처절하게 살다 산화한, 어리고 순결한 영혼이여!
유열사 소꿉친구 남동순 지사
2010년 107세의 나이로 작고한 독립운동가 남동순 지사는 유관순 열사의 행적을 상세하게 기억하여 후세에 남겼다. 충남 천안 사직동 출신으로 6살 때부터 유 열사와 함께 자란 소꼽친구이며, 이화학당도 같이 다녔다. 유관순 열사의 영정을 제작하는 데도 큰 도움을 줬다.
2008년 대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유 열사가 씩씩하고 총명했으며 배울 점이 많았다고 회고했다.
남동순은 1919년 유 열사와 더불어 독립만세운동을 벌였다. 유 열사와 함께 고향인 천안에 내려와 청주와 진천 등을 다니며 운동 참여를 호소했다.
남동순도 아우내만세 사건으로 서대문형무소에 갖혀 모진 고문을 당했다. 일제가 양팔을 뒤로 묶은 뒤 고춧가루물을 코에 붓고, 뾰족한 것으로 손톱과 살 사이에 찌르기도 했다는 것.
그는 15개월 복역하고 나온 뒤에도 계속 독립운동을 벌였다. 신익희가 결성한 독립운동단체 '7인 결사대'에서 참여하여 중국 상해와 연해주 등으로 독립운동자금을 전달했다. 광복 이후에는 독립촉성애국부인단을 조직, 사재를 털어 군인과 경찰을 도왔고, 한미고아원을 만들어 전쟁고아들을 보살폈다. 3.1여성동지회, 한국부인회에서도 활동했다. 평생 결혼을 하지 않은 이타적인 삶을 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