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프리즘] 그 때 내게 필요했던 것
마음 깊은 분노·슬픔마저 통제 감정 표현도 조심스럽던 시절 자유롭게 표출하는 시대 기대
2016-11-09
고속도로 개통식이 다가오자 학생들은 수업 대신 모내기에 동원되었고, 고향 마을에는 면직원인지 하는 사람이 상주하면서 보리를 걷고 모내기를 하라고 성화를 해댔다. 대통령 행렬이 지날 때 온 들판이 초록으로 물들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어느 주말, 나는 아버지와 낯선 이가 오토바이를 세워놓고 지켜보는 가운데 가랑비를 맞으며 보릿단을 걷었다. 분노와 모멸감으로 바들거리는 내게 아버지께선 `그 사람도 딱하지 않냐. 보름째 집에도 못 들어가고` 라고 하셨다. 폭발 직전의 내 감정이 아버지를 불안하게 만들고 있었다. 뭔가 억울했지만 아버지를 불안하게 할봐 마음 깊숙이 감정을 눌러두었다.
개통식 날, 읍내 모든 학생들은 그늘 한 점 없는 고속도로 위에서 몇 시간씩 대통령 행렬을 기다렸다. 학생들이 손을 흔드는 아주 잠깐 사이에 행렬은 지나갔다. 나는 내내 한여름 뙤약볕에 빨갛게 익은 얼굴로 담임선생님을 째려보았고, 종례시간에는 반장 역할을 내팽개치고 엎으려 시위를 했다.
그날 밤 난생 처음으로, 숙제도 없고 백일장도 아닌데, 발표할 기회도 없는데, `순전히 자발적으로` 시를 썼다. 아무리 봐도 도시와 도시를 잇는 고속도로는 아버지의 삶에 발전을 가져오지 않는다고. 할아버지께선 잠을 설치는 일이 많으시고, 좋아하던 솔숲도 사라져 내겐 슬픔이 더 많아졌다고 썼다.
몇 개월 후 나는 고3이 되었고, 학교에 새로 부임한 국어선생님께서 교지 발간을 추진하셨다. 나름 학교의 문재(文才)였던 내가 창간호 서시(序詩)를 써야 하지 않겠냐고, 고3이라 공부하는데 방해가 되면 안 되니 일기장에 써 놓은 시가 있으면 가져오라 하셨다. 자발적으로 쓴, 유일한 미발표작이었던 그 시를 찾아 제출했고, 교감선생님께 불려갔다. 내 시 위에는 빨간색, 파란색 줄이 어지러웠고, 교무실 분위기는 뒤숭숭했다.
나는 왜 그 시가 교지에 실리기 곤란한 지 설명을 듣기도 전에 상황을 이해했다. `이 시는 일기장에 잘 넣어두었다가 우리나라가 미국 같은 사회가 되면 그 때 발표하라`는 말씀도, `순수한 감정을 읊은 시를 다시 쓰면 써 오면 좋겠다`는 말씀도 잘 알아들었다. 아주 영악했거나 모자랐을 나는 내 마음 다칠까봐 염려하는 선생님들께 죄송해 하면서 `아름다운 눈물`을 자아내는 `순수` 시를 써냈다. 발표된 시는 꽤 열광적인 호응을 얻은 셈이고, 나는 괜찮은 줄 알았다. 그러나 그 후 나는 내 안의 부정적인 감정들과 친해지지 못했다. 슬픔이나 분노 같은 감정이 생겨날 때마다 불편해하면서 그 `순수`하지 못한 감정들을 `정화`하고 `승화`하려고 억지를 부렸다. 결국 내 안에 들끓는 그 `불순한 감정들`을 검열하느라 시를 쓸 수 없게 되었다.
학생들과 수업을 하며 각자의 삶에서 가장 힘들고 슬펐던 일들을 돌아보는 시간이었다. 스물 몇 해의 짧은 삶에도 힘들고 고통스러운 순간들은 참 많다. 그런데 대부분의 힘들고 고통스런 순간들은 무시당하고 억압된, 드러내지 못한 감정들과 연결되어 있다. 그 때 자기 안에 들끓던 감정들을 확인하고, 뒤늦게나마 자신과 주변사람에게 하고 싶었던 말을 하며 펑펑 울고 나자 학생들의 표정은 훨씬 해맑고 말랑말랑해졌다. 열여덟 살의 내게도 칭찬이나 상장 대신, 그 많은 염려와 보살핌 대신 내 안의 감정, 분노와 슬픔이 자연스럽고 순수한 감정이라고 인정해주는 한마디가 주어졌다면 어땠을까? 혹시 그 때 `정말 화가 나겠다` `화 낼만하다` 혹은 `화내도 괜찮다`는 말을 들었다면 내가 아주 조금이나마 더 감정 표현에 자유로운 사람이 되지는 않았을까?
김형숙 순천향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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