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담청론] 김호연재의 법천의 하루
문희순 배재대 강사 국문학 박사
2012-12-24
법천의 물줄기 안에 송준길 선생의 삶의 공간과 강학 공간인 동춘당, 은진송씨의 영원한 할머니 유조비 정려각, 은진송씨 대종가 쌍청당, 송규렴가의 제월당과 옥오재가 지척지간에 있다. 김호연재 고택도 동춘당에서 한 시야 안에 위치해 있다.
김호연재는 동춘당의 증손부이다. 홍성 갈산 오두리에서 이곳 법천으로 시집와 살았기 때문에 친정 식구들은 김호연재를 '법천누이(法泉妹)'라고 불렀다. 9남매 중 여덟째였던 법천누이 김호연재는 열아홉에 혼인할 때, 이미 친정아버지 김성달과 어머니 이옥재가 운명한 뒤였다. 그래서인지 친정 오라버니들과 조카들이 서운하지 않을 정도로 자주 법천을 방문하였고, 그 만남마다 시를 흔적으로 남겼다.
김호연재는 자주 법천을 노래했다. 이 법천의 하늘 아래에서 김호연재는 스물세 해를 살다 갔다. 기쁠 때나 슬플 때, 고독에 온 몸을 떨 때, 고향 오두리 바다 물결과 형제를 그릴 때, 자신의 능력이 아까우나 규방 여인이라는 한계에 부딪혔을 때, 귀밑머리 흰 가닥 두어 서넛 비칠 때, 괴로이 잠 못 이룰 때마다 법천의 바람과 달·구름·안개·물소리·소나무·매화·숲·사립문·나비·새소리 등을 친구 삼아 시로써 달랬다. 이런 법천의 벗들이 있었기에 고독을 참아내고 위로받을 수 있었다.
조선이라는 어찌할 수 없는 시대에 살면서 '호연(浩然)' 두 자를 늘 가슴에 품었던 여성! 진정한 군자의 도를 몸소 실천하였으나, 때로는 시와 술로써 자신을 달랠 수밖에 없었던 김호연재! 김호연재가 호흡하였던 300여 년 전 법천의 하루가 아스라하기만 하다. 다음 시는 김호연재가 읊은 법천의 모습이다.
<법천을 찾아서(訪法泉)>
밤에 종씨와 초당에서 노니니/ 때는 7월 후망의 일일세/ 맑은 바람 답답한 마음을 풀어내니/ 옛 소나무 뜰이 청량함을 보냄이로다/ 홀연 명월이 휘황하게 동에서 솟아나오매/ 비로소 뜰 나무로 들어와 그림자 움직이도다/ 느릿느릿 누에 오르니 네 벽이 빛나고/ 만 리의 맑은 빛 오늘 밤에 열렸구나/ 인생의 모이고 흩어짐이 본디 아득한 것이니/ 이 밤 좋은 만남이 작은 인연은 아닐러라/ 흉금 열어 웃고 말하매 화기 흐드러졌으니/ 다만 초가을 밤 길지 않음을 한하노라(夜遊從氏草堂, 時在七月後望. 淸風能解鬱, 乃是古松立庭送淸凉. 忽然明月煌煌出東邊, 初入庭樹影徘徊. 遲遲上樓四壁光, 萬里淸輝此夜開. 人生聚散本悠悠, 今宵良遇非小緣. 開襟談笑和爛 , 但恨初秋夜未延.)
대전은 명실상부하게 호서유학의 중심지이다. 그리고 호서유학의 중심인물 안에 송준길 선생이 계시다. 송준길가 후손들은 선생의 위상에 걸맞게 가문의 전통과 가격을 300년 넘게 유지해 왔다. 타 성씨로 혼인을 통해 이 집안의 여성이 된 며느리들도 독서와 문화를 통해 집안의 전통을 이었다. 자녀교육, 음식, 복식, 조상섬김, 여가놀이 등 모든 분야의 일상을 문서로 남기고 있다.
그런데 오늘날 그 위상과 전통은 주춤한 상태로 정체되어 있다. 격동의 근대화와 일제시대 등 시대의 아픔을 겪으면서 관심 밖에 놓여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대덕구 송촌에는 위에서 언급하였던 많은 전통문화 유산이 자리하고 있다. 특히 대전시 민속문화재로 지정된 '송용억가옥'은 조선의 대표적 여성시인 김호연재가 살았던 고택이다. 이 고택의 문이 굳게 닫힌 채 방치되어 있는 것은 우리의 무관심과 아픔이다.
김호연재 고택이 우리의 문화와 삶을 인도하는 공간으로 다시 깨어나길 소망한다. 고택의 흐드러진 영산홍처럼, 김호연재의 풍만한 인문학 유산이 우리의 삶을 충만한 감동으로 채울 수 있는 그날을 고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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