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희순 배재대 강사 국문학 박사
이 글은 남영(南泳, 1753-1784)의 부인 광주안씨가 1785년(정조 9, 을사) 3월 초 길일에 쓴 것이다. 남편이 갓 서른을 넘긴 나이로 갑자기 운명하자 제문 형식의 글을 빌려 삶과 죽음 앞에 놓인 자신의 이중적 고뇌를 토로해 낸 글이다. 광주안씨는 인조 대에 좌의정을 지낸 춘성부원군 남이웅(南以雄, 1575-1648)과 남평조씨(1574-1645) 부부의 7대 손부로, 공주 반포 성강리에서 살았다. 특히 남평조씨는 한글일기 `병자일기`의 저자인데, `병자일기`는 병자호란 발발 이후 호서지역으로의 피란여정과 서울 귀환생활 3년 9개월(1636.12~1640.8)의 생생한 삶을 일기로 기록해 놓은 매우 귀중한 기록물이기도 하다.
광주안씨는 이 한 장의 글에서 부모보다도 먼저 떠난 남편을 그리워하며 하늘을 향해 울부짖으며 원망하고 있다. 남편과의 부부생활은 햇수로는 17년이나 되지만, 실질적인 동거는 남편이 밖으로 출입이 잦았던 까닭에 10년이 못 된다고 하였다. 갑자기 사망한 남편을 뒤따라 죽음을 선택하는 것이 여자의 바른 도리이나, 남편이 남은 세 아이(아들 둘 딸 하나)를 잘 기를 것을 부탁하여 그 뜻을 저버리기 어렵고, 시부모가 살아계시니 그들을 봉양해야 함이 살아남아 있는 이유라고 말하였다. 특히 남편이 죽기 전 해에 광주안씨 자신의 병이 중하였는데, 자신을 바라보며 염려하고 눈물을 머금고 탄식한 남편을 생각하며 자신의 설움이 더욱 크다고 하였다.
이 한 편의 글 가운데 일곱 차례나 `아! 슬프고 원통하여라!(오호통재, 오호석재, 차호차회)`라고 탄식과 설움을 눈물로 써 내려갔다. 삼십을 갓 넘은 젊은 새댁은 남겨진 어린 세 자녀와 시부모 봉양, 살림이라는 인생의 대 전제 앞에 그 누구와도 서러운 심사를 펼쳐 내기도 어려웠다. 마음이 복받쳐 견뎌내기 어려운 설움만 하늘과 대답 없는 남편을 향하여 울부짖으며 통곡하였다. 남편을 잃고 살아가야 할 한 여인의 애절한 심정이 잘 나타나 있는 글이다.
그런데 광주안씨는 그 절박한 현실 속에서도 죽음을 선택하지 못한 자신의 고뇌, 곧 조선이라는 시대가 죽은 남편에 대한 살아 있는 여성의 태도를 주시하였던 상황에서 자유롭지 못하고 있음이 무겁게 다가온다. 오늘날까지도 미망인(未亡人)이라는 단어가 아무런 거리낌 없이 사용되고 있는 것을 보면 조선사회의 폭력성은 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우리는 결혼과 이혼이 비교적 자유로운 시대에 살고 있다. 한 번밖에 없는 이생의 삶을 생각한다면, 나 한 사람의 삶은 그 무엇과 바꿀 수 없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과거와 현재, 미래로 이어지는 오늘은 또 역사의 한 지점이다. 대전지역의 역사 속에서 가문을 일구어냈던 선대 여성들의 삶을 잠시 떠올려 본다. 자신의 불편한 삶을 딛고, 가문의 역사와 미래를 일구어냈던 여성들 말이다. 그 선배 여성들의 삶 속에서 역사를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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