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통기한 표시제 허실

잘 먹고 잘 사는 인생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소비자의 식품 선택 기준도 날로 까다로워진다. 제공되는 정보도 다양해져 단순히 무엇으로 만들었는지를 떠나 어떤 원료가 얼마만큼 들었는지, 각 원료의 영양성분은 하루 권장소비량에 얼마나 해당하는지 등 확인하는 정보도 점차 는다. 하지만 소비자가 식품을 구입하면서 여전히 가장 민감하게 확인하는 것 중 하나는 바로 유통기한이다. 최근 한국소비자원에서 유통기한 외에 식품을 섭취할 수 있는 기한을 표시하는 새로운 제도를 도입해야 한다는 지적을 내놨다. 소비자에게 '유통기한이 지난 식품은 먹으면 안되는 것'이라고 절대적으로 인식된 유통기한 표시제도에 어떤 허점이 있는지 알아본다.

◇유통기한의 허점=한국사람이 쌀 다음으로 많이 소비하는 밀 가공품은 면이다. 한국소비자원은 면류 제품중 대표적인 건면과 생면, 대표적인 냉동식품인 냉동만두를 구입해 유통기한이 지난 후 얼마동안 안전에 문제가 없는지 실험했다. 제조 방법이나 제품의 특성에 따라 유통기한이 지난 후 품질이 변하는 시기는 다소 차이가 있었지만 결과는 놀랍게도 유통기한이 만료 된 후에도 면 중 기름에 튀기지 않은 건면은 50일까지, 냉동 만두는 25일까지 안전상 문제가 나타나지 않았다.

유통기한은 말 그대로 '유통이 가능한 기한'일 뿐 '섭취가 가능한 기한'을 표기하지는 못한 셈이다. 또 식품을 어떻게 보관하고 취급하느냐에 따라 안전사고는 유통기한과 관계 없이 발생할 수 있다.

유통기한이 지나지 않은 우유도 냉장보관하지 않으면 안전성을 보장하기 어려운 것과 마찬가지. 따라서 판매자 중심으로 운영되는 유통기한을 소비자 중심의 소비기한 제도 등 소비자 중심의 별도 표기 제도나 보완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언제까지 먹을 수 있나=유통기한이 지난 후 식품이 변화한 정도는 식품의 특성과 제조 과정의 특성에 따라 제각각이었지만 건면과 냉동만두, 생면의 순으로 변질이 더뎠다.

기름에 튀기지 않은 건면은 상온보관, 생면은 0℃-5℃에 냉장, 냉동만두는 영하 15℃-영하18℃에 냉동보관하면서 일정 기간 동안 제품의 일반 세균수와 대장균군수, 대장균, 곰팡이, 수분 함량 등의 변화를 확인해 보니 기름에 튀기지 않은 건면은 유통기한이 지난 후 총 시험 기간인 50일, 냉동 만두는 25일까지 안전에 문제가 없었다.

단 제조 과정 중 별다른 가열 공정이 없는 생면은 유통기한 만료 후 빠르게 변질됐는데 유통기한 경과 후 9-12일 사이 곰팡이가 생겼다.

이는 각 가정의 냉장 온도, 냉장고 내 청결 상태, 냉장고 문을 여닫는 횟수 등 개별적인 상황에 따라 다소 차이를 보일 수 있다.

한국소비자원이 이에 앞서 지난 2009년에는 유제품, 2010년 빵류를 대상으로도 시험을 실시했을 당시 생크림 케이크와 크림빵 등은 유통기한이 지난 후 이틀 만에 변질됐지만 0-5℃ 냉장조건에서 보관한 제품 중 치즈는 유통기한이 지난 후 70일, 식빵은 최대 20일까지 안전상 문제가 없었다.

◇소비기한 도입 필요=세 차례의 시험 결과에 따르면 어떤 식품이냐에 따라 변질 정도가 크게 달랐다. 생크림 케이크나 크림빵, 생면 같은 경우 부패 및 변질 속도가 빠른 식품으로, 건면이나 치즈 등은 장기 저장이 가능한 식품군으로 분류할 수 있는데 현재 유통기한표기는 이런 특성을 잘 반영하지 못한다.

장기 저장이 가능한 품목에 대해서는 유통기한 대신 '품질유지 기한(Best Before Date)' 같은 보다 확대된 범위를 적용하자고 제안한다.

또 부패 및 변질 속도가 빨라 안전 사고의 우려가 있는 식품군에는 '소비 기한(안전유지기한·Use by Date)' 제도를 도입해 오래 가는 식품은 소비자에게 실제 그 식품의 품질이 유지되는 기한을 알려주고 쉽게 변질되는 식품은 안전하게 섭취할 수 있는 기간을 고지해 집중 관리해야 한다는 것이다.

유통기한을 지키지 못해 낭비되는 돈도 상상 이상이다. 한국식품공업협회의 조사에 따르면 현재 제조·판매되는 식품 중 유통기한이 지나 반품되는 양은 약 1.8%다. 지난해 기준 식품 출하액 34조원 가운데 6100억여원에 달한다.

이밖에 각종 유통경로에서 유통기한이 지났다며 폐기되는 식품을 생각하면 금액은 훨씬 늘어날 것으로 추정된다.

한국소비자원 관계자는 "현행 식품의 유통기한 표시제도는 다양한 식품의 특성을 반영하지 못해 소비자 중심의 새로운 식품기한 표시제도로 개선할 필요가 있다"며 "소비자들은 유통기한이 지난 제품을 무조건 버릴 것이 아니라 맛이나 색, 냄새 등 이상 징후를 종합해 보고 섭취 여부를 판단하는 지혜를 발휘해야 한다"고 말했다.

오정연 기자 pen@daejon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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