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리더/2008년 作
내가 이 영화를 처음 접한 것은 2010년의 어느 찌는 듯 한 여름날 밤이었다. 그날 저녁, 나와 아내는 사소한 일로 심하게 다퉜다. 잘못은 내게 있었지만 예상을 뛰어넘는 아내의 분노는 나를 결국 이성마비 상태로 몰아넣었다.
언제나 느끼는 거지만 사소한 일만큼 본질에 가까운 것도 없다. 좁쌀만 했던 다툼의 양상은 베이킹파우더를 들이부은 밀가루 반죽마냥 부풀어 올랐고, 폭풍의 언덕에 오른 우리들에게 더 이상 이 싸움의 단초가 됐던 문제들은 관심의 대상이 아니게 되어갔다. 아내는 그 길로 아이를 데리고 근처 언니집으로 가 버렸고 밤이 늦도록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냉정과 열정의 교차로에서 방황하던 나는 냉장고에서 캔 맥주 한 박스를 들고 나와 얼마 전 세일가로 마트에서 구입했던 DVD 중 하나를 집어 들었고 아무런 기대 없이 DVD플레이어의 재생 버튼을 눌렀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영화가 끝난 직후 나는 곧장 아내에게 전화를 걸어 즉각적이고도 완벽한 항복 선언을 했고 돌아 온 아내와 함께 새벽까지 이 영화를 다시 돌려보며 우리의 본질적이고도 사소한 냉전을 종식시켰다. 그 때 본 영화가 바로 오늘 소개할 `더 리더 : 책을 읽어주는 남자`다.
간염에 걸려 몹시 허약해져 있던 소년은 학교에서 돌아오던 길에 구토를 하며 길가에 쓰러진다. 그런 그에게 한 여인이 다가와 손을 내밀고, 여인은 소년을 자기 집으로 데려가 더러워진 옷을 벗기고 몸을 씻겨준다. 고맙다는 인사를 하기 위해 다시 찾아간 여인의 집, 그날부터 열다섯 살 미하엘과 서른여섯 한나의 사랑이 시작된다. 책 읽어주기, 샤워, 섹스, 나란히 누워있기. 이는 어느새 두 연인의 사랑의 의식이 되고, 미하엘의 모든 생활은 한나라는 태양을 중심으로 공전하기 시작한다.
소설 `책 읽어주는 남자`는 독일의 법대 교수이자 저명한 베스트셀러 작가인 베른하르트 슐링크의 대표적인 장편소설이다. 2차 대전이 휩쓸고 간 독일의 1950-60년대를 배경으로 36세 여인과 15세 소년의 뜨거운 사랑을 담아낸 이 소설은 1995년 출간 당시 나치에 관한 전후 역사인식, 금기, 죄의식에 관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소설은 전쟁을 직접 수행한 세대를 대표하는 중년 여인과 전후세대를 대표하는 15세 소년의 세대를 뛰어넘는 사랑이 담고 있는 시대적 함의와 딜레마, 전후 세대가 진실과 대면하며 겪는 고통, 인간의 수치심 등에 대한 다층적인 이야기를 담고 있다.
영화는 `빌리 엘리어트`와 `디 아워스`로 이미 평단과 관객의 만장일치 찬사를 이끌어 내 온 스티븐 달드리 감독의 3번째 연출작이다. 연대순으로 진행되는 원작과는 달리 영화의 이야기 구조는 1950년대부터 1990년대까지 주인공의 삶을 뒤섞어 교차시킨다. 이러한 선택은 자유자제로 감정선의 구축이 가능한 장편의 소설을 함축하는데 상당히 탁월한 효과를 가져왔다.
스티븐 달드리 감독은 원작의 감동과 내용을 훼손시키지 않으면서도 비주얼적이고 절제된 영상과 색감으로 소설과는 다른 영화매체의 장점을 극대화 시킨다. 또한 기승전결의 관습적인 이야기 구조를 탈피함으로써 원작과는 또 다른 깊이 있는 주인공들의 디테일한 감정을 잘 묘사해 놓았다. 사실, 전 인생을 거쳐 사랑한 여자에 대한 의심으로 가득 찬 남자와 죽음과 단절 앞에서도 문맹이라는 콤플렉스가 더 중요한 여자의 심리상태를 비주얼로만 묘사한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관객과 평단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으며 작품성과 흥행 두 마리 또끼를 다 잡았다 평가되는 이 영화는, 역사적 비극 속에 버려진 한 여인과 소년의 사랑을 통해 진정한 사랑의 가치에 대해 역설한다. 또한 자기희생과 고통이 뒤따르는 반성, 그 후 맺어지는 화해와 용서만이 인간을 구원해줄 수 있다는 보편적 가치에 대한 감동적인 통찰을 보여주는 탁월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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